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59화 (159/298)

# 159

159. 기로(岐路).

159.

그 말을 마친 테세우스는 자신 앞에 포박된 페르페르나와 그 일당을 싸늘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페르페르나, 그라키누스, 만리우스를 비롯한 발렌티아의 지배계층은 모두 사형에 처한다.”

그러자 무릎 꿇려있던 로마인 한 명이 억울하다는 음성으로 항변했다.

“이.. 이런 재판이 어.. 어디 있단 말이오? 변호할 수 있는 기회라도 줘.. 줘야.”

“변호? 아버지는 너희의 이권을 그대로 인정해주셨다. 그럼에도 너희는 내 아버지를 독살했지. 다 떠나서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한데 대체 뭘 변호한단 말이냐?”

“나.. 나는 저자 페르페르나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그만! 끝까지 변명에 책임전가만 할 뿐이군. 어쩔 수 없이? 발렌티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던 너희들이 어쩔 수 없이 페르페르나에게 가담했다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혀를 잡아 빼서 죽여버리기 전에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테세우스의 살벌한 눈빛에 저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허풍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두번째 안건은 발렌티아의 일반 주민들에 대한 부분이다. 모두 죽여 본보기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아버지의 암살건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나 발렌티아를 떠나라. 이곳에 남겠다는 자들은 발렌티아와 함께 죽겠다는 소리로 듣겠다.”

테세우스의 말에 호라티우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극심하게 타오르는 분노도 테세우스의 냉철한 이성을 흐리지는 못했다.

모든 주민들이 작게 웅성거리는 가운데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주민들은 살려주되 발렌티아 도시는 파괴하신다는 뜻이십니까?”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 늙은이,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목숨을 걸고 테세우스 님께 고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고하라.”

“아시다시피 히스파니아는 켈타이족이 활개를 치고 있고 주변 도시들 역시 테세우스 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저희를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발렌티아를 떠나도 어딘가 정착할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니 직접 저희를 죽이지 않을 뿐이지 저희를 밖으로 내몰아 죽이는 처사밖에 되지 않습니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그래서?”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니까 너희를 살려주는 것은 물론 도시도 보전해달라는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테세우스는 버럭 화를 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내 말을 거스를 이유가 어디있다고 생각하나? 너희를 모두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푼 것임을 모르는 것이냐? 오냐! 그렇다면 너희 모두를 죽여서 나 테세우스가 이 일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만방에 알리겠다!”

그러자 모든 주민들이 두려워 떨면서 테세우스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부디 세르토리우스 님의 통치를 기억해주소서.”

발렌티아 주민들의 절박한 음성이 발렌티아 도시 전체를 메웠다. 그때 나섰던 노인이 다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발렌티아를 가루로 만드신다고 하셨지만 조금 전 테세우스 님께서는 저희 목숨을 살려주신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도시를 파괴하고 저희를 흩으시면 저희 중 대부분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세르토리우스 님의 일과 가장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힘없고 늙고 병들고 어리며 연약한 자들이 가장 먼저 테세우스 님의 진노 아래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또한 테세우스 님의 말을 스스로 거스르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부디 선처하여 주소서.”

테세우스는 깊게 한숨을 뱉은 후 자신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열변을 토하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름이 뭔가?”

“에우시코스라 하옵니다.”

“그리스인인가?”

“현재는 발렌티아의 주민입니다.”

“음.. 좋다. 하나 너희가 발렌티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에우시코스만은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얼마든지 버리겠습니다. 얼마든지! 세르토리우스 님의 이름을 본떠 ‘세르토’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부르겠습니다. 이제 저 에우시코스는 세르토의 주민입니다.”

그 말에 깨닫는 것이 있던 모양인지 주민들은 에우시코스를 따라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저도 세르토의 주민입니다.”

“이.. 이곳은 세르토입니다!”

“그렇습니다.”

테세우스는 에우시코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그런 뒤 관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발렌티아다.”

테세우스의 무거운 말에 주변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테세우스는 페르페르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하지만 페르페르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끔찍한 죽임을 당할 것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세우스는 그럴 의도로 질문한 것이기도 했다.

“보기보다 현명하군. 진작에 그렇게 현명했다면 네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이다.”

말을 잠시 끊은 테세우스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을 발렌티아의 기둥에 묶어라. 그리고 모조리 태워라.”

그런 뒤 다시 주민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타고 남은 잔해는 너희가 직접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숴라!”

