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 기로(岐路).
160.
다음날 아침 출발하려던 계획은 그날 저녁, 테세우스군이 세르토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함으로 더 미뤄졌다. 테세우스는 시신을 세르토에 안치하기로 결정하고 현 상황에서 가용한 모든 것을 동원해 화려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부패한 세르토리우스의 시신을 본 테세우스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으로 물들었다. 이미 가루로 만들어버린 페르페르나와 그 일당을 다시 일으켜 양손으로 직접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간신히 분노를 삭힌 테세우스는 장례식 내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후 침상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좋은 일을 행하고 그 일로 명성을 얻고 힘을 얻은 후에 그 힘을 가지고 악한 일을 저지르면 과거의 선한 행적도 모두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한 것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보다 현재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다. 현재 내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나라는 존재를 특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네가 쌓은 것들에 스스로 함몰당하는 우를 범치는 않을 거다. 나 역시 항상 경계하는 부분이다. 과거에 쌓은 명성이 오늘의 패배나 악명을 덮어줄거라 기대하지마라. 초심을 잃지 말라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에도 너 스스로를 잃지 마라. 잠깐 타협하는 그 순간이 제방둑을 무너뜨리는 틈이 되어 네 모든 것을 어그러뜨릴 것이다.”
테세우스는 눈을 번쩍 떴다. 어렴풋이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꿈······. 꿈이었군.”
세르토리우스에게 전술과 전략을 비롯한 로마에 대한 제반지식을 배울 때 나눴던 대화 중 하나였다. 세르토리우스는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느끼고 경계하는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언제나 그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친아버지도 아니고 양아버지였다. 그의 빈자리가 이렇게까지 클 것이라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테세우스는 허탈함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투에서 승리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결코 되돌아오지 못한다. 그게 가족의 죽음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면 그 어떤 승리도 그 상실감을 대신할 수 없다. 세르토리우스의 죽음은 테세우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테세우스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갑주를 착용했다. 내심 의지하던 사람을 잃은 테세우스의 심정은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난 것 같았다.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잔혹한 이 시대에서 안식처가 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을 잃은 셈이다. 그 안식처를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일궈야 할 시점이었다. 그것도 거대하고 찬란한 제국, 로마를 상대로 말이다.
제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니고 뛰어난 무력을 지녔어도 한계가 없지 않다. 일례로 세르토리우스처럼 허망하게 독살당할 수도 있고, 테세우스의 적들은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를 죽이려 들지 모른다. 그 모든 위협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테세우스는 무덤덤하게 그 모든 감정을 받아들였다.
갑옷을 착용한 테세우스가 문을 열고 나서자 경계를 서고 있던 전사들이 절도있게 군례를 행했다. 프레디에도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테세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짧고 단호하게 명을 내렸다.
“출정한다.”
*
4만에 달하는 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폼페이우스는 앞서 이동했던 전령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히스파니아의 도시 모두가 우리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어째서?”
아직 테세우스의 진격소식과 발렌티아 함락 소식이 폼페이우스나 메텔루스 피우스 등에게 닿지 않은 상황으로 보였다. 전령은 폼페이우스의 눈치를 보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협력을 거부했다기보다는 보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일단 동쪽 해안선에 자리한 대도시 나르보, 타라코, 발렌티아, 노바 카르타고 중 발렌티아는 세르토리우스의 아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에게 함락당했습니다. 테세우스는 발렌티아를 가루로 만들어버린다고 공언했고 발렌티아는 이미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테세우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라?”
세르토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한데 왜 지금껏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이제 와 그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폼페이우스는 수많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질문하기로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상세하게 말해봐라. 페르페르나 일당이 세르토리우스를 독살하고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일이 얼마나 되었다고 발렌티아가 함락 당했단 말이냐? 다 떠나서 테세우스라는 자에게는 대체 무슨 병력이 있어서?”
페르페르나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폼페이우스지만 군재가 탁월하지 않을 뿐, 기본은 하는 인물이었다. 발렌티아는 단단한 성벽을 가진 도시인데 성을 차지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발렌티아를 빼앗겼단 말인가? 게다가 잿더미?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단순히 복수를 이행하고자 성을 물론 거주민 전부를 도살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소문에 의하면 테세우스는 사나운 기병들을 이끌고 발렌티아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발렌티아로 새로이 명명한 관저에 유력가들을 몰아넣고 화형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 주민들은 그곳을 발렌티아가 아니라 세르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허락도 없이 누구 마음대로 도시 이름을 바꾼단 말이냐?”
폼페이우스는 짐짓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냉철하게 전령으로 보고를 파악하고 있었다. 기병을 이끌고 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병은 개활지에서 유용한 병력이지 공성전에서 기병의 역할은 미미한 편이다.
물론 성안으로 진격할 수 있다면 조금 말이 달라지겠지만 공성전을 치르며 성문을 열고 전쟁을 치르는 어리석은 장수도 있던가?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전장의 상황이 선뜻 그려지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대체 어떻게 기병으로 빠르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는지 의문점만 증가할 뿐이었다.
“으흠.”
폼페이우스는 침음을 흘리며 재차 생각에 잠겼다.
차근히 나르보부터 우군으로 삼으며 남하할 계획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전령의 보고에 테세우스라는 사내가 만만치 않은 사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히스파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제 아버지 수준 만큼이나 올려버렸다. 그게 아니라면 히스파니아의 도시들 가운데 아군에게 협력하는 도시가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북쪽 도시들부터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남하하며 로마에 반역한 이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계획이었던 폼페이우스는 군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졌다.
