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비극.
133. 비극.
레피두스는 희색이 완연한 얼굴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계속 압박하라! 무리할 필요 없다. 이대로 가면 아군의 승리다!”
그때 한 전령이 급히 레피두스에게 다가왔다.
“아.. 아군의 후방이..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 베트루나, 푸플루나, 펠라트리를 함락시킨 로마군이 이.. 이곳 벨즈나로 지.. 진격 중입니다.”
레피두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전령에게 외쳤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아니 누가 그들을 이끌었단 말이냐? 대체 누가?”
“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입니다.”
“뭐라? 그게 무슨 헛소리냐? 카툴루스라니?”
카툴루스 그 자가 병력을 이끌고 에트루리아 후방의 도시들을 유린하고 있다고? 그리고 함락당한 도시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데 그 소식을 지금에서야 듣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레피두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전령이 도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령이 도착했다.
“베.. 벨즈나가 공략당하고 있습니다.”
벨즈나 공략건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전령의 보고에 몸을 돌려 벨즈나 쪽을 바라보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배를 타고?”
폼페이우스의 병력이 생각보다 왜 이렇게 적은지 의아했는데 설마하니 병력을 둘로 나눴단 말말인가? 그보다 카툴루스라니! 군경력도 미미하고 군재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 카툴루스에게 후방의 도시들이 함락당했단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카툴루스든 혹 누구든 그건 아무래도 좋다. 레피두스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마음을 추스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다. 가용한 병력 대부분을 끌어모았지만 세 도시를 함락시키고 이곳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설마?”
레피두스는 폼페이우스의 노련함에 혀를 내둘렀다. 아우실리아(Auxilia, 보조군), 그러니까 기마병을 속주 등지의 보조군으로 구성해서 배를 태워 이동시켰다면?
베트루나, 푸플루나는 에트루리아 후방에 위치한 도시지만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다. 당연히 폼페이우스에게 경각심을 세우고 있었던지라 해안을 통한 기습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기마병으로 도시를 함락하고 아군의 보급선을 빠르게 끊으며 벨즈나까지 이동했다면?
레피두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보고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거나 이일이 어찌 된 일인지 가늠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벨즈나 쪽에서 검은 연기를 바라본 에트루리아 병사들이 벌써부터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 역시 얕잡아볼 인물이 아니었다. 무슨 술책을 더 얼마나 가지고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군이 폼페이우스보다 우세하다.
그러니 오늘의 전투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아니 단순히 이기는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적들을 궤멸시켜야 한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대승이 아니라면 아군은 패배하고 만다. 무리하지 않고 적을 압박하는 전술을 고수하다가는 고사하는 건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레피두스 자신이 되고 말 것이다.
“전군! 돌격하라! 놈들을 반드시 진멸시켜야 한다! 진격하라!”
레피두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
검은 연기를 확인한 순간, 그라티아누스는 폼페이우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공적이로군. 시기를 정확히 맞췄어.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군.”
그리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그라티아누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티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미 약속된 명령을 지휘관들에게 빠르게 하달했다.
“전열을 흩트리지 말고 구릉아래까지 천천히 후퇴해!”
“전열을 흩지 말고 천천히 후퇴한다.”
“알겠습니다.”
*
알카이오스가 보낸 전령이 급히 헤르미니우스를 찾았다.
“후방이! 벨즈나가 불타고 있습니다. 후방 도시에서 달려온 전령이 레가투스 레피두스께 베트루나, 푸플루나, 펠라트리가 함락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나도 확인 중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벨즈나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헤르미니우스도 확인했기 때문에 그는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송구하오나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알카이오스는?”
“후방의 벨즈나를 확인하러 이동하겠으니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알카아오스는 믿을만한 친구이지만 그보다도 믿음직한 장수이다. 지닌바 무력으로만 따지면 헤르미니우스 자신보다 나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이상 어차피 벨즈나를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미 에트루리아인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허한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이윽고 전령이 사라지자 헤르미니우스는 천천히 물러서는 폼페이우스군을 바라봤다.
“폼페이우스. 어디 이대로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더 몰아붙여라!”
*
로마, 이집트, 그리스 등을 비롯한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시대에 산적, 도적, 해적은 어떤 특정 인물을 가리지 않았다.
상인들이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해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일반 농부가 핍박을 피해 산적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말 그대로 법을 어긴 자가 법을 피해 도적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문제는 그런 도적들을 구태여 토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자의 횡포로 도적이 된 자들조차 희생양으로 삼는 이들은 대개 보복할 힘이 없는 일반 서민들이었으니 권력자들은 굳이 도적들을 토벌할 이유가 없었다.
법 제도가 비교적 잘 정비된 로마조차도 도적들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일부러 군대를 보내 토벌하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혼란한 이집트의 상황인들 어떠하겠는가?
프톨레마이우스의 실제 모습이 그렇든 아니든 연일 방탕하게 행동하고 있고 실제 권력을 지닌 자들은 자신들의 이득과 자리보전에만 정신이 팔려 서민들의 삶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조금 깨어있다는 학자들조차 로마의 공화정을 가져오느니 마느니의 문제를 거론할 뿐, 정작 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위협이 되는 사안들은 안중에도 없다.
당장 아모시스나 아흐모세만 보더라도 이집트의 문명이나 문화를 거론했지 저들이 서민들의 삶을 거론하기나 했던가? 일반 서민들은 그저 쓰고 버리는 말에 불과한 것이다.
