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 모순인지 순리인지.
169.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이러니인지 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르토, 즉 발렌티아는 결국 잿더미가 되었다.
테세우스는 묘한 사실을 뒤로하고 전령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군은?”
“알 수 없습니다. 나르보로 후퇴한 것인지 타라코로 후퇴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르보라면 아직 나르보에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타라코라고 해도 수성준비가 완벽하게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1만 이제는 꽤 많은 수가 전사해 8천 정도 되는 숫자지만 어쨌든 게툴리족이 함께 하니 저들을 이끌고 진격할 수는 있다. 다만 이제 동쪽 해안선에 거점이 될 지역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세르보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니 거점이 될 수 없고 그나마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타라코는 이미 폼페이우스군이 그곳에 깃발을 꽂았다. 기병으로 발렌티아를 함락시킨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요행이 또 다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고 무엇보다 전쟁을 수행할 물자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
더 근본적으로 게툴리족이 테세우스를 추종하기는 하나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이들이다. 로마인이 로마로 돌아가고 싶듯이 게툴리족은 게툴리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켈타이족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테세우스군은 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있던 병력마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세르토리우스의 충성된 부하였던 히르톨레이우스도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배신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망적인 미래만 그려지는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존재한다면 누군들 그 길을 잡고 싶지 않을까?
그의 배신과 별개로 그의 심정은 전혀 이해 못 할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일군의 장수도 그러할 진데 일개 병사들이야 말해 더 무엇하랴?
어쩌면 폼페이우스는 그것까지 꿰뚫어 본 것이리라. 원정을 많이 다녔고 유능한 장수이니만큼 병사들의 이런 일반적인 마음 정도는 꿰고 있다고 봐야 했다.
‘세네투스(원로원)에 보고할 적당한 전공은 챙겼으니 무리하지 않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갈 확률이 높겠군.’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 전에서의 패배를 통해 더욱 완숙해졌다. 애매하고 불리해 보이는 전장을 혈기만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지난 쓰라린 패배를 통해 뼛속 깊이 박아넣었다. 그걸 테세우스도 느낄 수 있었다. 세르토를 점령했음에도 그곳을 지키기보다 모조리 파괴한 뒤 후퇴하여 아군을 유인하는 폼페이우스의 행동은 노련함 그 자체였다.
‘장기전에 돌입하면 아군은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그럼 무작정 군을 이끌고 북상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첫째 보급물자가 부족하고 둘째 폼페이우스도 그걸 안다. 장기전으로 돌아서길 마음먹은 폼페이우스라면 전투를 피하며 아군이 지치길 기다릴 터, 역습에 궤멸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공성전을 펼칠 역량도 부족하다.
토벌군이 공성을 하고 수성을 해도 로마군에 밀리는 것이 현실인데 아군이 공성을? 물자도 부족하지만 경험 자체가 거의 없다. 켈타이, 게툴리족은 말할 것도 없고 군단병 훈련을 받은 세르토리우스군(엄밀히 말해 보조군)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수성은 그나마 해봤지만 공성은 이들에게도 미답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공성은 무슨 공성이란 말인가? 도리어 말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토레툼의 승리도 테세우스가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이길 전장으로 아군을 이끌었기에 승전했던 것이지 무슨 테세우스 휘하의 군이 대단한 강군이라서 메텔루스군을 격파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아닌 말로 테세우스가 메텔루스 피우스를 제때 죽이지 못하고 메텔루스군이 포위를 뚫어냈다면 저들의 역습에 테세우스군이 괴멸당했을 수도 있다. 폼페이우스가 패배를 염려하기는 했으나 만에 하나라고 가정한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인군단이라고 할 수 있는 테세우스가 있다. 하나 테세우스가 창 한 번 휘둘러서 죽일 수 있는 병력의 숫자는 기껏해야 최대 10명이나 될까? 물론 대단하지만 홀로 살아남아서 적을 벤다고 한들, 수천수만 명이 부딪치며 도출되는 전사자의 수에 비할 수나 있을까?