딱히 근거는 없다.
하지만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테세우스라는 자는 미처 예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신속하게 군을 움직인 판단력과 아버지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은 냉철함을 동시에 지녔다는 소리다. 아울러 아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히스파니아 도시들을 압박하는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다는 소리다. 어쩌면 이미 아군의 남하까지 계획에 두고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대로라면 놈이 준비한 함정에 순순이 머리를 들이미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도 있었다. 페르페르나의 일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세르토리우스와의 일전에서 패배를 거듭한 것도 모두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는 조급함때문이 아니었던가?
“메텔루스군도 이 사실을 아는가?”
“전령이 이동했으니 곧 알게 될 겁니다.”
“진군을 멈추고 로마의 보급선이 두터워지길 기다린다.”
그 말에 폼페이우스의 지휘관들이 반발했다.
“헛소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폼페이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테세우스에 대한 소문은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령이 가져온 도시들의 협력 거부 소식은 헛소문 따위가 아니다. 보급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그걸 모를 제장들이 아니지 않나? 우리의 남하 계획은 세르토리우스를 잃은 히스파니아의 도시들이 아군에 협력한다는 예측 아래 세워진 것들이다. 하지만 저들이 협력을 거부하거나 보류하기로 결정한 이상, 아군의 선택은 정해진 셈이다.”
“저들이 우리 군을 거부한다면 도시들을 무력 점령하면 될 일입니다!”
“최후에는 그런 방법을 써야겠지만 현 상황에서 그런 결정은 아군에게 별로 이로운 행보가 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군.”
사실 히스파니아와 로마의 거리가 가까웠다면 세르토리우스가 아무리 대단했어도 벌써 전투가 끝났을 것이다. 병력 우위가 월등하니 그냥 밀어붙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히스파니아는 가도조차 제대로 닦여있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고 강의 수많은 지류들과 울창한 숲과 같은 지형요소는 수적 우위를 일정 부분 무마시켰다.
더욱이 세르토리우스는 요리저리 피해다니며 아군의 보급선을 끊었고 병력규모가 작은 부대들을 급습하는 전술을 택했기에 지형과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은 토벌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선이라도 두텁다면 많은 피해를 입더라도 진격하여 전략거점을 쟁취하면 될 일이지만 그마저도 아니었으니 마음만 앞서서 진격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테세우스는 사나운 기병을 이끌고 발렌티아를 점령했다고 했다. 그 기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안 그래도 유격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저들에게 기병이 추가되었으니 이는 날개가 달린 것이나 다름없다. 마음만 앞서서 그런 적의 흉흉한 아가리 속으로 군을 밀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히스파니아 도시의 협력은 곧 보급선을 두텁게하기 위한 전술이다. 그것이 무마된 지금 섣불리 진격하는 것은 재차 숙고해도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졌다.
“거절하기는 했으나 보류했다는 건 적대하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섣불리 저들을 건드려 세르토리우스의 잔당에 힘을 실어주느니 세르토리우스군을 쳐부순 후에 처리하는 것이 아군에게 보다 이로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니 긴말 말고 명을 수행하라.”
“알겠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세리토리우스의 독살 소식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분노했다. 더 이상 토벌군을 긴장케 할 적수가 없으니 토벌이 성공할 것에 안도하는 한편 자신의 패배를 돌이킬 기회 자체가 영원히 사라진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테세우스라는 자가 세르토리우스 사후에 돌연 대두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그 때문인지 폼페이우스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진정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라면 철저하게 쳐부숴 그렇게나마 자신의 오명을 씻어내리라.
*
토레툼으로 이동하던 테세우스는 루키우스 히르톨레이우스가 이끄는 1만이 조금 넘는 병력과 맞닥뜨렸다.
“무사하셨군요. 또한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루키우스 히르톨레이우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테세우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히르톨레이우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꿈에서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더군. 좋은 일로 공적을 쌓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악행을 저지르면 과거에 행했던 좋은 일조차 악한 일을 하기 위해 행한 것이나 다름없어진다는 말을 말이야.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히르톨레이우스. 왜 그랬나?”
히르톨레이우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 의심이라. 의심은 하지 않아. 확신할 뿐이지.”
“세르토리우스 님의 죽음에는 저도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를 매도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래? 아버지가 설혹 아버지께서 독을 마셨더라도 호위병력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무모하게 움직이는 분이 아니셨으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조차 구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내가 갈 때까지 부패한 채로 남아있었지. 으드득.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으로는 최소한의 호위병력만 남기고 그 일이 일어날 사이 잠시, 뒤로 빠졌다는군. 그런 일을 누가 행할 수 있었을까? 페르페르나가? 물론 만리우스도 있었지만 히르툴레이우스 당신만큼 아버지나 병사들의 신뢰를 받던 인물은 아니야.”
“아버지의 잃은 슬픔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이해해? 어처구니가 없군.”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했다.
“좋아. 그럼 왜 바로 군을 이끌고 합류하지 않았나? 내가 발렌티아를 점령하고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너도 들었을 것이다.”
“제가 세르토리우스 님을 배반했더라면 어째서 저들 페르페르나와 움직임을 같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세르토리우스 님의 복수를 하기 위해 군을 규합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