병사들에게 이끌려 기둥에 묶이는 자들은 저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누구도 저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윽고 발렌티아로 명명된 관저는 불이 타올랐고 끔찍한 비명이 기둥마다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불길이 사그라지자 주민들은 테세우스가 명한대로 발렌티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발과 손으로 짓이겨 가루로 만들었다.

테세우스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병사들에게 물을 떠오라 명하고 그 물에 피로 물든 손을 씻었다. 테세우스는 붉게 물든 물을 발렌티아의 재 위에 뿌린 뒤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

“발렌티아의 핏값은 이것으로 끝이다. 다시 이 일에 대해 묻지 않겠다. 하나 세르토리우스의 이름 아래 엎드리지 않는 자들은 억누르고 있는 나의 진노를 대면해야만 할 것이다.”

테세우스는 잠시 말을 끊은 뒤 천둥처럼 소리쳤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에우시코스는 이 모든 것이 테세우스의 계산 아래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에우시코스, 본인으로 인해 일이 더 원만하게 풀린 점도 있지만 자신이 없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을 거라는 걸 에우시코스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닌 말로 피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면 번거롭게 재판이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자신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 이곳 세르토에서 감히 테세우스에게 반역하려는 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타난다면 주민들이 직접 그 자의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이도 어리다고 들었건만, 게다가 보여준 신위는 얼마나 대단했던가? 헤르쿨레스의 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에우시코스를 놀라게 한 것은 놀라울 정도의 자기통제와 더불어 말의 무게에 대해 정확하게 꿰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하던 테세우스의 모습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가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절제할 줄 알았고 최소한의 피로 자신의 뜻을 이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모두 지킨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와 더불어 존경을 적에게서조차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이니 테세우스의 적이 누구든지 간에 맥도 추리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경탄에 경탄을 거듭하고 있는 에우시코스에게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에우시코스. 이곳 세르토는 네게 일임하겠다.”

“어찌 저처럼 미천한 자에게!”

에우시코스 역시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에우시코스의 신분은 해방노예로 주인이었던 자를 따라 대략 15년 전쯤 발렌티아로 왔다가 주인이 풍토병으로 죽자 이곳에 눌러앉은 경우였다. 그런 자신에게 중임을 맡기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테세우스 앞에 나선 것도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아이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지 무슨 거창한 대의를 가지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신분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던 자들은 도리어 내 아버지를 독살하더군. 너도 그럴 텐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애초에 그럴 주제도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 됐다. 이곳 세르토는 네게 맡긴다. 네가 살린 곳이니 네가 이끌어라. 이곳이 죽고 사느냐는 네 손에 달렸다. 내 분노는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도록.”

테세우스의 서늘한 눈빛에 에우시코스는 경직된 표정으로 급히 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존경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호라티우스를 바라봤다.

“호라티우스.”

“예. 하명하십시오.”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투항한 자들의 죄목을 정리하고 엄중히 처벌하라. 받아들일 자는 받아들이되 죽일 자는 반드시 죽여라. 이 일에 예외는 없다.”

“명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프레디에!”

프레디에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지만 테세우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피를 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에 프레디에 역시 테세우스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오늘은 휴식을 취한 후 내일 아침 토레툼으로 이동하겠다. 못다한 휴식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가지도록 할 테니 이동 준비를 마치도록!”

“휴식을 취할 것도 없이 빠르게 정리되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프레디에의 대답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나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의 전투가 험난해질지 수월해질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 적절하게 취하는 것도 전략이라 할 수 있으니 오늘은 휴식을 취하도록.”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대충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세차게 떨어지는 빗물은 땅 위에 흥건한 핏물을 빠르게 씻겨나가게 만들었다.

‘나의 선택이 효율적인지는 모르겠다. 하나 관용은 주변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지만 공포는 주변을 배척하게끔 만들 뿐이다. 공포도 관용도 모두 필요하겠지만 적보다 아군을 많이 만드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필승의 전략이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또 다른 적을 만든다면? 그 승리가 또 다른 적을 만들고 또 만든다면? 항우의 전투가 그러했다. 싸우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더러 패배하더라도 더러 손해를 보더라도 아군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이름이 무고한 자의 피로 뒤덮이는 것은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후우.. 지치는군.’

테세우스는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육체는 쌩쌩하기 그지없었으니 온전히 정신적인 피로라고 할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 피로함을 애써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다. 프레디에에게 말했듯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도 휴식은 필요하니까.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맞고 있던 테세우스는 빗물이 스며드는 서늘함에 살육의 광기를 조금씩이나마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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