제아무리 테세우스가 대단해도 홀로 전황을 바꾸는 것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고 그 테세우스 역시 육체가 무슨 강철로 이뤄진 게 아니다. 실수 한 번에 목숨이 날아간다. 하나뿐인 목숨이 말이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군을 이끌고 북상하는 건 어떤 승산도 없이 막연히 이길 것이다라는 망연한 확신만으로 군을 죽음의 구렁텅이 밀어 넣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소리다.
‘후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군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폼페이우스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적의 의도대로만 놀아난다면 결국 얻을 것은 패배뿐이니까.’
얼추 생각을 정리한 테세우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병사에게 지시했다.
“내가 최초로 들은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사비누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고 듣는 대로 내게 오라 이르도록!”
척!
주먹을 심장 부근에 가져갔다가 팔을 상관을 향해 쭉펴는 예의 로마군의 군례를 취한 전령이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
멘시스 퀸틸리스는 주로 아폴로와 넵투누스를 기념하는 달로써 제국으로 갈수록 수확을 기념하는 농업축제는 중요성을 잃고 아폴로를 기념하는 루디 아폴리나레스 등이 더 각광 받았다.
다만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달인 퀸틸리스를 율리우스(Julius)로 변경, 이것이 현재의 July가 되었다.
그랬다. 어느새 유니우스(6월)가 지나고 퀸틸리스(7월)가 다가왔다. 태양이 자신의 뜨거움을 한껏 뽐내는 이 시기에 사비누스는 테세우스의 명을 받아 폼페이우스 진형에서 폼페이우스와 독대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앞에 놓인 포도주를 마시다가 옆으로 뱉어내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서커스 맥시무스에서 루디 아폴리나레스가 열리겠군. 무더운 여름날 질 나쁜 미적지근한 포도주나 마시고 있으려니 못내 아쉬워.”
아벤틴과 팔라틴 언덕 사이에 위치한 서커스 맥시무스(CircusMaximus)는 길이 621m, 폭 118m, 관람객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대 로마의 첫 거대 경기장이었다. 이곳은 로마의 종교적인 축제와 공공경기가 열리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로 이곳의 행사가 곧 로마 서커스의 롤 모델이 된다.
아폴로 기념 축제인 루디 아폴리나레스 역시 이곳에서 열였는데 검투, 무대공연, 승마경기 등으로 시민들에게 각종 볼거리를 제공했다. 농업축제가 날이 갈수록 중요성을 잃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폴로 기념 축제보다 볼거리가 풍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포도주가 아직 남아 있는 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부유물이 간간히 보이는 것을 봐선 폼페이우스의 말따라 확실히 질이 나쁜 포도주로 보였다.
“로마인은 로마를 떠나 살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사비누스는 폼페이우스가 왜 그것을 거론했는지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말에 루디 아폴리나레스의 화려한 축제와 함께 빛나는 로마의 모습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아련함이 더해져서 그런가? 아니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곳이라 그런가 불같은 귀심(歸心)이 피어올랐다.
이 마음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 로마인이 로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흉이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리움에 모든 것을 져버려서야 스스로의 명예에 먹칠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사비누스는 애써 마음을 억누르며 폼페이우스에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채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폼페이우스가 말했다.
“호라티우스, 그자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탐이 나는 인재들이로군. 어떤가? 내 휘하에서 활약하는 것이? 그것이 싫다면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사비누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폼페이우스에게 대답했다.
“졸장에 불과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실 정도로 귀하의 군이 어려운 모양이군요.”
“뭐? 하하하하.”
폼페이우스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어렵지. 어려운 상황이지. 호라티우스 그자가 맹렬하게 저항하여 사망자만 5천 명이 생겼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쪽이 아군을 걱정할 때는 아닐 텐데?”
폼페이우스의 말에 사비누스는 살짝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가운데 폼페이우스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히스파니아가 보급물자를 얼마나 비축했던지 지금쯤은 거의 바닥을 칠 것이고 이민족들을 활용한 것은 대단했지만 올해가 지나면 그것도 흐지부지될 터, 그럼 어디 보자. 휘하의 아우실리아(보조군)가 2만은 될까?”
