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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143화 (143/298)

# 143

143. 삼일 후

143.

테세우스는 말없이 베스티아에게 짓쳐들며 검을 휘둘렀다.

글라디우스를 든 베스티아는 급히 몸을 옆으로 굴러 그의 공격을 피했으나 옆구리에 긴 검상을 입고 말았다.

“크흐으윽!”

챙그랑

그 섬뜩한 고통에 검을 놓친 베스티아는 쓰러진 채로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칼을 잡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다. 알아둬라. 너무 억울해하지도 말고. 너희는 오늘 모두 죽는다.”

그 말에 눈이 찢을 듯이 커진 베스티아가 테세우스의 말에 뭐라 말하려고 했으니 테세우스의 손이 더 빨랐다.

우두두둑

베스티아는 방대하고 상세한 계획을 가지고 있음에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계획을 세운다고, 계획이 완벽하다고 세상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이.. 이!”

“베스티아 님께서!”

“죽여라!”

“죽어!”

테세우스는 잠시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다가 자신을 짓쳐드는 병사들을 피해 도망쳤다. 상대할 수 없어서? 그럴 리가? 저들이 소문을 내주길 바랬다. 프톨레마이우스의 수하로 보이는 자가 베스티아를 죽게 만들었다고. 이것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알면 좋은 것이고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다. 그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

피가 튄 토가를 걸친 사내가 신발이 벗겨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디론가였다. 사내는 어디든 이 자리를 피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붕 붕 붕 푸욱

그러나 사내는 얼마 뛰지도 못하고 등에 검이 박혀 죽음을 맞이했다. 등뒤에 검이 박혀 앞으로 고꾸라지던 사내는 어떻게든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내 곧 쓰러져버렸다.

촤악

나디르는 천천히 걸어가 로마인의 등에서 검을 뽑아낸 다음, 병사들에게 말했다.

“재물은 일단 내버려두고 문서부터 확보해. 무슨 문서든 상관없다. 샅샅이 뒤져! 시간이 많지 않다.”

“알겠습니다.”

그들 주변으로 저택의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이집트 병사는 기묘한 형체를 발견하고 졸고 있던 병사를 급히 깨웠다.

“저거. 저거 뭐냐?”

“뭐 말이냐?”

“눈을 뜨고 제대로 봐봐. 어.. 어라? 저건?”

“왜 뭔데 그.. 이.. 이런! 적이! 적이다!”

“적이다!”

성벽 위에서 수천에 이르는 적을 발견한 병사들은 대경하며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성안으로 신호를 보냈다.

땡 땡 땡 땡 땡

모두가 잠든 시각에 요란한 신호음이 울려 퍼지자 성안은 금세 이런 저런 소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은 그러거나 말거나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저들이 도착할 때에 맞춰 성문이 내려갔다. 여러 성문 중 하나였지만 정확하게 도적떼가 진격하는 방향이었기에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우연히 일어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테세우스의 병사들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죽이고 문을 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성문이 열린 이상, 누가 열었는지는 현재 중요하지 않았다.

“서.. 성문이 열렸다. 어서 닫아!”

“어떤 미친 새끼가!!”

“내려가서 막아! 뚫리면 안 된다!”

“서둘러라!”

성벽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이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말을 타고 있던 마적들은 괴성을 지르며 알렉산드리아로 침입했다.

저들은 자신을 막아서는 이집트 병사들을 죽이고 곧장 부유한 저택이 밀집된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으하하하하!! 살아생전 알렉산드리아의 귀한 분들을 약탈하게 될 줄이야!”

“가자! 다 내꺼다! 다 내꺼!”

이집트 병사들의 저지로 이내 성문이 틀어막혔지만 그렇게 통과한 마적의 수가 무려 삼백은 넘어보였다. 저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부유 주택가로 미친 듯이 달려 사라졌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이집트 지휘관들도 그것을 발견했지만 저들을 추격할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당장 성문을 막고 더 많은 도적들이 알렉산드리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합니까?”

“개인 호위병력이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그보다 이 새끼들이 단체로 돌기라도 한 건가?”

어떤 도적놈이 이집트의 왕궁이 있는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약탈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집트 지휘관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

그 소식은 프톨레마이우스에게도 전해졌다.

“뭐? 적들이 알렉산드리아로 진입해? 그것도 도적떼들이?”

프톨레마이우스는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다가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세우스!! 네놈이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프톨레마이우스는 테세우스에게 강한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하지만 지금은 테세우스에게 분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우스는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임호텝을 불렀다.

“임호텝!”

“예. 폐하!”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공화주의자들을 모조리 사로잡고 그들의 비리를 압수해라.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도 좋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프톨레마이우스는 명을 수행하고자 급히 몸을 돌려 나가는 임호텝의 등을 바라보다가 홀로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줄이야. 테세우스. 테세우스!”

*

베스티아를 처단한 테세우스는 나디르와 합류했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로마인들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몇몇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저택 내의 로마인처럼 보이는 사내는 모조리 제거했습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요란한 굉음을 내는 성벽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성벽의 병사들을 처리하러 이동할까요?”

