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 광기.
152. 광기.
세르토리우스는 휘하 제장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메텔루스 피우스의 선봉장이었던 칼비누스를 패퇴시킨 루키우스 히르톨레이우스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알카이오스 등을 비롯해 세르토리우스의 휘하에서 싸웠던 많은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단 사비누스는 이 자리에 없었는데 이는 그가 경계하고 있는 가데스가 현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세르토리우스군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가데스였기에 사비누스는 가데스에 머물고 그곳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사비누스는 성정 자체가 경박하지 않고 신중했으며 무엇보다 세르토리우스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였다. 그가 있었기에 세르토리우스가 뒤를 안심하고 전방에서 전투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군의 총괄적인 보급은 바로 이 사비누스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히스파니아 최남단이자 켈타이 부족과도 근접해있는 가데스가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속주 바에티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했고 충성을 맹세한 켈타이족, 루시타니아와 오피다니 연맹의 도움을 수월히 받을 수 있는 지역에 가데스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바다와 접경하고 있는 도시였기에 자유무역지대로 인한 호혜(互惠)를 전시 중에도 누릴 수 있었다.
더욱이 히스파니아 최남단이라는 점은 동쪽 해안 도시들에 비해 로마 해군의 공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었다.
남쪽 해역(알보란해) 자체가 동쪽 해역(지중해)보다 폭이 월등히 좁았고 마우레타니아 등지와 자유무역협약을 맺었기에 타국의 상선들도 수시로 오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상황상 이곳을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러운 곳이었고 로마 역시 가데스가 쌓은 부를 온전히 취하길 원했다.
무엇보다 가데스는 카다스 해협 뒤 편에 위치한 도시라 침공하고자 해도 해류가 빠르고 거센 좁은 해협을 통과해야만 가능했기에 육지든 해상이든 세르토리우스군을 무찌르기 전에는 함부로 침공할 수 없는 위치였다.
적은 병력으로도 방비할 수 있는 도시였지만 이곳을 빼앗긴다면 세르토리우스군의 근간이 흔들릴 위험이 있었기에 세르토리우스는 사비누스에게 오천의 병력을 주어 이곳을 방비하게 했다. 사비누스는 세르토리우스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로 인해 세르토리우스군은 지금껏 보급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다.
기쁜 날이다.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히스파니아를 침공했던 모든 토벌군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 방면으로 후퇴했고 이에 그들에게 굴복했던 히스파니아의 도시들이 서둘러 다시 굴종해왔기 때문이다.
기쁜 날이건만 지금껏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충성스런 수하 사비누스는 가데스에 머물러 있었고 믿음직한 자신의 아들, 테세우스는 이집트로 떠난 후 넉 달이 되도록 히스파니아에 복귀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떠받들고 달콤한 말을 두 귀가 가득 차도록 늘어 놓았지만 이들이 칭송하는 것은 승리 그 자체일 뿐이다. 자신이 패하고 무너지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이들에 불과하다.
자신을 칭송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승전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 두 사람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저들은 자신이 패하거나 승리하거나 묵묵히 곁에 남아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세르토리우스는 승전을 축하하기 이르다고 생각했다.
히스파니아에서 저들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저들의 병력은 여전히 아군을 압도한다. 저들이 후퇴한 것은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기반을 잃었기 때문이지 전쟁을 수행할 병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보급과 같은 전쟁 물자등이 충분히 뒷받침된다면 지금의 승리가 무색하게 히스파니아 전역을 삽시간에 빼앗길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승전을 축하하지 않을 수는 없다. 차일피일 지금껏 미뤄왔던 일이고 어쨌든 한번은 공을 치하하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었다. 아닌 말로 앞으로 전쟁이 더 치열해지면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 수도 있었다.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가 한 번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히스파니아의 도시들은 물론 켈타이족들 또한 이 승전을 알고 아군을 두려워할 수 있도록 더 크게 선전할 필요도 있습니다. 가데스의 사비누스도 아군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양의 보급품을 보낸 상황입니다. 그러니!”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의 말에 세르토리우스는 그간 완고하게 거절하던 태도를 거두고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어차피 아군도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고 피레네 산맥으로 후퇴한 저들 또한 당분간 히스파니아로 진격하기 어려울 테니 지금이 적기라면 적기겠군. 준비하게. 단 승전을 축하하는 기간은 삼 일로 제한할 것이야.”
“그.. 알겠습니다.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다시 휘하 장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야.”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웃음을 짓고 있던 지휘관들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이윽고 세르토리우스에게 대답했다.
“심려 마십시오. 결국엔 히스파니아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암. 그래야지. 하지만 말에 어폐가 조금 있군. 히스파니아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로마에게 승리하는 것이야. 알겠나?”
아군이야말로 진정한 로마라는 소리였다. 이에 지휘관들은 질세라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아름다운 여인들이 포도주에 향신료를 넣어 마리네이드 양념으로 재운 토끼 요리를 널따란 쟁반에 담아서 상 위로 옮겼다. 상 위에는 사과, 무화과, 포도, 건포도, 석류, 호두 등의 과일과 견과류도 풍성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미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으슥한 곳에서는 성행위를 하는 소음도 간간히 울려 퍼졌다.
연회가 난잡하게 끝났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로마의 연회에서 성적인 요소가 배제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했다.
