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36. 갈림길.
136. 갈림길.
테세우스는 말을 그늘 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은 물주머니를 들어 목을 축였다. 손을 들어 입가를 훔쳐내던 테세우스는 팔에 튄 피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쩌다가? 라는 생각에 테세우스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쓴 웃음을 지울 뿐,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생각의 나열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피곤하지는 않지만······. 더 이동하긴 어려우니 조금은 쉬어야겠군.”
사람을 죽이면 기력이 차오르는 기현상은 여전했기에 테세우스는 오히려 전투를 치르기 전보다 쌩쌩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한 말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투가 벌어지면 말의 유무가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물론 무기가 있든 없든, 말이 있든 없든 도적들에게 당할 테세우스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자신의 체력과 상관없이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테세우스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명상에 가까웠다.
그 명상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항우와 리처드의 전투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아울러 저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항우든 리처드든 일대일로 싸운다면 이제는 감당할 수 있다. 그 둘이 달려든다면······. 아직은 무리려나?’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육체적 능력이 강력해지긴 했지만 일단 힘은 지금도 강해지고 있었고 어쩌면 키도 더 클 것으로 보였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를 죽이면 기력이 저절로 채워지니 항우와 리처드 둘을 상대로도 패배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항우와 그 리처드를 상대로······. 이건 숫제 괴물같은 전투능력이군.’
항우와 리처드가 전장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용을 발휘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저들을 상대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전투능력을 배양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테세우스는 스스로도 황당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발전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또한 방심하지 않겠다.’
태어나기를 강자로 태어난 자들은 약자의 생존방식을 알지 못한다. 자신보다 강력한 적들을 상대로 살아남는 법따위는 모른다. 알더라도 잘 모른다. 본인의 강력한 능력과 힘을 바탕으로 적을 압박하면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처해볼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이걸 기회라 볼 수 있겠느냐만은 기회라면 기회가 맞다.
일례로 항우가 그랬다.
마지막 해하전투의 패배가 도망칠 수 없었고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패배였던가? 아니다. 물론 유방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 처하긴 했겠지만 재기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병력과 기반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항우는 그 패배에 죽음을 택했다. 절망을 절망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법,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이기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항우의 적이었던 유방은 항우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놓였었다. 자신의 아내(여태후)마저 항우의 손에 사로잡히는 치욕을 겪었다. 비단 그뿐이랴?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결국 항우를 패배시키고 천하를 움켜쥐었다.
유방이 항우보다 대단해서?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성 역시 항우와 도긴개긴에 가까웠다.
그러나 항우보다 능력이나 배경이나 지식마저 미천한 유방은 천하를 평정했다. 치욕스러운 패배로 비참한 지경에 처했을 때에도 적에게 조롱당할 때에도 어쨌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우와의 차이점은 한 가지, 유방은 패배라는 기회를 통해 역경을 이기는 훈련을 항우보다 더 많이 해봤다.
‘패배를 확정된 패배가 아니라 기회로 삼고자 한다면 인내할 줄 알아야한다. 마침내 승리를 얻을 때까지. 마찬가지로 이 힘이 얼마나 대단하던간에 천하를 바라보면 없는 것과 같다. 지닌 능력을 일부러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에 취하지도 않겠다.’
테세우스가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테세우스는 지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두두두두
말을 탄 자들이 자신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암석 지대로 빠르게 달려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별다른 반응없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말에게 다가가 말에게 물을 먹였다. 매우 태평한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비상식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테세우스에겐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이었다. 도적떼가 얼마나 되든 자신에게 해를 입힐 주제가 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도적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도적들이 찾아오길 기다려 준 것에 불과했다.
잠시 뒤 100여명에 달하는 마적들이 테세우스의 사방을 둘러쌌다. 그 중에는 꽁지빠져라 도망쳤던 시카와 그 부하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저.. 저놈입니다.”
시카가 테세우스를 가리키며 진정이 되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카는 테세우스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토막쳐버리는 모습은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러자 이들, 마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고작 한놈따위에게 수하들을 잃은거냐? 일단 네놈은 이따가 보자. 으드득.”
모헵의 말에 시카는 두려움에 질려 몸을 덜덜 떨면서 모헵에게 대답했다.
“마.. 말씀. 드렸다시피.”
모헵은 사람의 살점을 하나하나 포를 뜨면서 죽이는 것을 취미로 가진 자다. 그의 손에 죽는다면 그 끔찍한 고통에 내일 아침이 밝도록 비명을 지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시카로서는 두려움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다물어라.”
모헵은 그렇게 시카의 말을 일축했다. 원래라면 벌써 포를 떴어야 했다.
하지만 시카가 말한 자가 그러는 사이 도망칠 수도 있고 시카는 제법 담이 센 놈이다. 어지간해선 겁에 질릴 놈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었고. 수하를 잃고 홀로 돌아오면 자신이 어떤 식으로 고문할지 모를 놈이 아니니 일단 그의 말을 확인한 후에 처리해도 될 일이었다.
눈이 있다면 포위당했다는 걸, 아니 눈이 없더라도 포위당했다는 걸 모를 상황이 아니건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에게 물이나 주고 있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던 모헵은 다소 황당한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네놈. 뭐냐?”
테세우스는 말의 목을 손으로 툭툭 두들긴 다음, 모헵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리곤 시카를 바라봤다. 시카는 화들짝 놀라며 테세우스의 눈을 피했다. 테세우스는 다시 모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들의 두목이냐?”
“그렇다만?”
