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 능구렁이.
161. 능구렁이.
테세우스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히르톨레이우스에게 말했다.
“그렇게 행동하기엔 히르톨레이우스 당신이 너무 영리하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볼 생각이었을 거다.”
“억측도 이런 억측이 없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군요!”
히르톨레이우스는 붉어진 얼굴로 테세우스에게 외쳤다.
프레디에와 게툴리족이야 그렇다 쳐도 로마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를 배신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가 아니었다면 페르페르나의 휘하에 더 많은 병사들이 가담했을 것이다.
테세우스의 말따라 발렌티아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는 조금 의아하지만 병력을 규합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으로서는 큰 도움을 입은 셈이다.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이렇게 몰아세우다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맹렬히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도 이성이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이다. 정당한 분노마저 절제하는 테세우스가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핍박한다고 볼 수 없었다. 지난 발렌티아에서의 일은 테세우스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적마저 존경심을 품을 수 있는 상관을 휘하 병사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마음 속 충만한 그것이 곧 밖으로 흘러넘친다. 공포를 퍼트리는 자는 먼저 스스로를 공포에 떨게 하는 법이고 자비를 퍼트리는 자는 먼저 스스로를 자비롭게 바라보는 법이다. 이번 일을 통해 이들은 테세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주변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지휘관이나 병사가 나오길 바랬지만 테세우스 휘하의 병력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주시하기만 했다. 게툴리족의 기병들이야 히르톨레이우스가 누군지도 모르니 애초에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었다.
히르톨레이우스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 테세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억측이라······. 전후 상황을 짐작할 수 없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잠시 말을 끊은 테세우스는 히르톨레이우스 휘하의 군단병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다시 외쳤다.
“알다시피 페르페르나는 토벌군과 모종의 결탁을 하고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를 독살했다. 하여 나는 그날의 경계조가 어떤 식으로 편성되었는지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확인해봤다. 다만 그날의 연회장의 경계를 책임지고 있던 자는 만리우스도 히르톨레이우스도 아니었다. 만리우스도 히르톨레이우스도 그날만큼은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으니까. 그날의 연회장 경계를 책임지고 있던 자는 듀이리우스, 히르톨레이우스의 심복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 내 부하 듀이리우스는 살해당했소! 바로 반란군의 손에 의해!”
“맞다. 그는 살해당했다.”
테세우스가 그렇게 말을 끊자 대화를 듣고 있던 병사들은 웅성거리며 저마다의 생각을 나눴다.
테세우스군 휘하의 군단병은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테세우스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어 요동이 없었지만 히르톨레이우스 아래 집결한 군단병은 과한 의심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더 컸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집결시킨 후 페르페르나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선 주역이었다. 그 공을 치하하기는커녕 추궁만 하고 있으니 못 미더운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한데 이상하지 않나? 호위 총책임자가 죽었는데도 독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도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말이야. 더 의심스러운 건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날 프레펙투스를 비롯한 센튜리온 여러 명이 살해당했더군. 그것도 독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말이야. 물론 그 시점을 이제 와 어찌 정확히 판별하겠느냐만은 사건 발생 후 지휘관들이 병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증언이 대다수니 그 전에 살해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측이겠지. 그렇지 않나?”
히르톨레이우스는 표정을 굳히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만리우스도 페르페르나에 가담했소이다. 세르토리우스 님의 암살을 준비한 자들이니 당연히!”
테세우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히르톨레이우스, 당신의 병사들이 그토록 허술한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두 배가 넘는 칼비누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아버지를 믿는다.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는 허술한 자들에게 호위 책임을 허락하실 분이 아니야. 만리우스? 만리우스의 병사들이 듀이리우스 휘하의 지휘관들을 암살했다라······.”
테세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끊은 뒤 서늘한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엄중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 몰래 지휘관을 암살하려면 그만한 친분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상관이 얼마간 나타나지 않아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관계는 되어야겠지. 애초에 지휘체계가 다른 만리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해낼 수 없는 일이고 만리우스의 영향력 역시 지휘체계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뭐 백번 양보해 센튜리온이나 혹 프레펙투스까지 그렇다 쳐도 듀이리우스에게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결코 아니야.”