연회장의 중앙에는 옷을 걸친 것인지 벗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여성 무희들이 관능적인 춤으로 연회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고 연회장 곳곳에 울려 퍼지는 독특한 멜로디는 아마도 히스파니아 지역의 음악처럼 보였다.
고수나 월계수, 파슬리, 마늘과 같은 각종 향신료를 이용해 재운 구운 돼지고기와 염소, 양 고기가 끊이지 않고 상을 장식했고 연회에 참석한 인원들은 비스듬이 눕거나 앉아서 그것을 뜯어먹었다. 나이프나 포크를 이용하는 식문화는 훨씬 후에 생긴 식문화로 로마인들의 식사도구는 손이었다.
따라서 연회에 나오는 대부분의 음식은 한입에 먹을 수 있게끔 조각조각 나눠진 채로 나왔다. 마치 조각케익을 먹는 것처럼 로마인들은 그 조각난 음식을 손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면 되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하면 손이 금세 더러워지기에 물이나 헝겊 등으로 닦아주는 노예가 연회장을 상시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는 구운 홍학 고기를 씹다가 뱉어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 여자노예가 급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닦아주었다.
반 이상이나 드러난 노예의 가슴을 비스듬히 누운 채로 무심히 바라보던 페르페르나는 돌연 노예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에 풍만한 노예의 왼쪽 유방이 페르페르나의 손에 의해 아무렇게나 일그러졌다.
“아흥!”
그러나 노예는 갑자기 가슴을 유린당했음에도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작은 신음과 함께 페르페르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붉게 달아오른 노예의 얼굴을 바라본 페르페르나는 흥이 식었는지 손짓으로 노예를 무른 뒤 히스파니아의 유력인사들에게 둘러싸인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봤다.
“이야기는?”
옆에서 포도씨를 그릇에 뱉어내던 알카이오스가 냉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히르톨레이우스는?”
“적어도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알카이오스의 발언에 페르페르나는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던 눈을 거두며 이쑤시개와 귀파개가 함께 있는 도구를 이용해 귀를 판 뒤 귀지를 바닥으로 튕겼다.
페르페르나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에 이런 행동이 이곳에서 비교양적인 행동이라 볼 수는 없었다.
“폼페이우스. 네놈이 감히······.”
페르페르나가 그의 이름을 거론하자 알카이오스의 표정이 크게 굳어지며 입을 열었다.
“그 자는 반드시 제 손으로 처리할 겁니다.”
페르페르나는 잔에 담긴 포도주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알아서 하도록. 어쨌든 우선은 이 일부터 끝내야겠지.”
알카이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세르토리우스는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즐겨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는 사치와 향락을 멀리했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왔다. 세르토리우스는 전장에서 거친 음식을 먹고 절제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 여겼다.
갑옷보다 천으로 이뤄진 토가가 더 불편하게 느껴지자 세르토리우스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래서야 전장을 벗어날 수나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치러야 할 전투가 아직도 많이 남았기에 쓸데없는 감정이라 일축한 세르토리우스는 휘하 부하에게 말했다.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절정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숙소로 돌아가겠다.”
“어째서. 더 즐기시지 않고.”
“딱딱하고 작은 침상이라 할지라도 내 침상에서 고요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내게 가장 큰 휴식이다.”
세르토리우스의 발언에 부하는 존경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때 페르페르나와 히스파니아 동쪽 도시의 유력인사들이 한꺼번에 세르토리우스를 찾아왔다. 그 모습에 부하가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자 세르토리우스는 손짓으로 부하를 물린 후 그들에게 다가섰다. 부하는 연회를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명인 줄 알아차리고 그 즉시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어째서 벌써 떠나려 하십니까?”
“익숙한 일이 아니고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다 보니 조금 피곤하구려. 여러분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연회를 벌여도 조용하고 절제된 연회를 벌이는 것을 선호했다. 이같이 선정적이고 화려한 연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연회였다.
오늘의 연회는 페르페르나가 주도한 연회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세부적으로 관여했겠지만 자신의 절제를 타인에게 구태여 강요하거나 연회를 파토내고 싶지 않았던 세르토리우스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줄 요량이었다. 피곤한 것도 있지만 지금의 이유가 더 큰 이유였다. 무엇보다 세르토리우스는 연회 중 받은 전갈의 내용에 마음이 심히 들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만리우스라는 그의 부하가 입을 열었다. 만리우스는 세르토리우스 휘하에서 제법 많은 공을 세운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레가투스께서 연회를 벗어나면 이 연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러자 아우피디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발렌티아의 유력인사 중 한 명이었다.
“장군께서 피곤하시다면 저희가 어찌 만류하겠느냐만은 저희와 술잔 한 번 나누지 않고 연회장을 떠나신다니요. 이는 저희 발렌티아가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굴복한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우피디우스의 말에 세르토리우스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경쓰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자신이 이들을 배척하는 것처럼 소문이 나면 여겨지면 아군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흠. 오해마시오. 그런 의미는 없었소.”
“하하하. 설마하니 세르토리우스 님께서 그럴 의도가 있으셨겠소. 오늘은 장군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페르페르나의 말에 세르토리우스도 동의를 표하며 말했다.
“페르페르나의 말이 맞소. 나는 그런 뜻이 전혀 없으니 으음. 이렇게 하면 되겠군.”
딱 딱
세르토리우스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어 노예를 부른 뒤 술잔에 술을 담아오라 명했다. 이에 노예는 바로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서 가져왔다.
“오늘은 내 벌주로 이것을 마실 테니 양해바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