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53화 (153/298)

# 153

153. 광기.

153.

세르토리우스는 그것을 단번에 털어넣었다.

챙그랑.

그러나 그것을 마시자마자 세르토리우스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과 함께 술잔을 바로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며 자신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이 마치 연기처럼 일그러졌다.

“이.. 이게. 대체? 어찌된······.”

비틀거리는 세르토리우스를 조소하며 바라보던 페르페르나가 입을 열었다.

“로마를 상대를 승리를 거둘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재기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겠군.”

세르토리우스는 정신이 혼미하여 기둥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했다.

“뭐라? 무슨?”

그러자 아우피디우스가 말했다.

“이만 처리하시지요. 이러다가 세르토리우스가 살아나는 일이라도 생기면.”

“괜한 걱정이군. 코끼리도 죽이는 독이니 그것을 마신 자가 살아남을 수는 없소이다.”

세르토리우스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비명과 함께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주변의 병사들도 곧 처리될 겁니다.”

그 말을 꺼낸 이는 만리우스라는 세르토리우스의 부하였다. 배신감에 세르토리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을거라 여기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웬걸 세르토리우스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만리우스. 왜 나를 배신했느냐?”

만리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 재물과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어리석은 놈.”

세르토리우스는 그 말만 한 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페르페르나를 바라봤다.

“페르페르나 네가 이 일을 주도한 것이냐? 나를 죽이면 히스파니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냐?”

“아닌가? 아우피디우스나 동쪽 도시의 유력가들도 이 일에 동참한 이유가 바로 당신의 히스파니아 장악력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히스파니아에 왕조가 들어설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더군. 나는 그것을 부채질했을 뿐이고. 보다시피 결과는 이러해.”

“세르토리우스 님!”

“레가투스!”

“레가투스를 구해야 한다!”

챙 채챙

“으아아악”

“크허허허헉!”

세르토리우스의 호위병력이 연회장으로 달려들었으나 이미 작정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페르페르나의 군대를 넘어설 수 없었다. 수도 적은데다가 마음까지 다급하니 도리어 빠르게 진압당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온몸이 빠르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페르페르나에게 말했다.

“코브라인가?”

“호오. 바로 알아차리는군. 메텔루스 피우스가 전해주더군. 세르토리우스를 처리해주면 폼페이우스를 내 손에 넘겨주겠다고 했지. 적당한 시점에 로마의 원로원과 타협하면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갈 수 있어.”

페르페르나가 가만히 있어도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의 손에 패배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페르페르나는 야망이 컸다. 능력은 없는데 야심만 커다란 전형적인 군상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세르토리우스 휘하의 장수로 어떤 이름도 날리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페르페르나는 그게 싫었다.

메텔루스 피우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페르페르나의 야심을 말이다. 이에 메텔루스 피우스는 페르페르나를 이용해 히스파니아 도시의 유력가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결과 세르토리우스가 독살될 위기에 처했다.

세르토리우스는 허망한 눈으로 연회장의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는 천장인지 바닥인지도 모를 정도로 뿌옇게 흐려져 있을 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두 사람의 빈 자리가 커보이더니 이것을 경고하던 자신의 본능이었단 말인가?

“크크큭. 그나마 내 아들, 테세우스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만이 자신의 앞에 펼쳐질 뿐이었다. 혀마저 굳어져서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 말은 뱉어야만 했다.

“내 아들이 오고 있다. 내 아들 테세우스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구나······.”

세르토리우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긴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1만의 게툴리족을 이끌고 가데스에 도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테세우스에게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전해줘야 했다. 그 사실이 미안하고 또 안타까웠다. 세르토리우스는 그 답답함에 뭐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세 배 이상이나 되는 군대를 상대로, 그것도 로마에서 명성이 자자한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명장 세르토리우스라는 거인이 어처구니없게도 협잡꾼의 간교한 술책에 의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실로 허망하고 허탈한 순간이었다.

숨이 멎은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던 페르페르나는 차디차게 굳은 세르토리우스를 조소했다.

“테세우스? 흥! 이집트로 갔다는 그 양자 놈이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페르페르나와 이 일에 동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었으나 만리우스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세르토리우스 휘하에 있던 그가 테세우스의 위용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테.. 테세우스가 돌아왔다고?”

하루만 더 빨리 소식을 들었다면 자신의 배신을 심각하게 재고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자신은 이미 배신했고 세르토리우스는 독살을 당해 차디찬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만리우스는 급히 페르페르나와 이 일에 동조한 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테.. 테세우스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흥! 놈이 아무리 대단했다고는 하나 제 아비 세르토리우스가 무너진 이상, 혼자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그만하시지요. 지금은 테세우스라는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에 신경쓸 때가 아니라 세르토리우스 휘하에 있던 병력을 추스르고 히스파니아 장악을 서둘러야 할 시점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 이득을 로마가 취하게 될 겁니다.”

