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 영웅은 없다.
172.
노바 카르타고에 도착한 테세우스는 단촐한 튜니카 차림으로 호라티우스의 지시 아래 훈련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다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훈련받는 이들은 게툴리족이 아니라 군단병 훈련을 받은 히스파니아, 마우레타니아 등지의 속주병단이었다.
테세우스는 1만 기병을 이끌고 폼페이우스를 만나러 타라코로 향하면서 노바 카르타고에 1개 군단, 즉 오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어 이곳을 경계토록 했다. 다시 말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이야기다. 수틀리면 언제든 전쟁에 돌입할 수 있도록. 다행히 협상은 순탄하게 이뤄졌기에 테세우스도 자충수를 두지 않을 수 있었다.
하여 테세우스는 노바 카르타고에 도착하는 즉시 호라티우스에게 병권을 맡겼다. 그 결과가 눈앞의 모습이었다. 사실상 휴전이고 종전이었지만 당장 내일 전쟁을 앞둔 것처럼 호라티우스 예하의 병력은 훈련 및 전쟁대비에 여념이 없었다.
호라티우스 홀로 모든 병사의 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군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백부장, 곧 센튜리온들이 병사들의 자세를 지시하거나 직접 상대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챙 채챙!
“오와 열을 제대로 맞춰! 네놈 한 놈이 무너지면 너는 물론이고 옆의 동료도 죽는다! 머저리! 그걸 원하는 바라는 건가?”
센튜리온의 호통에 병사는 바짝 긴장하며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누가 자세를 무너뜨리라고 했나? 정신 못 차리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병사는 급히 다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다른 센튜리온들도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보폭은 적당하게! 스쿠툼을 쥔 팔에 힘주고! 밀어!”
“우아아아아!”
쾅콰광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네 군으로 나눠진 병사들이 모의전투를 치르고 있었는데 그 기세는 사뭇 실전을 방불케 했다.
당장 전장에 돌입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단련된 정예병이다. 숙련된 센튜리온과 프레펙투스 등은 군단의 지휘체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기에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한 번은, 두 번은 혹 여러 번 그럴 수 있을지라도 이들이 사람인 이상 한계점에 다다르는 때가 온다. 그때가 곧 히스파니아가 종결을 맞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레디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테세우스 님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이 같은 훈련은 불필요한 것 아닙니까?”
“대비하는 자에게는 우환이 닥쳐도 걱정이 없다. 불필요한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훈련받는 전부가 이 순간을 끝으로 병사가 아닌 삶을 살아가게 될지라도.”
프레디에는 테세우스의 말에 담긴 호라티우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훈련이 정말 헛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호라티우스에게 필요한 일이니 불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내심 그것이 부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이 순간, 작별인사를 먼저 고해야 할 것 같았다.
“위대한 전사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하나 테세우스의 이름으로 요청한다면 언제든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로마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는 의미를 테세우스가 어찌 모르겠는가?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프레디에에게 말했다.
“머지않은 시점에 다시 보도록 하지. 다시 보게될 때는 피를 흘리기 위해서 아닌 황금을 불리기 위해서 만났으면 좋겠군. 게툴리안을 대표하는 자를 말이야.”
테세우스의 말에 프레디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테세우스, 당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회를 얻고도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놈은 아닙니다.”
통합까지는 어려워도 게툴리안을 대표하는 족속이 되는 건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같이 전쟁을 치르며 전우애가 쌓인 기병들과 함께라면 기존의 구도를 재편하고도 남을 테니까. 더욱이 전리품도 넉넉하게 얻었다.
테세우스는 훈련받는 병사들을 다시 눈을 돌리며 말을 맺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다.”
테세우스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프레디에는 가볍게 목례를 취한 뒤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로마. 로마······.’
인물이 참으로 많은 곳이다. 이 시기 그 어떤 나라도 로마만큼 폭넓고 다양한 인재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지금껏 선출된 콘술만 해도 수백 명은 족히 넘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해 2명을 선출했으니 공화정이 시작되는 BC 5세기경부터 지금까지 배출된 콘술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뿐이랴? 법무관, 재무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정무관들, 장군, 정치가, 철학자, 예술가, 건축가 등등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로마를 지탱하고 부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가?
로마의 저력은 수많은 위기때마다 드러나지만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한니발과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어지간한 국가같으면 한니발이 대승을 거둔 시점에서 끝났다. 일인체제로 굳어진 국가라면 전쟁의 승패에 훨씬 더 경직된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로마가 왕조국가였다면 패망의 수순을 밟아 결국 카르타고에 굴복하거나 멸망했을 지도 모를 일. 그러나 알다시피 한니발은 대승을 거뒀음에도 로마에 패배한다.
심지어 지금의 로마는 그때의 로마보다도 부강했다. 역사가 증명하듯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더욱더 강력해질 것이다. 다양한 능력과 생각을 가진 인재들이 한데 모여 로마를 강대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으니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봐야했다.
‘군을 양성해 로마를 짓밟을 수는 있겠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로마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는 없다. 로마의 폭넓고 다양한 문화와 체제를 맛본 이들이 모두 죽어 나자빠지기 전에는 제이 제삼의 로마가 나타날 것이다. 당연히 불가능한 소리고.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짓거리를 벌였다가는······.’
