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42화 (142/298)

# 142

142. 삼일 후

142. 삼일 후

프톨레마이우스는 테세우스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그가 테세우스에게 무리하게 충성 맹세를 요청한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일련의 상황을 통해 그를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보다 심층적으로는 테세우스와 히스파니아의 연관성을 확인해보고 테세우스의 실력이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혹 거짓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자인지? 소문대로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프톨레마이우스가 일정부분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테세우스의 이용가치가 충분한지 아닌지를 확인해보고자 테세우스를 흔들어봤다.

상황에 휩쓸리는 자라면? 혹 심기가 약한 자라면? 혹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자라면? 혹 간교한 자라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라 했을 때 그리하겠다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켰고 냉철하게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 가운데 드러난 그의 전투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프톨레마이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좋을대로. 다만 내가 뭘 원하는지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야.”

자신이 키운 메자이들이 숨겨진 조직이라고는 하나 완벽하고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와 연관된 이들에게 함부로 보냈다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어처구니없는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징이 중요했다.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라면 충분하지는 않아도 이집트 내 로마인들과 각을 세우기에 충분한 동기를 지녔다. 아울러 그 아들인 테세우스가 이집트에서 먼저 살해당하려고 했다면? 그보다 자신의 행동을 덮을 대표적인 상징성을 가진 자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우스는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메자이들이 네 일을 도울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고 프톨레마이우스가 호의로 보내준 자들이니 수락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의 이름 아래에서 프톨레마이우스의 일을 할 것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앞서 약조하신 부분만 지켜주십시오.”

프톨레마이우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뜻대로 하라. 초청은 삼일 후가 될 것이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예를 표한 다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왕궁을 벗어났다.

왕궁을 벗어난 테세우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두운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삼일 후라고?’

*

화르르르

“흐아아아암!”

제법 커다란 화로 옆에서 무기를 들고 경계를 서던 병사 중 한 명이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쉬이이익 탁

우드드득

그 순간 지붕 위에서 떨어진 한 사내가 그의 입을 막고 그대로 목을 돌려버렸다. 그 사내의 얼굴에는 복면이 씌워져 있었는데 체구가 상당히 컸다.

그는 바로 테세우스였다. 얼핏 보니 그 복장은 그가 마주했던 메자이들의 것과 매우 유사했다.

‘프톨레마이우스. 네 뜻은 잘 알았다. 하지만 내 이름을 네 마음대로 이용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

선수필승이라. 테세우스는 왕궁에서 벗어나자마자 슬쩍 챙겨두었던 복면을 쓰고 곧바로 한 로마인의 도무스(거대저택)에 침입했다. 저택 주인의 이름은 베스티아였다.

베스티아든 프톨레마이우스든 자신이 이토록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사의 허리춤에서 글라디우스를 탈취한 테세우스는 그것을 들고 목숨을 잃은 병사의 다리를 잡고 바닥으로 질질 끌어 어둠 속으로 숨겨버렸다.

경계가 의외로 삼엄하지 않았다. 하긴 베스티아의 도무스는 알렉산드리아 내에서도 치안 유지가 가장 될 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시로 이집트 병사들이 순시하는 곳이니 저택 경비병도 그만큼 마음을 놓고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다.

테세우스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삼 일 후라?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다. 오늘 밤 확인된 적들은 모조리 죽을 것이다.’

나디르와 병사들 역시 목표로 삼은 로마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테세우스가 과연 단순히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조금더 야심한 시각이 되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도적들이 항구의 배를 탈취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아울러 외부에 있던 도적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도적들은 하나로 뭉칠 줄 모른다. 저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걸출한 자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하나로 뭉칠 이유가 없었다.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약탈물도 많아져야 하는데 그런 짓을 벌였다간 토벌군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테세우스는 저들을 하나로 뭉치고 저들이 혹할만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 목표는 도적들이 감히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알렉산드리아 약탈이었다. 세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규합한 도적의 숫자가 오천에 달했다.

그 가운데는 마적도 있었고 산적도 있었으며 심지어 해적도 테세우스에게 합류했다. 단 일주일만에 그토록 많은 수의 도적을 규합할 수 있게 만든 건, 테세우스의 무시무시한 신위에 대한 소문도 있었지만 저들의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이 가장 주효했다.

3개월간 봉쇄령을 내려? 봉쇄령따위 내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니 내릴지 말지는 프톨레마이우스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당분간 교역 자체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힘들어질 테니까.

테세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자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궤멸시키고 곡식과 식량을 일반 백성에게 뿌릴 생각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들쑤실 필요가 없다. 돈을 지불할 자가 일순간 사라지면 경제가 마비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저들이 착실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자들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민심을 얻기 위해 도적을 토벌한 자가, 혹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약탈을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도적을 토벌한 공으로 자신을 초청하고 함정을 팔 구상을 한 것이리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자신을 직접 대면한 프톨레마이우스조차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반응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왜 저들이 싸우는 방식으로 자신이 싸울 것이라 생각한단 말인가? 강대한 로마제국도 결국엔 야만인들에게 짓밟혀 사라졌다. 야만인들의 문화나 교육이나 제도가 로마보다 뛰어나서? 아니면 부패한 로마인들보다 저들이 고결하기라도 해서 로마를 이겼나?