도적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냐고 묻는 나디르에 말에 테세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저들은 저들의 전투 끝에 죽게 내버려 둬라. 그게 저들의 쓸모다.”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테세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이자 나디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로마야 어차피 적이었으니 상관없지만 이대로라면 이집트하고도 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적이라? 프톨레마이우스는 거리낌없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이뤄지진 않겠지만 이 일로 히스파니아에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야.’

테세우스는 그렇게만 대답한 뒤 바트로스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캄바를 바라봤다.

“얻은 재물과 곡식은 모조리 너희에게 맡기겠다. 그간 확보해 두었던 연락망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눠줘라.”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시행하겠습니다.”

바트로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캄바! 빠지려면 빠져라. 탓하지 않겠다.”

상인으로서 이윤이 남지 않는 일이고 이 이상 개입하면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이미 발을 깊이 담궜습니다. 뜻하신 바가 있을 줄 믿고 저 역시 따르겠습니다.”

“나디르! 문서는 확보했나?”

“확보했습니다만 그 양이 꽤 됩니다.”

“수레와 말을 준비해라. 문서를 싣고 왕궁에 가봐야겠다.”

나디르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왕궁에 말입니까?”

갑자기 왕궁에는 왜 간단 말인가? 테세우스가 프톨레마이우스와 만난 적이 있다는 걸 모르는 나디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디르는 이내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프톨레마이우스는 테세우스와 독대하고 있었다.

“뻔뻔하군.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나를 볼 생각을 하다니!”

“폐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폐하와 적이 되고자 이집트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왕국을 도적떼에 짓밟히게 만들어?”

“폐하. 저들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덕분에 진정한 도적을 폐하의 왕국에서 도려내게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시고 계신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아니옵니까?”

“으음.”

“제 방식이 과격한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오나 도적들은 폐하의 용맹스런 수비대 아래 깔끔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공화주의자들과 이집트의 내정에 간섭하던 로마인들 역시 모조리 사라졌지요. 아울러 저들의 비리를 확인시켜 줄 증거물도 폐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 손해를 보셨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한 도적떼가 저와 상관이 있다는 말이 일절 나오지 않게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하! 뭐라? 이런 뻔뻔스러운 작자가 있나?”

“폐하. 제가 도적을 이용하기는 했으나 저들로 약탈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폐하께서도 아시는 사실이 아니옵니까? 더욱이 그 일로 폐하께서는 원하는 대부분을 얻으셨습니다.”

원하는 대부분은 맞다. 하지만 이 일의 대미는 테세우스를 죽이거나 사로잡아서 로마에 바쳐야 완벽해진다. 그러면 이집트 내부의 영향력도 막강해지고 로마의 관계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야료를 부리기도 전에 테세우스가 그 구도를 산산이 박살내버렸다.

프톨레마이우스가 말없이 테세우스를 바라보자 테세우스가 다시 한 마디 말을 뱉었다.

“히스파니아를 적대하는 일은 이제 곧 벌어질 전쟁의 결과를 보시고 하셔도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들의 비리를 공개한다면 로마를 적대하는 행동을 일부러라도 보여줘야 왕의 위신이 살 것인데 그 일을 히스파니아와의 우호를 위해 사용하시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간청드리겠습니다.”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솟는구나. 하나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군. 좋다. 받아들이겠다. 네가 내 뜻을 이뤄졌으니 나도 네 뜻을 이뤄줘야 공평한 거래라고 할 수 있겠지.”

이미 원하는 것을 얻은 프톨레마이우스로서는 굳이 로마를 적대하는 행위를 보여서 로마의 관계를 경색시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약조한 바를 행하지 않는다면 눈앞의 테세우스가 또 어떤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의 일과 마찬가지로 놈의 행보는 종잡을 수가 없다.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약조를 지키지 않는다면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불길한 감을 무시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아닌 말로 그의 말따라 원래대로 봉쇄령을 내려도 그 부분은 로마에서 양보하고 들어와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일반적인 강대국이라면 힘의 논리로 무참하게 밀어붙였겠지만 로마는 그런 식으로 제국을 이뤄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로마의 강점이자 무서운 점이기도 했다. 점령한 모든 나라를 결국 로마화시킴으로 종국엔 로마에 대항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게 만든다.

“히스파니아로 돌아갈 텐가?”

“예. 폐하의 봉쇄령이 떨어지기 전에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봉쇄령이라. 그 부분은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대신 테세우스 너도 약조하라.”

“말씀하십시오.”

“내일 당장 이집트를 떠나라.”

“폐하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만나뵐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적당한 예를 표한 뒤 그대로 물러갔다.

프톨레마이우스는 테세우스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왕좌에 앉아있었다. 원하는 결과 대부분을 얻었다. 그것도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하지만 그건 테세우스라는 폭풍을 만나 얼떨결에 얻은 결과에 불과하다.

바다위를 조심스럽게 항해는 배가 아니라 파도를 흔들고 바람을 흔드는 거대한 풍랑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 행동은 그저 바다 위를 어떻게 잘 항해할까 배를 수선하고 조타를 잘 잡은 것에 불과했다. 거센 풍랑은커녕 작은 바람도 되지 못했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햇살은 프톨레마이우스를 뒤덮었지만 그는 햇살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로서는 역부족인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프톨레마이우스는 그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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