저들이 거론하는 대의나 목표는 결국 하나다. 어떻게 해야 내가 약자들을 압제하고 수탈할 수 있는 자리에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가? 통치수단이라는 것도 결국 모두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어떻게 해야 서민들, 곧 약자들의 삶이 나아질까를 고민하는 통치자는 고래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네가 게으르니 약자가 된 것이고 네가 어리석으니 당한 것이라고 조롱만 할 뿐, 자신들의 것은 조금도 내어놓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나만, 나만 잘 살아남으면 되는 거다.
남을 압제하든 수탈하든 약탈하든, 그로 인해 굶어 죽고 칼에 맞아 죽고 병들어 죽더라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들이야 죽든 말든 나는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그런 자가 일개인에 불과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개인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 영향력에 제한이 있으니까. 한데 소위 권력자라는 자가 그런 마음으로 일을 집행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런 자가 권력자에 오른다면? 안타깝지만 그게 현 세상의 주소이자 비극이었다.
‘아모시스 등과의 만남이 헛된 만남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확실히 알았으니까.’
바로 이집트에 진정한 대의라는 것을 내세운 자들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진시황의 강력한 진나라가 진시황 사후 왜 그토록 쉽게 무너졌는가? 후한 말기에 황건적이 왜 그토록 거세게 불타올랐던가? 이유는 한 가지다.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우스 왕조는 민심을 잃었다. 현 이집트의 실제 권력자들 역시 그건 마찬가지. 그럼에도 민중이 저들의 압제를 감내하는 것은 한 가지, 하나뿐인 목숨이라 그렇다. 목숨을 걸고 저들에게 반기를 들어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반기를 들어도 개죽음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저들에게 주어진다면? 그때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입을 옷이 없어 헐벗고 잘 곳이 없어 길거리를 전전하는 자들에게 쾌락주의니 금욕주의니 공화정이니 왕정이니 하는 소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을 보전해줄 수 있는 방법이다.
‘민심으로 무엇을 할지는 차후에 더 생각해볼 일이나 일단 민심을 사로잡는다.’
하나 민심이라는 것은 무형적인 힘에 가깝다. 그것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무형적인 힘을 유형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나 상징이 필요하다. 그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대개 무력조직으로 대변될 때가 많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가장 파괴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리라.
“마레오티스 호수에 해적들이 출몰하기는 하나 마레오티스는 해상운송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이라 해군들의 경계가 삼엄합니다. 대개 이곳에서 출몰하는 해적은 본디 해적이 아니었던 자들이 해적인척 가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레오티스 호수는 알렉산드리아와 맞닿아있는 호수로 이집트 내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일강과 이어진 이곳은 지중해와 분리되어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마레오티스, 알렉산드리아, 지중해 순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되었다.
지중해가 세계의 해상 운송로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면 이곳 마레오티스 호수는 이집트 내부의 해상 운송의 꽃이라 불릴 수 있는 지역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당장 왕국의 이득과 직결된 곳이니만큼 이집트로서도 이곳에 대한 관리를 엄정하게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트로스가 언급한 내용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랴! 이랴!”
바트로스는 말을 달리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도적들은 대개 알렉산드리아 외곽지역에 숨어있는데 파라이토니온 지역과 알렉산드리아를 경계로 한 지역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파라이토니온(Paraitonnion)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는 이곳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는데 당시에는 아무니아(Amun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프톨레마이우스 왕조가 세워진 후 파라이토니온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19대 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BC1279-1213) 사원의 폐허가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으로 여겨졌고 그의 후임자들 또한 그를 위대한 조상이라 일컬었다.
테세우스는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바트로스에게 반문했다.
“그들의 주거지는?”
“송구하지만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작자들이니 어떤 날은 민가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산야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폐허가 된 고대 유적지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도적들을 만나본 적이 있나?”
도적을 만나본 적이 있냐고? 왜 없겠는가? 바트로스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은 도적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물론입니다. 몇 푼 쥐어 주면 물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가진 것을 모두 빼앗으려고 할 땐 농부들과 힘을 합쳐 도적들에게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병사들이 자신들의 곡물을 지켜주지 않는다. 도적에게 빼앗기면 내년에 파종할 종자씨까지 탈탈 털어 가버릴 자들이 이집트의 병사라는 작자들이다.
이들도 도적이다. 보다 큰 도적 말이다. 그래도 여자와 아이의 생명을 그나마 함부로 취하지는 않으니 그 안에 거할 뿐이었다. 그것조차 바트로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바트로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저도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트로스가 말했다.
“도적들을 찾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트로스, 당신이 짐작한 이유는?”
도적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합류나 토벌, 하지만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도적패에 합류하기엔 행동거지 등이 모두 고귀한 신분의 사람처럼 보이고 도적을 토벌하기엔 테세우스와 자신 둘뿐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은 전력 외라고 할 수 있었다.
농부들과 힘을 합쳐 도적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덮친 도적들이 마적과 같이 살육이 능수능란한 자들이 아니라 농부에서 도적으로 변한 고만고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바트로스는 테세우스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그걸 모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달리던 말을 멈춰 세우며 입을 열었다. 바트로스는 그가 왜 갑자기 말을 세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따라 말을 멈춰 세웠다.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겠군.”
“예?”
바트로스는 테세우스의 말에 반문하다가 테세우스가 왜 말을 멈춰 세웠는지 알아차렸다. 저 멀리서 모래 먼지를 일으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