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 기로(岐路).
158. 기로(岐路).
게툴리족은 사나운 족속이다. 같은 무어인들조차 두려움을 지닐 정도로 사납고 거센 족속 말이다. 성문이 뚫리고 게툴리족이 성안으로 진입한 순간, 이곳, 발렌티아의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발렌티아의 병사들은 테세우스의 위압적인 신위에 싸울 의지 자체를 잃어버린데다가 지휘관들부터 제 살길을 찾아 달아났기에 발렌티아의 병사들은 오합지졸마냥 격파당했다.
애초에 명분이랄 것도 없는 상황에 승기마저 테세우스로 기울었기에 목숨 바쳐 싸울 병사 자체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단 말인가? 배신을 옹호하기 위해? 무엇보다 페르페르나와 그 일당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 상황 아닌가?
테세우스의 말을 기억하는 자들은 무기를 놓고 항복 의사를 표했고 게툴리족은 그런 이들은 베지 않고 지나갔다. 그것을 발견한 병사들은 테세우스군에 우후죽순으로 투항했다.
만리우스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우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게툴리족의 기병들은 양떼속의 이리떼처럼 저들을 할퀴고 찢고 뜯어 먹었다. 더 이상 테세우스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테세우스는 게툴리족이 성안에 진입한 순간부터 전투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호라티우스와 프레디에가 알아서 저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티아 곳곳에서 비탄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테세우스는 흑마에 오른 채 무심한 눈빛으로 휘하의 병사들이 성을 점령해가는 것을 바라봤다.
이윽고 피투성이가 된 만리우스와 침울한 표정의 그라키누스가 포박된 채로 테세우스 앞에 무릎 꿇려졌다.
털썩. 털썩
“크흑!”
“컥!”
테세우스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눈으로 만리우스를 바라보다가 눈매를 좁히며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신임했다. 아닌가?”
“······.”
만리우스는 어떤 말도 뱉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라키누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원수는 페르페르나와 우리요. 그러니 커헉!”
테세우스는 그라키누스에게 다가가 말을 꺼내던 그의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그라키누스는 피를 뿌리며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다가 멈췄다. 다행히 죽을 정도로 세게 가격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숨이 붙어있었다. 다만 허연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봐선 이가 여럿 나간 것 같았다.
“다물어라. 주제넘게 지껄이지 말고.”
자신들을 죽이고 발렌티아는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주제넘게 나서길 어딜 나선단 말인가? 가루로 만들든 내버려 두든 그건 온전히 테세우스, 본인의 소관이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원수 따위가 무슨 입이 있어서 지껄이길 지껄인단 말인가?
“도의를 아는 작자가 배신을 통해 뜻을 이루려고 했나? 다시 한번 지껄이면 그 면상의 가죽을 뜯어서 네 입에 처박아버릴 것이다.”
그 뜻이란 것도 결국 꼴같잖은 이기심의 발로 아니었던가?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포장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세르토리우스를 잃은 테세우스는 그 모습을 참아낼 인내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단번에 그라키누스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의문이었다.
테세우스의 살벌한 모습에 무거운 침묵만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때 그 침묵을 깨는 음성이 있었다.
“놔! 놔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내가!”
소리를 지르며 끌려오던 페르페르나는 사신처럼 자리하고 있던 테세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테세우스로부터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적의와 살의에 그는 말문이 턱 막혀서 어벙벙거릴 뿐이었다.
테세우스는 말에서 내려 포박되어 끌려오던 페르페르나에게 다가가 그의 목젖을 잡고 들어 올렸다.
“컥커컥!”
“이런 쥐새끼 같은 작자로 인해 내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으드득!”
쿠당탕탕!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보였던 테세우스는 의외로 그를 바닥을 다시 집어던졌다.
그때 일단의 무리들이 나아와 테세우스 앞에 엎드리며 외쳤다.
“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발렌티아에 거주하던 주민들로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남루한 행색으로 한눈에도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들과 함께 온 병사들이 입을 열었다.
“저들이 페르페르나의 위치를 저희에게 고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발렌티아는 바다와 근접해있는 곳이다. 탈출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바닷길을 통해 도망칠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날렵한 전사들을 후퇴로 곳곳에 매복시켜두었다.
그런데 매복한 병사들이 저들을 습격하기도 전에 주민들의 밀고로 성안으로 진입한 게툴리족에게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페르페르나의 위치를 고한 주민들이니 그것을 테세우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고 말이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저들에게 반문했다.
“자비? 너희를 자비와 관용으로 대하던 내 아버지께 너희는 무엇으로 보답했나?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징계뿐이다.”
그러자 저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외쳤다.
“부디! 부디 자비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죽일 자들의 압제 아래 저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디 세르토리우스 님의 통치를 기억하시어 저희를 헤아려 주십시오.”
그러자 프레디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이곳의 모든 이들을 도륙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푸십시오. 그리한다고 한들 누가 테세우스 님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 아버지의 죽음에 가담했든 아니든 저들은 발렌티아의 사람들입니다. 히스파니아의 모든 이들이 당신 앞에 굴복하도록 발렌티아의 모든 것을 도륙하여 저들이 행한 일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해야 합니다.”
