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 모순인지 순리인지.
168. 모순인지 순리인지.
나르보를 점령한 폼페이우스는 내친 김에 타라코까지 무력점령했다. 발렌티아도 이어서 점령하려 했으나 그곳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발렌티아를 점령하기 위해 주변정보 수집과 공략법을 탐색하고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근 5천에 달하는 병력이 발렌티아를 수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으흠.”
반란군의 주력군은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하고자 토레툼에 몰려있을 것이다. 토레툼이 점령당한다면 내륙과 동쪽 해안선의 교두보가 끊어지는 셈이니 히스파니아에 대한 영향력 가운데 절반, 그 이상까지 공중분해 될 것이다. 그러니 토레툼을 내버려 두고 이곳 발렌티아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을 리 없었다.
“타라코를 점령하기 전만 해도 이곳의 병력은 간신히 치안을 유지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고 보고 들었다. 보고가 잘못된 것이냐?”
토레툼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지지만 이곳 발렌티아 역시 전략거점 지역 중 하나다. 나르보, 타라코에 이어 발렌티아까지 점령할 수 있다면 토벌군은 로마 본국으로부터 훨씬 안정적으로 해상보급을 받을 수 있다. 병력이 많은 상황에서 보급까지 원활하게 이뤄지면 그 전쟁은 어지간해서 패배하기 어렵다.
히스파니아 최남동쪽에 위치한 노바 카르타고가 남아있지만 토벌군의 점령지역이 발렌티아 전선까지이니 노바 카르타고는 후에 차차 점령해도 상관없다. 아니 발렌티아와 더불어 토레툼이 함락된다면 그 전에 전쟁이 마무리될 것이다.
전선이 그 정도까지 밀리면 히스파니아 도시들은 로마에 적극 협조할 테니 반란군은 히스파니아 내부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근거지를 잃은 저들이 맞이할 것은 패배와 패망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 않습니다. 발렌티아를 점령한 테세우스와 그의 기병들은 토레툼으로 곧장 향했고 그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호라티우스라는 장수와 5백 남짓한 병력만 주둔시킨 것을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그럼 지금 확인된 5천은 어찌 된 숫자냐?”
“그것이 저희가 타라코를 점령하는 사이에 충원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라티우스라는 자가 발렌티아 내부에서 병사를 징집했다는 소리냐?”
“처음엔 저희도 그런 줄 알고 확인해봤습디나만 병사들의 면면을 확인한 결과 뿔뿔이 흩어져있던 세르토리우스군이 발렌티아에 합류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훈련받지 못한 병사들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척후 임무를 수행한 프레펙투스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단순히 위장이라고 보기엔 훈련된 병사의 숫자가 상당했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서 보고하는 것일 테니 발렌티아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은 급히 징집한 오합지졸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 사실에 폼페이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발렌티아를 점령하지 못하면 안전하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은 실질적으로 히스파니아 최북동 지역에 위치한 나르보가 된다. 타라코는 해상으로나 육상으로나 교전 지역이 될 확률이 높기에 이곳을 보급기지로 삼기엔 너무 위험하다.
나르보가 보급기지가 되면 떨어진 거리만큼 육로로 보급품을 날라야 한다는 건데 보병 1만 명이 2~4주 동안 쓸 물자를 수레로 나르면 650대에 달하는 수레를 끌어야 한다. 이걸 해상의 배로 나르면 몇 척이면 끝날 문제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인력, 물자 소요는 말할 것도 없고 보급선이 길어지면 실제 보급지에 도착해야 할 보급품의 양도 줄어든다. 보급품을 옮기는 자들도 먹어야 할 것 아닌가?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많은 기병을 보유한 반란군이 수시로 보급선을 끊을 것이니 또 다시 보급문제로 인해 군의 움직임이 제한될 확률이 높아진다.
메텔루스 피우스가 토레툼 점령에 성공한다면 말이 달라질 것이나 토레툼 점령은 물론 발렌티아 점령까지 지연된다면 보급물자가 얼마 남지 아군은 다시금 북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별 성과 없이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메텔루스 피우스의 말따라 로마 본국의 세네투스(원로원)가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같이 보고를 듣고 있던 지휘관 가운데 한 밀리툼이 폼페이우스에게 질문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발렌티아 점령은 필요하다. 하나 경계가 삼엄해진 이상, 함부로 점령전을 벌일 수 없다. 토레툼의 전투에 맞춰서 아군이 움직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만에 하나 토레툼에서 메텔루스 피우스가 패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토레툼에서 출격한 기병들이 동쪽 해안선으로 전선을 길게 늘어뜨린 토벌군을 동시에 타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벌군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런 위기를 감수하느니 덜 비효율적이더라도 토레툼의 움직임에 맞추는 것이 안전했다.