닭 쫒던 개 지붕이나 쳐다보는 꼴을 면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할 시기였다. 아우피디우스의 말에 페르페르나가 만리우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들었는가? 이런 상황이니 서두르게나.”

만리우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자신에게 남긴 어리석은 놈이라는 단어가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테세우스든 뭐든 모조리 격파하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은 만리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테세우스는 사비누스를 만나 그간 일어난 전쟁의 경과를 전해듣고 있었다.

“흠. 그럼 지체할 것 없이 피레네 산맥으로 도망친 토벌군을 몰아치면 되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보급도 아군이 유리하고 기동력도 아군이 월등합니다. 이에 저들의 군단을 유린하며 그나마 있던 저들의 보급품을 약탈한다면 저들은 군을 유지할 여력이 조금도 남지 않습니다. 그 뒤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약탈이라면 게툴리족도 어디 빠지지 않는 족속이다. 너무나 능숙하게 유격전을 펼치며 저들의 근간을 뿌리뽑을 것이다. 무리할 필요도 없다. 그 상황을 겨울이 올때까지만 끌고가면 로마의 토벌군은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필승의 전략이다.

“하아. 그토록 긴장했던 전쟁이 미처 올해가 지나기도 전에 끝이 나겠군요.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곳 가데스로 군을 이끌고 달려오고 계실 지도 모르겠군요. 알고 계십니까?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테세우스 님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세르토리우스의 모습을 떠올린 테세우스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기쁜 소식을 서둘러 아버지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비누스 역시 미소를 지으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때 전령이 급히 들어섰다.

“그.. 급보입니다.”

“급보?”

사비누스가 의아한 눈으로 반문했다. 급보가 올만한 것이 없었다. 그랬다면 세르토리우스가 연회를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험할만한 상황 자체가 없는데 급보라니?

“세..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크흑.”

테세우스는 불길한 마음에 급히 전령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왜!”

“큭.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독살당하셨습니다. 간악한 페르페르나와 그 일당에게.”

“뭐?”

테세우스와 사비누스는 그 소식을 믿을 수 없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뒤 사비누스가 발작적으로 전령을 닦달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독살을 당해? 네놈이 감히 이딴 헛소리를 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는 것이냐?”

“크흑.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심지어 연회에 함께했던 세르토리우스 휘하의 부하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군은 뿔뿔히 흩어졌고 일부는 저들에게 가담한 것으로.”

“뭐.. 뭐라?”

테세우스는 말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세르토리우스가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가 이끌고 온 대군을 맞아서도 승승장구하던 세르토리우스가 협잡꾼의 독살따위로 죽었다고? 그걸 자신보고 믿으란 말인가?

으드득

콰아아아앙

테세우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두터운 책상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전령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전령 역시 그 소식에 크게 슬퍼하고 있었다. 거짓처럼 여겨지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말이다.

테세우스는 분을 가라앉히며 전령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누구라고?”

테세우스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전령이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아버지를 독살한 새끼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대.. 대표적인 인물들은 마..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만리우스, 아우피디우스, 그라키누스, 알카이오스로 보입니다.”

“근거지!”

“바.. 발렌티아와 그 주변 도시들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가담하라고 벌써부터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히스파니아와 세르토리우스를 위해 이집트와 게툴리안을 다녀왔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죽은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전쟁 중 패배로 인한 죽음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아군의 배신으로 인한 독살이라고 한다. 세르토리우스는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사내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식의 죽음은 확실히 아니었다.

저들은 아버지, 세르토리우스가 지닌 위세와 권한을 시기하고 질투한 것이리라. 배신을 해서라도 취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조금 전 사비누스에게 들었다. 이 일을 주도한 페르페르나는 히스파니아로 피신을 왔는데 수하들이 반대함에도 아버지가 받아준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짓거리를 하다니 테세우스는 차갑게 분노했다.

“사비누스!”

사비누스 역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하명하십시오.”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그 말에 사비누스는 기다렸다는 듯 씹어먹듯이 대답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다시 전령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시신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들이 훼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테세우스는 전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스파니아의 모든 도시에게 알려라. 세르토리우스의 이름 아래 엎드리지 않는 도시는 주춧돌까지 부숴버릴 것이고 그 본보기로 발렌티아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말이다.”

이는 히스파니아 전체에 선전포고를 하는 행위나 다름없었기에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전령은 감히 테세우스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다시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출정일은 내일 새벽!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조리 쓸어버린다. 아울러 이 일의 배후라 할 수 있는 피레네 산맥의 로마 토벌군 놈들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릴 것이다.”

사비누스 역시 세르토리우스의 죽음에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혈광이 번뜩이는 테세우스의 눈빛에 테세우스의 적이 된 자들이 불쌍하게까지 여겨졌다. 되도록 유하게 상황을 풀어내는 테세우스였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비누스 역시 바라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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