그 말에 호라티우스가 급히 나섰다.
“징계는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어 집행한다면 징계는 징계가 아니라 화풀이에 불과합니다. 잘못했든 아니든 저들 가운데는 로마인도 있습니다. 재판도 없이 저들을 처벌하신다면 이는 명예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저들의 악함으로 인해 세르토리우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재고하여 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차가운 표정으로 프레디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프레디에!”
“예. 말씀하십시오.”
“발렌티아의 모든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라.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하라!”
“알겠습니다.”
프레디에는 단호한 표정으로 답한 뒤 테세우스의 명을 이행하러 사라졌다.
호라티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정녕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살육할 생각이란 말인가? 확실히 이 일은 히스파니아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단기간에 아군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신속하고 파괴적인 방법이다.
하나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승리를 하든 패배를 하든 테세우스 진형에는 피와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날 것이고 로마를 완전히 등지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전의 성격에 가까워 희박하게나마 로마를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완전한 로마의 적이 될 것이라는 소리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물론 앞으로 일이 어찌 되든 테세우스를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호라티우스는 이 일이 일으킬 파급력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아군에게 이로운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고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면 그 대가를 언제고 치른다는 걸 경험으로나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무참하게 약탈하기를 즐겨 하던 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호라티우스는 수차례 봐왔다.
따라서 명이 떨어졌음에도 호라티우스는 여러 번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 끝끝내 음성이 되지는 못했다. 더는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민들의 대표로 보이는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테세우스에게 절박하게 외쳤다.
“부디 자비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쿠웅
테세우스는 발을 구르며 추상같은 목소리로 저들을 질타했다.
“잠잠하라! 이곳 발렌티아에 세네투스(Senatus, 원로원)와 세네토르(Senator, 의원)는 없더라도 발렌티아를 다스리는 공직자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영향력을 가진 로마 시민이라도 있었을 텐데 발렌티아를 대표하는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가고 어째서 너희 같은 비천한 자들이 나서서 내 귀를 어지럽히는 것이냐?”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나 자치도시만 해도 세네투스와 두움비르(자치집정관)가 존재한다.
하나 프로빈키아(provincia, 속주)는 콘술(집정관)이나 프라에토르(법무관), 그 대행(대개 전임 집정관, 전임 법무관에 부여)들이 임관하는 거버너(총독)에 의해 다스려진다. 따라서 이곳에는 두움비르나 세네토르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은 대동소이하기 마련, 속주 도시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직책이 왜 없겠는가?
물론 히스파니아의 총독은 공석이 된 지 오래였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더욱 그 역할을 감당하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현재 테세우스 앞에는 발렌티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들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참고로 페르페르나의 손에 죽임을 당한 아우피디우스가 비공식적인 두움비르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식적으로는 어떤 권한도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속주에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총독이 공석임에 따라 그의 발언권이나 권한은 발렌티아에서 매우 강한 편이었다.
이는 히스파니아를 점령한 세르토리우스가 암묵적으로 도시 유력자들의 권한을 인정해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권을 보장해줬음에도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세르토리우스를 배신한 것이다.
어쨌든 아우피디우스가 병권, 즉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페르페르나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이런 자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다시 저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이 발렌티아를 대표할 수 있느냐?”
“그.. 그건!”
그럴 수 없음은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었다. 테세우스의 말대로 자신들은 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에 불과했으니까. 아닌게 아니라 바닷일은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 하층민에 해당하는 자들이 주로 그 일을 감당했다.
“더는 입을 열지 마라. 명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 참할 것이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저들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런 뒤 테세우스는 호라티우스를 바라보며 페르페르나 등을 가리키며 명을 내렸다.
“재판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겠지만 뭐 좋다. 그럼 호라티우스 네가 책임지고 발렌티아의 공직자들과 유력가들은 모조리 색출하여 관저로 끌고 와라. 이들 역시 관저에 구금하도록!”
호라티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군례를 취하며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
발렌티아의 관저는 발렌티아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테세우스는 병사들을 시켜서 건물의 기둥을 남기고 외부에서도 안을 볼 수 있게끔 벽을 부수라 명했다. 이에 병사들은 묵직한 도구로 사정없이 관저를 부쉈다.
쾅 쾅
병사들에게 끌려 나와 구름처럼 몰려든 발렌티아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테세우스의 말대로라면 관저뿐만 아니라 발렌티아의 모든 것이 저 모습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릴 테니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움찔움찔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들었지만 그 어떤 소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여는 자는 끌려 나와 그 즉시 게툴리족 전사들에게 끌려 나와 살육당했기에 이들은 필사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의 입을 막고 두려움에 떠는 여인들도 다수였다. 다만 다행히 그들과 아이가 끌려 나와 참살당하는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포로 뒤덮인 침묵을 아무렇지 않게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다. 너희 모두를 도륙하고 발렌티아를 잿더미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재판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 있더군. 그 결과가 딱히 달라지진 않겠지만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다. 안건은 내 아버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독살에 대한 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