“군을 정비하면 귀하의 군대를 박살 내는 건 일도 아닙니다.”
사비누스의 도발적인 언사에도 폼페이우스는 빙긋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만 그 웃음 뒤에 씁쓸한 기색이 조금 담겨 있었다.
“허튼소리라 일축하고 싶지만 세르토리우스군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더욱이 5만 메텔루스군을 먼지처럼 흩어버린 테세우스라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임은 분명해. 그러나 아군을 상대하기 전에 로마의 재물에 눈이 돌아간 켈타이족부터 먼저 상대해야 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히베리아족들도 있겠군. 저들을 상대한 후에도 아군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면 내 손수 그 위대함에 박수라도 쳐 주지.”
비웃는 말이 분명함에도 사비누스는 뭐라 대응할 말이 없었다. 폼페이우스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사비누스는 테세우스의 말을 폼페이우스에게 전했다.
“세네투스. 테세우스 님께서는 세네투스를 언급하셨습니다.”
원로원을 언급했다는 소리에 폼페이우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울러 본인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이번 토레툼전에서의 승전은 없던 명분도 있게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비누스를 바라봤다.
“그게 전부인가? 이곳까지 와서 전한다는 말이?”
“예. 다만 끝으로 덧붙이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로마는 히스파니아 전에서 승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 그럴지라도 폼페이우스, 당신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정녕 그것을 원하는가?”
사비누스의 말에 폼페이우스는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뭐라? 하하하하. 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다! 내가 그딴 수작질에 넘어갈 것이라 여겼나?”
“글쎄요. 저도 테세우스 님께서 어떤 복안을 품고 계신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간 테세우스 님을 지켜 봐온 저로서 한 말씀 드리자면 그 결과가 어찌 되든 폼페이우스 당신께 이로운 일이 아닐 겁니다.”
폼페이우스는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말이 헛돌고 있군. 우리 사이가 담화나 나누고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테세우스가 널 보낸 본래 용건을 말하라.”
“타라코. 타라코에서 직접 만나 협상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거부한다면 폼페이우스의 이름으로 2만 포로를 모두 참할 것이라고까지 덧붙이셨습니다.”
“뭐? 하하하하하.”
2만 포로를 폼페이우스, 본인의 이름으로 참해?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승전하더라도 악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저들이 사로잡은 2만 포로는 시민권을 부여받은 정규 군단병이다.
저들을 죽게 내버려 뒀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정계에서 사장되는 건 시간문제다. 메텔루스의 패배로 인한 것이지만 책임질 그는 이미 죽었고 그 문제와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정적들이 어떤 식으로든 물고 늘어질 테니 이 일에 대한 책임을 결코 벗지 못하리라. 이런 약점을 파고들 줄이야.
게다가 타라코라면 당연히 폼페이우스군에 더 유리한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협상을 거부한다면 사실과는 별개로 테세우스군에 겁을 집어먹었다는 인상을 아군에게 안겨주게 될 터, 간교할 정도로 영리한 자가 아닌가?
폼페이우스는 예상치 못한 테세우스의 협상 제안에 대소를 터트리다가 낯빛을 굳히며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헤르쿨레스의 현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테세우스의 용맹이 대단하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나 아군을 얕잡아봐도 어지간히 얕잡아보는 모양이군. 흥! 좋다. 일단 뭐라 그러는지 들어는 보겠다.”
어차피 양군 모두 당장 전면전을 벌이기 어려운 상황이니 협상 자체는 어려울 것도 없다. 협상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협상장에 들어오는 테세우스를 칠 수는 없다. 이건 스스로 디그니타스를 더럽히는 일이고 그리된다면 로마에서 더 출세할 생각을 말아야 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때는 자신을 압박한 테세우스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살려두면 상당히 위험한 자라는 걸 사비누스와의 대화로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폼페이우스의 두 눈에는 살벌한 살의가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