“보다시피 내게는 무기도 갑옷도 없다. 아마포로 된 옷이 전부다.”
모헵은 그 말에 뒤편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 있는 코페시를 슬쩍 바라봤다. 테세우스의 말대로 확실히 그에겐 별다른 무기나 갑옷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모헵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네게 약탈할 것이 없으니 물러가라? 그딴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그 대가는 목숨으로 치러야만 할 거다. 네놈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참으로 듣고 싶군.”
“내 말은 일단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이다.”
모헵은 더욱더 황당하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하하하하. 돼지 멱따는 소리 하고 있네. 뭐 대화?? 하하하.”
테세우스를 비웃던 모헵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을 거두고 그에게 말했다.
“어디 들어보기나 하자. 뭐라고 지껄일 참이냐?”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다.”
“그게 뭐? 아니 아니 잠깐만. 네놈 로마인이었나?”
로마식 이름을 가졌다고 모두 로마인인 것은 아니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기는 하나 로마로부터 시민권 등을 인정받지 못했으니 법적으로 로마인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테세우스의 태도로 오해한 모헵은 골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로마인을 건드리면 별로 좋을 것이 없다. 이집트에 온 로마인은 대부분은 이집트 권력층과 연계된 경우가 많았다. 별 배경도, 재물도 없는 자들이 굳이 로마를 떠나 이집트까지 여행 올 확률은 아무래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모헵은 시카를 노려보다가 다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네놈이 로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네놈이 내 수하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테세우스는 모헵에게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은?”
“모헵. 모헵이다. 사람들은 나를 잔인한 모헵이라고들 부르지. 크크크.”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100여명에 달하는 도적떼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살고 싶은 자는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아라. 그 외에는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알고 모조리 죽일 것이다.”
“뭐?”
모헵이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자 테세우스 역시 모헵에게 말했다.
“참고로 모헵이라고 했나? 너 역시 마찬가지다. 내 말에 따르면 살려준다.”
“뭐라고?”
이내 곧 분노에 휩싸인 모헵은 분을 참지 못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죽여! 팔다리는 자르되 살려서 데려와. 저 새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야 이 울분이 가라앉을 것 같군.”
테세우스의 말에 분노한 것은 모헵 뿐만 아니라 그 말을 같이 듣고 있던 도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가 정신이 나갔구만.”
“어디서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나타나서!”
저들은 시카와 살아남은 그의 부하들이 말한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테세우스는 한 명이고 자신은 100여명에 달한다는 수적 우위를 믿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숫자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테세우스라는 재앙이 일으킬 피의 폭풍 속에서 말이다.
단, 테세우스의 말에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주저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시카와 살아남은 몇 명의 수하들이었다. 따라서 모헵의 명령에 모두가 테세우스를 향해 짓쳐 들었지만 저들은 그런 모양새만 취할 뿐, 실제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런 모양새라도 취한 것은 가만히 있으면 모헵이나 그의 수하들이 자신들을 해할까 두려워 그런 제스처를 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두두두두
마적들이 말을 타고 자신에게 달려들었건만 테세우스는 천천히 뒤에 너부러져 있는 코페시를 주웠을 뿐, 말위에 오르지도 않았다.
역동적인 말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돌연 저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제일 앞에서 질주하는 마적의 검을 피해내고 그 자의 허벅지를 코페시로 찍었다.
콰직
그러자 정확하게 그의 허벅지 아래쪽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말의 몸에는 어떤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허벅지가 말등이나 배 부분에 밀착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것을 눈여겨볼 사람도, 눈치챌 자도 없었지만 말이다.
“크아아아”
다리를 잃은 마적은 고통에 울부짖다가 그대로 낙마하여 땅에 떨어졌다. 균형을 완전히 잃었기에 머리부터 앞으로 떨어졌고 마적은 단번에 목이 꺾여서 절명했다.
달리다가 주인을 잃은 말은 다소 당황한 것인지 멈춰 서서 주변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다리를 잃고 죽음을 맞이한 마적은 테세우스를 지나친 지 오래였다. 그 마적의 상황이야 어떠하든 간에 테세우스는 이미 다른 마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자신을 칠 것처럼 머리를 들이미는 두 마리 말의 머리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터어억 터억
테세우스는 부딪치는 순간 양손에 힘을 주고 두 다리에 힘을 가했다.
차아아아악
말의 속도가 최대 속도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그것을 마주하고 버틸 수준은 아니었다.
히이이잉
말이 그 충격에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말 위에 타고 있던 마적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이 충격을 받았다면 그 앞에 있던 사람은 더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세우스는 뒤로 주우욱 밀려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세우스는 두 마리의 말을 멈춰 세우는데 성공했다. 최대속력이 아니더라도 2마력에 달하는 추진력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추진력은 결코 아니었다.
이에 주변의 마적들은 매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두 마리의 말을 도리어 멈춰 세우다니? 누구라도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저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테세우스는 양손으로 두 말의 머리를 짚고 크게 원을 그리며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두 마리 말 위에 있는 마적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타격지점도 제대로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 테세우스의 두 발은 정확하게 마적의 목을 가격했고 그 강력한 각력에 얻어맞은 마적은 목뼈가 부러져 즉사를 면치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멈춰 선 두 마리 말 위에서 발을 하나씩 걸친 채로 올라선 테세우스는 발바닥을 이용해 두 말의 엉덩이를 슬쩍 찼다. 그러자 멈춰 섰던 말이 일제히 다시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는 말이 달리는 방향 반대편, 즉 뒤를 바라보고 움직이던 테세우스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적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무기를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