그도 아니면 새로운 문화와 더 나은 체제를 구축하면 되지 않냐고? 모든 기술과 이념, 체제는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본 인프라가 구축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부분일뿐더러 급진적인 변화를 주도한 이상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자신이 놓친 것이 더러 있을지는 모르나 재차 생각해도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여겨졌다. 그렇기에 그는 과거의 일은 이쯤에서 덮어두고 보다 시급한 일을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돈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게 아니다. 물론 이 시대는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 자체가 유명무실하기에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더욱이 로마는 시민의 사유재산을 법으로 보호하고 있지. 시민의 사유재산이라면 말이야.’
테세우스는 엉클어져 있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아직 협상 내용이 확정되지도 않았건만 그의 머릿속에는 로마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없었다.
*
로마의 원로원.
로마를 녹여버릴 것처럼 내리쬐는 태양은 원로원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토가를 입은 원로원의 의원들은 땀을 흘리면서도 면면부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한 의원의 웅변을 듣고 있었다.
의원의 웅변이 대단해서? 아니면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말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라서? 아니다.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원로원이 폐회될 때까지 이말저말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의원들이 그의 웅변에 귀기울이는 것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끊어지는 그 시점을 노려서 발언권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현재 대두되는 내용은 무엇이냐? 더 들을 것도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주최되는 이 회의는 의원들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자리한 당해의 콘술 프라이오르,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콘술에게 마련된 자리에 앉아 귀를 파고 있었다.
정원수가 300명이던 의원 수를 술라가 원로원의 영향력을 강화한답시고 그 두배, 600명에 달하는 의원을 뽑아놓았기에 파벌싸움이 극심했다. 이곳이 원로원이 아니라 도떼기시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요란했다.
토론 중간 중간에 야유를 보내는 것은 물론 박수를 치기도 했고 수시로 의원의 정족수를 확인해달라고 의장에게 요청했다. 이 모든 것이 의결을 통과시키지 않기 위해 하는 방해공작이라 할 수 있었다.
잠시 말이 늘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의원이 의장을 바라보며 외쳤다.
“잠깐! 더 듣기 전에 일단 정족수 확인을 요청하오!”
“아니 아까도 확인한 것 아니오? 당신은 눈이 없는 것이오?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았으면 회의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오!”
정당한 이유없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의원은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의사정족수는 이미 채워지고도 남은 후였다. 다만 모든 의원은 정족수 확인을 요청할 권한이 있었다. 이 권한은 주로 회의를 지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대놓고 면박을 줬지만 정족수 확인을 요청한 의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허험. 의결정족수 확인을 요청하는 것이오.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가 치열하게 토론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안건에 대하여 찬반, 가부 등의 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성원수가 의결정족수였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여러 번 확인한 후였다.
“하아!!”
면박을 주던 의원은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더 말해봐야 시간이 더 지체될 테고 그리되면 결국 저들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콘술 프라이오르, 브루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어떤 제재도 하지 않았다. 원로원 회의는 주로 집정관이 주재하나 때때로 법무관이나 호민관이 사회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현재는 브루투스가 이곳의 의장이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의결정족수는 200명이며 그 수도 확인되었으므로 회의를 속행하겠소!”
토론하고 투표하는 것은 의원들의 권한이었다. 의장은 토론이 끝나고 투표가 시작될 때에나 통제권을 부분적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발언권은 한 번에 한 명씩 연공서열(年功序列) 순으로 이뤄졌고 해질녘까지는 무조건 회의를 마쳐야 했기에 상위 서열에 위치한 의원들의 뜻대로 의결이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의원은 간단한 성명, 안건에 대한 논의는 물론 심지어 안건과 관련 없는 주제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었기에 의결이 이뤄지기 전에 물밑접촉을 통해 미리 결정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늘처럼 회의가 늘어진다는 건 협상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원로원 안으로 급히 달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어찌나 급히 달려왔는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 모습에 의원들은 뭔가 더 더워지는 것 같아 저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사내는 원로원에 소속된 노예로 보였는데 원로원의 서기에게 서신을 전했다. 잠시 그것을 확인한 서기는 바로 콘술이자 의장인 브루투스에게 서신을 전했다.
지겨운 표정으로 이건 또 뭔가하고 받아들고 내용을 읽던 브루투스는 화들짝 놀라며 서신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브루투스의 태도때문인지 일어서서 계속해서 말하는 한 명의 의원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의원의 시선은 브루투스를 향해 있었다.
브루투스는 오른손을 들어 웅변을 하던 의원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토론은 세네토르의 권한이지만 이 소식은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으니 내 잠시 실례하겠소.”
브루투스의 정중한 요청에 의원은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의 권한이기도 했고 뭔가 안건에 대해 발언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회의를 지연시키기 위함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 토벌을 명령받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대패하여 전사했다고 하오.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토레툼을 점령하고자 나섰으나 도리어 대패했고 5만 중 2만에 달하는 레기온이 적의 손에 사로잡혔다고 하오.”
브루투스의 말에 원로원에는 싸늘한 충격이 내려앉았다. 이곳의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메텔루스 피우스의 대패 소식은 원로원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잠시 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의원이 말했다.
“그... 그럴 리가?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거늘!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