최악의 상황에는 나르보로 후퇴하면 될 일이고 그게 아니라면 타라코 지역을 전선으로 두고 저들과 자웅을 겨루면 될 일,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이 확실시된 발렌티아를 점령하려고 애써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폼페이우스의 대답에 밀리툼 시니어, 그라티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레가투스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토레툼의 상황이 정리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폼페이우스가 그렇게 회의를 마치려는 그때 포룸 카스트룸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전령이 있었다.
“토.. 토레툼에서! 후욱 후욱 토레툼에서!”
“오오. 벌써 승리했는가?”
“그럼 더 볼 것 없이 발렌티아 공략을 실시하는 방향으······.”
전령은 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패배! 아.. 아군이 패배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쌍심지를 켜고 전령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뭐? 뭐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급히 마음을 추스른 폼페이우스가 전령에게 되물었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아군의 피해는?”
“메.. 메텔루스 피우스 님은 적장 테세우스의 손에 의해 피살당했고 5만 병력 중 절반가량이 반란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패잔병들이 이곳으로 탈주 중이긴 한데 그 수가 불과 몇천도 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폼페이우스는 탁자를 후려치며 분을 토했다.
“뭐라? 5만의 병력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이익! 미처 도망도 치지 못했단 말이냐?”
이 무슨 황당한 노릇이란 말인가? 무려 5만이다. 그것도 로마의 정예군단 5만! 군단의 숫자로만 쳐도 10개 군단에 달하는 막강한 병력이다. 그런데 전멸에 가까운 대패라니! 심지어 총 사령관 메텔루스 피우스는 살아남지도 못했고 그 중 절반가량은 포로로 잡혀?
폼페이우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폼페이우스뿐만 아니라 포룸 카스트룸에 모인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세르토리우스라······.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이 이곳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내 발목을 잡는구나.”
폼페이우스는 나지막이 말을 뱉은 후 형형한 눈빛으로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들었다시피 상황이 이러하다. 그러니 모든 병력을 이끌고 발렌티아를 점령한다.”
“예. 알겠습니다. 나르보로 후퇴.. 예?”
“발렌티아 점령이라니요?”
“상황이 바뀌었다. 나르보로 후퇴할 때는 후퇴하더라도 적의 기세와 병력을 줄일 필요가 있다. 절반에 달하는 포로라면 그 수가 2만에 달할 터, 모두 죽이고 이동할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이곳으로 진격할 수 없다. 그만큼 시간을 번 셈이다. 그러니 아군은 발렌티아를 격파한 뒤에 나르보로 후퇴한다.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 한 치의 실수라도 있어선 안 된다. 발렌티아 점령과 나르보 후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히스파니아에서의 전쟁은 곧 로마의 패배가 된다. 그러니 아군의 피해가 얼마가 되든지 몰아쳐라!”
폼페이우스의 뜻이 정해진 것을 절절히 느낀 지휘관들은 절도있게 군례를 취하며 급히 카스트룸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시가 급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테세우스는 죽인 군단병의 무구로 아군을 재정비시켰다. 포로들의 갑옷은 빼앗지 않았지만 저들의 무기는 모두 수거하여 군단병과 함께 싸운 게툴리족, 켈타이족에게 나눠줬다. 저들이 들고온 재화도 적절하게 분배했고 큰 잔치를 벌여 전투의 피로를 풀게 했다.
떠들썩한 잔치가 몇 날 며칠이고 이어졌다. 테세우스는 반쯤 박살난 토레툼의 성벽을 창가에서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거의 불길이 잦아들어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커다란 모닥불을 바라봤다. 불과 어젯밤에도 광란의 축제가 일어났던 장소였다. 그 주변으로는 켈타이족, 게툴리족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술에 취해 너부러져 있었다.