테세우스는 주변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럼 페르페르나 휘하에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정도의 뛰어난 암살자가 있었던가? 글쎄? 직접 싸워봤지만 그 전에 죄다 도망이라도 쳤는지 그 비슷한 족속도 발견할 수 없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사위는 침묵에 잠겼다. 테세우스를 못 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군단병들은 이제 히르톨레이우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메텔루스 피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전령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으흠. 테세우스. 테세우스라······.”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페르페르나의 발렌티아가 그토록 빠르게 점령당할 줄이야. 세르토리우스 암살 후에는 모든 일이 실타래 풀리듯이 풀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테세우스라는 존재가 잘 풀려가던 실타래를 다시 뒤엉키게 만들었다.
게다가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
“세르토리우스 이자는 죽어서도 내 발목을 잡는군.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남하하는 것을 멈췄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군은 그대로 남하한다.”
“음? 레가투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당초 계획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군도 일단 진군을 멈추고 추이를 살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심스럽게 질문해오는 프레펙투스의 질문에 메텔루스 피우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앞의 칼보다 등 뒤의 칼이 언제나 더 무서운 법이지.”
폼페이우스의 이름을 빌린 건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다. 자신의 이름보다 폼페이우스의 이름이 더 잘 먹힐 테니까.
“그게 무슨?”
“복안이 있으니 그대로 우리 군은 이대로 남하한다!”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 세르토리우스 독살도 메텔루스 피우스의 계략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에게 복안이 있다고 하니 지휘관들은 바로 메텔루스 피우스의 명령에 수긍했다.
“음..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메텔루스 피우스. 술라의 심복이라더니 과연 능구렁이같은 작자로군. 소문 그대로라면 폼페이우스는 이런 계책을 낼 위인이 되지 못할 테니 모두 메텔루스 피우스의 계략이겠지.”
조금은 뜬금없는 테세우스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히르톨레이우스가 입을 열었다. 다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테세우스는 고개를 흔들며 히르톨레이우스에게 말했다.
“메텔루스 피우스에 계략에 페르페르나는 물론 히르톨레이우스 당신도 모두 놀아났다는 소리다. 아직도 모르겠나?”
“무슨?”
“쯔. 간사한 놈과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때문에 내 아버지께서 죽임을 당했다니······.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테세우스는 그 사실에 다시 한번 경각심을 느끼면서도 분통이 터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메텔루스 피우스는 페르페르나에게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를 죽이면 폼페이우스를 죽일 수 있게 해주고 후에 로마에 같이 입성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히스파니아 승리 후에는 폼페이우스가 정적이나 다름없으니 폼페이우스가 사라진다면 메텔루스 피우스로서도 손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페르페르나도 인지했을 테고 이미 폼페이우스와 내 아버지, 모두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던 그는 좋다고 받아들였겠지.”
말을 멈춘 테세우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 히르톨레이우스에게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으로 제안을 했을 것이다. 네가 메텔루스 피우스의 선봉장, 칼비누스를 격퇴한 이상 메텔루스 피우스, 자신의 이름보다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을 테고, 네 성향 역시 파악한 것일 테지. 신뢰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의 이름값도 한몫했을 테고. 네가 받은 제안은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을 거야. 반란이 일어난다면 잠시 뒤로 빠져 있다가 필요한 때에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주면 로마 입성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이었겠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잠깐 눈만 감으면 될 일이고 그 정도쯤은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을 테니까.”
정곡을 찌르는 테세우스의 말에 히르톨레이우스는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나? 메텔루스 피우스는 페르페르나가 폼페이우스를 처단하지 못할 것을 내다봤고 히르톨레이우스, 너는 반란군으로 몰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는 것을.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믿고 있던 너는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채 죽임을 당했겠지. 자신의 선봉장을 패퇴시킨 너를 메텔루스 피우스가 가만히 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 다시 말해 메텔루스 피우스는 개별 제안을 통해 너와 페르페르나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린거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폼페이우스의 제안이 아니라 메텔루스 피우스의 계략이었단 말인가?
