# 179
179.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79.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가 혹 당신입니까?”
생면부지의 병사가 테세우스인 것을 알아본 것은 독보적으로 커다란 신장과 체격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로마의 전령이 테세우스를 알아본 일을 누구도 기이히 여기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말 위에 있던 병사가 품에서 봉인된 서신을 꺼내 테세우스에게 건넸다.
“이랴!”
그리곤 어떤 말도 없이 바로 말머리를 돌려 로마를 향해 다시 달려갔다.
다그닥 다그닥
테세우스는 그런 전령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봉인된 서신을 확인했다. 봉인된 상태로는 가문의 인장이라거나 어디서 보낸 것인지 등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봉인되었다고는 하나 자신에게 온 서신을 열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테세우스는 거침없이 그것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로마가 다시 말해 세네투스가 당신에게 허락한 것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과거의 일을 잠시 뒤로 하고 로마의 법정에 정식으로 출두하여 권리를 요청할 수 있도록 유보한 것이 전부요. 서류상으로 히스파니아의 주권은 넘겼으나 히스파니아에 대한 실질적인 권리와 권한을 위해 로마 본국이 직접 나서야만 하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당신의 신분 또한 당신이 직접 쟁취해야만 할 것이오. 듣기로 뛰어난 전사이자 장군이라고 들었소. 하나 어떤 전사나 장군도 같이 싸울 병사가 없이는 적의 대군과 맞서 싸우기 어려운 법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필요할 것이오. 게다가 법정에서의 전투는 이미 종결된 전투를 복기하는 것에 불과하오. 모든 전투는 법정에서 재판이 시행되기 전에 끝나기 일쑤지. 히스파니아라면 또 모를까? 온통 적군뿐인 로마에서 당신이 살아남을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구려. 폼페이우스는 당신을 매우 경계하고 있더군. 정말로 경계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지 어디 한 번 기다려 보겠소이다.>
유려한 라틴어로 끊어짐없이 적힌 짤막한 글을 읽던 테세우스는 침음을 삼켰다.
“으흠.”
곁에 있던 사비누스가 의구심을 누르지 못하고 질문했다.
“무슨 서신입니까?”
테세우스는 말없이 서신을 그에게 넘겼고 사비누스는 굳어진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얼핏 보면 테세우스 님을 도발하는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서신을 보낸 사람은 아마도 폼페이우스 진형의 인사겠군요.”
테세우스는 동의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마 병사를 전령으로 부릴 수 있는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지.”
“임페리움이 있는 정무관 중 한 사람이 보냈다고 보시는 겁니까?”
임페리움(공인된 지휘권)을 가진 정무관은 딕타토르(독재관), 콘술(집정관), 프라에토르(법무관), 프로콘술(집정관 대행) 정도였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흔들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코르수스 호노룸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정무관이 내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낼 이유가 없다. 술라가 사망했다고는 하나 그 시일이 오래 되지도 않은 상황이니 로마의 유력가들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만한 시점도 아니야. 무엇보다 저들의 후원으로 정무관에 오른 이들이 나 하나 때문에 협력관계 있던 가문들과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원할 리가 없어. 저들이 감수해야 위험이 너무 크지. 물론 나중엔 어찌될 지 모르나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메텔루스 가문을 언급하시는 겁니까?”
“맞아.”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비누스가 질문을 던졌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세르토리우스 님의 복수를 위해 처단해야 할 인물이었지만 그것 외에도 그를 즉살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짐작하고 있으면서 묻는군. 이미 짐작하고 있는 사실을 묻는 건 지금의 정황을 보다 세심히 보기 위함인가?”
“테세우스 님께서 어디까지 보셨는지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폼페이우스에게도 말했듯이 메텔루스 피우스가 살아있었다면 폼페이우스와 내가 이렇듯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도 어려웠을 거다. 평화협정에 들어가면 그 공 역시 폼페이우스보다는 메텔루스 피우스의 과실이 덮어지는 일에 사용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메텔루스 가문의 메텔루스 피우스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아버지를 죽인 원흉과 협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비누스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테세우스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알다시피 이게 대표적인 이유고 굳이 다른 이유를 거론하자면 나와 적이 될 것이 분명한 메텔루스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를 죽였다.”
지금껏 말없이 듣고 있던 호라티우스가 의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신의 주인이 밝혔듯 로마에서 나의 힘은 미약하다.”
호라티우스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 했지만 사비누스가 빨랐다.
“메텔루스 피우스가 죽은 상황에서 히스파니아 평화협정, 사실상 히스파니아의 항복을 폼페이우스가 받아내면 메텔루스 가문은 폼페이우스를 적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로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폼페이우스를 흠집내고 메텔루스 피우스의 과실을 최대한 무마할 필요가 있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가문을 죽인 자와 손을 잡는다면? 으흠. 간단히 테세우스 님께서는 메텔루스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싸움에 끌어들인 셈이로군요. 폼페이우스가 그 사실을 예상했든 못했든 테세우스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내가 지켜본 폼페이우스라면 예상했을 거다. 어차피 메텔루스 가문과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을 테니 더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당장의 이득을 취하는 게 낫다고 결단했겠지. 그도 아니면 메텔루스 가문과 내가 어느 정도 상잔하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고.”