아니다. 한 가지 작은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패망할 당시, 로마인들은 무력을 잃어버렸고 야만인들은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적을 잘 죽이는지에 숙달된 무력집단을 야만인들은 대거 보유하고 있었는데에 반해 로마인들은 싸우는 법 자체를 잃어버렸다.

로마 제국 멸망 원인에는 물론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지만 이 점을 빼놓고 멸망원인을 논하지는 못하리라.

이집트는 평화에 익숙해졌다. 오천이라는 숫자가 국가 규모에서 보자면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갑자기 오천이나 되는 도적떼들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설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누가 그런 미친 짓을 계획하겠는가? 이집트와 로마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나 다름없는데? 그 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집트 내에 로마인들이 보유한 병력도 꽤 되지만 그들은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기 바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전광석화처럼 몰아쳐서 약탈할 것은 약탈하고 죽일 것은 죽이리라.

하지만 도적들도 저들의 욕심대로 행하지 못하리라. 테세우스는 도적들을 배를 채워주려고 이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니니까. 언젠가 그가 마음먹었듯이 칼날 속에 갈아버리기 위한 안배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내게 오명을 씌우려 한다면 나 스스로 오명을 쓰고 그 열매를 내 손으로 취하겠다.’

테세우스가 세운 계획은 얼추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죽이고 약탈하고 또 죽이는 일 뿐, 프톨레마이우스를 대면하게 된 일은 예상밖의 일이었고 프톨레마이우스 본인조차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해도 달라진 건 없다.

오늘밤 이집트는, 엄밀히 말해 이집트의 집권층은 재앙을 맞이해야 하리라. 그렇게 짓쳐든 도적들이 성벽을 넘든 넘지 못하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외부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도적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알렉산드리아 침탈에 일정부분 성공했겠지만 프톨레마이우스가 은밀히 해온 노력을 확인한 이상, 그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오명을 오명인 채로 두지도 않겠다.’

일단 그건 베스티아를 암살한 후의 일이다. 이집트를 좌지우지 하는 큰손이라 할 수 있는 로마인, 베스티아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중에 악명을 씻지 못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여론 조작에 능한 자들은 일찌감치 그 목을 쳐버려야 앞일이 편하다.

부우웅

테세우스는 글라디우스를 한 손으로 가볍게 돌린다음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향해 은밀하지만 재빠르게 움직였다.

안쪽으로 이동하면 할수록 병사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다만 정면대결을 펼쳐도 모두 죽일 수 있는 테세우스로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단 암살 목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병사들과 드잡이질을 하느라 베스티아가 도망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다음 번에는 그를 죽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아니 베스티아 한 명을 죽이고자 시간을 낼 여유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길게 자란 수풀 속에 몸을 감추고 주변을 주시했다. 그 모습은 먹잇감을 덮치기 위해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맹수와 같았다.

“테세우스. 그 자는 여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젊고 혈기왕성하다고 해도 그런 자가 이번 초청이 함정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베스티아가 자신과 나란히 걷던 두어 명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질물은 던진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음? 어째서? 그가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기껏 마련한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그가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더 좋소. 그가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프톨레마이우스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결과를 낳으니 이집트는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또한 그렇게 되면 도적토벌을 행한 영웅이 아니라 도적을 규합한 도적 우두머리가 되겠지요.”

“으흠. 베스티아님께서는 테세우스가 어찌하실 것이라 보십니까?”

“자신이 얻은 것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소. 사람이란 그렇지 않소이까? 그러니 그는 함정인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자신과 프톨레마이우스와의 문제뿐만 아니라 히스파니아와 이집트와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오.”

“허어. 과연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요. 대단한 통찰력이십니다.”

퍽 촤아아악

“으아아악”

“크허허헉!”

대화 중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베스티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로마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난 지점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복면을 쓴 사내가 로마 병사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글라디우스로 너무나 수월하게 병사들의 목숨을 끊어낸 다음, 순식간에 베스티아 등에게 다가왔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는 바로 테세우스였다.

베스티아는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복색을 보아하니 프톨레마이우스가 은밀히 양성한다는 그 메자이인가 하는 병사 같은데 프톨레마이우스에게 전해라. 로마인을 죽이면 프톨레마이우스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테세우스는 아무 대답없이 크게 두려워하며 도망치려는 로마인들을 거리낌없이 베었다.

“크아악!”

“으아아아악!”

하얀 대리석 바닥이 금세 피로 점철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베스티아는 죽은 병사에게 다가가 급히 무기를 주워들었다. 제법 날렵한 것이 군 경험이 상당한 것으로 보였다.

“네놈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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