“페르페르나가 네게 손을 내밀었겠지만 거절했겠지. 왜냐하면 그 역시 후에 처단해야 할 적이었으니 말이야. 세르토리우스 복수 아래 군을 결집해 대기하다가 페르페르나군이 토벌당하면 폼페이우스군에 동조하거나 너만의 세력을 구축했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너 역시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토벌당했을 것이다. 내세울 만한 공적은 어떤 지휘관이라도 탐을 내는 법 아닌가? 연패를 당한 메텔루스 피우스는 거창한 승리가 필요했을 거다.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을 잇고 있는 제물이 말이야.”
히르톨레이우스는 테세우스가 말을 이어갈수록 참담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나 테세우스가 나타남으로 상황이 바뀌었단 말이야. 발렌티아 점령전에 참가하지 않은 건 바로 추이를 살피기 위함이었을 거다. 설마하니 폼페이우스군이 제대로 남하하기도 전에 발렌티아를 무너뜨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당황스러웠겠지. 더 시간을 지체하면 내외부 모두에게 저의를 의심받을 수 있으니 부랴부랴 아군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정확하게는 합류하는 척을 말이야. 내 아버지, 세르토리우스의 등에 배신의 칼을 찔렀듯 내 등 역시 찌르기 위해서! 우습게도 결국 그 후에는 메텔루스 피우스 등에게 살해당했겠지.”
“나..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히르톨레이우스를 배신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군단병들이 테세우스에게 외쳤다.
“이 자를 당장 쳐 죽여야 합니다!”
“으드득! 이 짐승보다 못한 배신자 새끼야!”
“감히! 감히!! 우리를 우롱해!”
그 소리에 히르톨레이우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
“나는 덧없는 전쟁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살리고 고향, 로마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로마 말이다!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이나 일삼아야 한단 말이냐? 대체 언제까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것이냐? 꿈 깨라! 로마다! 우리의 적은 로마였단 말이다!”
히르톨레이우스는 표정을 잠시 굳혔다가 다시 외쳤다.
“폼페이우스는 내게 우리 모두 고향에 돌아가게 해줄 것을 약속했다. 세르토리우스와 페르페르나를 처단하는 데 도움을 주면 고향에 가게 할 것을 약속..”
그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애초에 맺지 않은 약속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은 히르톨레이우스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로마 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성토하던 군단병들의 기세 역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건 일부분에 불과했다.
“우리의 고향은 로마가 아니다. 우리가 충성을 맹세한 대상도 로마가 아니라 세르토리우스였다. 그런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그랬다. 현재 군단병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는 히스파니아나 마우레타니아 등지에서 징집한 병사들이었다. 군단병의 정규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보조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본래 군단병과는 군단의 성격 자체가 달랐다.
또한 군단병은 이들과 달리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지 지휘관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물론 마리우스 이후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기본이었다.
테세우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히르톨레이우스에게 말했다.
“그래서 너를 신임하던 상관을 배신하고 네게 충성을 바치던 부하를 죽였으며 나아가 세르토리우스 휘하의 모든 사람을 기만하려고 한 것이냐? 폼페이우스가 네 죄를 덮고 로마가 네 죄를 덮더라도 그 죄가 가려질 것이라 생각했나? 그것이 명예로운 군인의 길인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 그건. 큭.”
“네가 어떤 좌절감과 상실감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는 모른다. 확실한 건 너는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다. 변명할 수 없도록 더 명확하게 말해주지. 넌 아버지를 배신했고 네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죽이십시오!”
“그를 처참하게 찢어 죽이십시오!”
“죽여라!”
쿵 쿵 쿵 쿵
테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이곳에 모인 거의 모든 자들이 발을 구르며 테세우스에게 그를 죽일 것을 종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