테세우스 자신의 영향력이 로마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메텔루스 가문의 증오를 더욱 잘 받아내는 방벽이 될 테니 그를 통해 후에 이득을 취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러모로 폼페이우스 그를 무시해서는 곤란했다.
사비누스는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흠. 그렇다면 서신의 주인은 세네토르, 아티커스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그렇겠지. 하나 아티커스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서신의 주인이 내게 알리고자 한 내용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군.”
사비누스는 서신의 내용을 다시금 상기해봤지만 숨어있는 내용같은 건 없었다. 따라서 의아한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서신의 내용 말입니까?”
테세우스는 로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크라수스를 지지하는 세네토르들과 메텔루스 가문의 움직임이 상당히 공격적인 모양이로군. 심지어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진형의 인사들마저 나를 도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호라티우스는 사비누스로부터 서신을 건네받아 읽다가 대뜸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아니 그런 내용이 서신 어디에 적혀 있단 말입니까?”
“로마에서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서신의 주인조차 나와 친구가 될 생각이 없어. 기다리겠다는 건 저들이 받은 회유와 협박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내가 제공해주지 않는 한 내 편에 서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사비누스는 조심스럽게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저어되오나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말 그대로 기다리겠다는 표현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기다린다는 서신을 굳이 보내지 않아도 나는 저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메텔루스 가문의 표적이 된 사람과 먼저 가깝게 지내려는 행동을 함으로 구태여 저들의 심기를 긁을 연유가 없다. 은밀히 보내도 될 서신을 이런 대로에서 대낮에 건네주는 연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서신을 보낸 건 말 그대로 폼페이우스에게 할 말을 남기기 위함이지 나를 위하거나 나와 연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마 서신을 가져온 병사 역시 폼페이우스에게 충성심을 가진 병사 중 하나였을 거다.”
그 말에 사비누스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 말씀은 다시 말해 현재 로마에서 테세우스 님을 도우려는 자들이 없다는 소리 아닙니까?”
테세우스는 눈을 감고 로마에 입성하게 되면 일어날 일들을 그려봤다. 일단 저들은 자신이 로마에서 조력자를 만들 시간을 주지 않고자 일사천리로 자신의 시민권 부여 문제를 법정에 회부할 것이다. 그리되면 시민권 문제는 통과되더라도 세르토리우스 아들이라는 신분은 기각될 수 있다.
‘하나 이건 일이 좋게 흘러갈 때 그런 것이고.’
협약을 어기는 문제인데 어찌 좋게 흘러가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좋게 흘러갈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협약문제가 걸려 있으니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로마의 명예를 거론하며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지만 저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다.
‘시민권과 신분을 일단 모두 인정한 후에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시민권과 신분을 회수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시민인 이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한이 있지만 어떤 조력자도 없이 법정에 서게 된다면 나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로마는 로마의 약조를 어긴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메텔루스 가문 등은 가문대로 저들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오직 자신만 모든 것을 빼앗길 뿐이다.
‘내가 너무 근시안적으로만 생각했군. 시민권과 신분은 협약대로 내게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토록 힘들게 얻고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겠군. 이미 저들과 입을 맞춘 폼페이우스 진형의 인사들은 내가 시민권과 신분을 인정받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며 도움을 거부할 테니 나는 어떤 식으로든 저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테세우스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법이 있으나 법이 아니고 명예가 있으나 명예가 아니며 사람이 있으나 사람이 아니로구나.”
법과 제도가 무용하다. 약속과 맹세 역시 없는 것과 같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허울좋고 보기좋은 옷에 불과하다. 탐욕에 따라 언제든 입고 벗을 수 있는 화려하고 남들 눈에도 보기 좋은 의상 말이다.
‘온 자는 선하지 않고 선한 자는 오지 않는다라······. 비극이군. 인간사의 비극이야. 큭큭큭.’
속으로 조소하던 테세우스는 강렬한 눈빛으로 로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고 잘못 생각했다.”
그 말에 사비누스와 호라티우스가 테세우스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지.”
그 말에 호라티우스가 입을 열었다.
“히스파니아로 돌아가는 배편을 급히 알아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호라티우스의 말에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하하하!”
사비누스 역시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로마를 치시겠다고 결단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제가 섣불리 나섰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호라티우스가 급히 군례를 표하며 외치자 테세우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마음을 익히 아는데 용서하고 말 것이 있나? 로마를 앞에 두고도 로마를 등지겠다고 결심한 그 마음에 도리어 고마울 따름이다.”
잠시 서로 눈빛을 나누던 중 사비누스가 신중한 어조로 테세우스에게 되물었다.
“하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로마로 입성하도록 하지.”
테세우스는 눈을 빛내며 차갑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법과 제도를 너희들 마음대로 흔들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아울러 너무나 쉽게 자신에게 시민권과 신분을 허락한 일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도 말이다.
“나를 우습게 봤다면 그걸 이용해주지 않을 수 없지. 뭐 오히려 잘된 일이라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테세우스의 냉철한 미소에 사비누스와 호라티우스는 그가 또 뭔가 신묘한 계책을 구상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테세우스가 계획을 세운 이상 자신들은 그저 따를 뿐이다.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