무절제한 모습이었지만 저들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테세우스가 이같은 것을 허용한 이유는 저들의 호의를 사는 것도 사는 것이지만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여력이 아군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보급문제 때문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그간 비축한다고 비축한 물자를 전부 소모해버렸다. 더욱이 이번 결전은 지닌 보급물자보다도 월등히 많은 병력을 소집했기에 물자 소모가 극심했다.
전투가 끝났으니 게툴리족은 그렇다 쳐도 켈타이족은 저들의 영토로 보낼 필요가 있었다. 하나 아군의 약점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 법. 그것을 위해 테세우스는 잔치를 크게 열어 전투를 치른 병사 전체를 위무하고 아군이 건재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했다. 누가 뭐래도 이번 전투는 대승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테세우스군의 현 상황은 속된 말로 개털이라 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토레툼의 전투가 더 길어졌다면 보급문제로 허덕이는 건 메텔루스 군이 아니라 테세우스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테세우스는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마치려 했고 다행히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포로로 잡은 2만여명 로마군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테세우스군 내부에서는 벌써 저들 모두를 참하자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들이 가져온 보급품 역시 얼마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저들을 데리고 앞으로의 전쟁을 이어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호라티우스가 5천의 병력을 결집시켰다고 했으니······. 더욱이 아군의 승전 소식을 들은 폼페이우스는 나르보로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되면 전선은 당분간 고착화된다. 다만 아군은 로마와 다르게 소모된 물자를 빠르게 채울 수가 없다. 그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다. 국지적인 측면에서는 이득을 봤지만 대국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가장 먼저 전장이 히스파니아다. 지금까지는 이 부분이 아군에게 이점으로 작용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아군의 무서움을 인지했으니 저들은 이제 전방위적으로 히스파니아를 압박하게 될 터, 히스파니아 전체를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히스파니아의 절반 이상이 적대적 켈타이인들의 영역이다. 로마는 저들을 움직일 만한 능력과 재화가 충분한 곳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강대한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포로 2만을 죽인다면 아군에 대한 로마의 적개심은 더욱 들끓어 오르게 될 터, 지금의 상황도 아군에게 좋지 않다.’
메텔루스 피우스를 살려뒀다면 로마와의 관계가 그나마 덜 경색되었겠지만 테세우스가 거론했다시피 그는 죽는 편이 여러모로 더 나았다.
하지만 포로 2만은 조금 다른 문제다. 전쟁 중에 죽인 것도 아니고 저항할 수 없는 군인 2만명을 살해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메텔루스 피우스 역시 포로로 살려뒀다면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일 수 없는 위치에 놓였을 터, 바로 그래서 테세우스는 단칼에 그를 쪼개버렸다.
‘저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메텔루스 피우스를 죽였듯이 전장에서 모두 죽였다. 이들은 로마와 대화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일단은 히스파니아에서의 우위를 굳힌 후에······.’
테세우스가 갑옷도 걸치지 않은 단촐한 튜니카 차림으로 창가 앞에서 고심하고 있을 때 급히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급.. 급보입니다.”
전령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테세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세.. 세르토가! 그.. 그러니까 폼페이우스가 세르토를 함락시킴과 동시에 세르토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는 소식입니다.”
“!!!!!”
테세우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치켜떴다. 호라티우스가 5천의 병력으로 세르토를 사수하고 있었다.
물론 폼페이우스군은 그 8배 달하는 4만의 군세를 지니고 있었으니 점령당한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5만에 달하는 메텔루스군의 패전 소식에도 도리어 세르토를 함락시킬 줄은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폼페이우스 본인 또한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처할 테니 말이다.
“세르토가 함락당해?”
“그.. 그렇습니다.”
‘폼페이우스. 폼페이우스! 아군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꿰뚫어봤구나. 패전 소식을 듣고 마냥 후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를 줄이야. 게다가 세르토를 완전히 파괴했다라. 해상보급을 방해할 아군의 거점 자체를 지워버린 셈인가? 쯔. 상황이 좋지 않군. 매우 좋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던 테세우스는 다시 전령에게 말했다.
“호라티우스는?”
“아직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비록 호라티우스가 명장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지만 졸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세르토를 사수했을 것이고 폼페이우스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성을 공략하려는 폼페이우스군에게는 역부족이었겠지. 도망쳤다가 세르토에 합류한 병사들의 사기도 예전만 못했을 것이고.’
“후우우.”
답답한 마음에 테세우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