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 재와 먼지.
130. 재와 먼지.
테세우스가 밖으로 나가자 아흐모세의 집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그를 주시했다.
“혹.. 테세우스 본인이십니까?”
그들 중 한 중년 사내의 물음에 테세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일로 저를 보고자 한 겁니까?”
“흐흐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털썩
그러자 중년 사내가 테세우스의 팔을 잡으며 주르륵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테세우스에게 다가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잠시 정색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나를 죽이려던 자를 죽였을 뿐입니다. 당신들의 감사인사를 받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니 더는 다가오지 마십시오. 마찬가지로 이만들 돌아가십시오.”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리라. 호쌈과 그 패거리에게 딸과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혹 누군가가 살해당하거나 끔찍한 짓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원한이 깊으니 단순히 그들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일 테지.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 비극을 되돌릴 수는 없다.
테세우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잡은 사내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호쌈은 죽었고 그 패거리도 사라졌습니다. 이뤄져야 할 일이 이뤄졌을 뿐이니 구태여 내게 감사할 것도 없고 가능하다면 지나간 일은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처음 자신에게 말을 꺼낸 중년사내가 눈물을 닦고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놈은 죽어도 싼 놈이었습니다. 그놈은!!”
테세우스는 다소 안쓰러운 눈으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를 바라봤다.
“우리의 힘이라고 해봐야 너무나 보잘 것 없겠지만······. 호쌈과 그 패거리에게 당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크윽. 테세우스, 당신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무엇이든 우리는 따를 겁니다. 그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복수나 원한에 사로잡혀 새하얗게 자신을 태우고나면 남는 것은 재뿐이다. 그 재마저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처해보지도 않은 자가 주제넘게 함부로 지껄일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자는 진정으로 저들을 위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하는 자들은 단순히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테세우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며 주변을 살펴보던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도움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하나 삶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할 말은 그것뿐이오. 나를 더 번거롭게 한다면 내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소.”
그런뒤 테세우스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아흐모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나온 아흐모세는 그런 그에게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두고 테세우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테세우스가 들어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이며 하나 둘씩 흩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말을 꺼낸 중년 사내 바트로스는 굳은 표정으로 그 문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곡물을 팔고자 집을 비운 사이 호쌈에게, 놈에게 가족 전부가 몰살당했다. 복수를 하고 싶지만 무작정 달려든다면 개죽음만 당할 뿐이고 결국 가족의 복수를 행할 자가 사라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놈들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껏 농부로 살았던 바트로스가 무슨 수로 무뢰배 중에서도 잔혹하기로 이름높은 코브라패를 상대하겠으며 무슨 돈이 있어 그들을 상대할만한 자들을 데려오겠는가?
복수를 하고 싶지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피눈물을 삼키며 살던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호쌈이 테세우스라는 자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는 소식을 말이다. 그래서 득달같이 찾아왔다.
“······.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도 돌아가고 싶소. 하지만 내게는 더 이상 돌아갈 삶이 없소. 이룰 수 없는 내 원한을 갚아주었으니 이제 내 목숨은 당신 것이오.”
당장 하루 살기에도 벅찬 자신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라는 마음이 불쑥 치솟아올랐지만 뭐라도 뭐라도 해야겠다. 그런 마음이 바트로스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
집안으로 들어간 테세우스가 아흐모세에게 말했다.
“캄바에게 호쌈에게 당한 자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적절하게 보상하라고 사람을 보내 이르시오.”
아흐모세가 단순히 대도서관에 일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 휘하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아흐모세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테세우스, 당신이 얻게될 이득을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포기하겠다는 뜻입니까?”
테세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알 바 아니오. 재물을 얻고자 이집트에 온 것도 아니고.”
재물이라면 히스파니아에도 넘쳐난다. 금광과 은광의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차지한 지역의 재화는 일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일찌감치 벗어났다. 테세우스는 그런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다.
물론 현재 테세우스가 보유한 재물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그마저도 대부분은 나디르가 배에 보관 중이다.) 어쨌든 재물에 부족함을 느낄 수준은 이미 벗어났다. 무엇보다 테세우스가 말했듯 이집트행의 목적자체가 재물이 아니었다.
캄바는 유능한 상인이다. 그라면 자신이 얻게 될 총 금액에서 어떤 식으로 보상해야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을지 계산할 능력이 충분할 것이다.
또한 아흐모세의 생각처럼 단순하게 재산을 허공에 뿌리는 것이 아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이집트에서 이익관계를 떠나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대우한다면 저들도 자신을 대우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신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불이익이 아니다. 어차피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흐름을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 현명했다.
무엇보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재물이었거늘, 그것을 모두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손해가 아니라 이득이다. 물론 가련한 저들을 자신의 어떤 계획에 이용할 마음으로 돕는 것은 아니다. 여차저차 그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정말 필요하다면 내어주지 않겠지만 호쌈으로부터 얻는 재물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재물이었다. 그런 것을 내어주고 마음의 불편함을 덜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소모해서라도 여행이나 휴가를 떠나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으음······.”
코브라파는 이곳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집트 권력자들과도 일정부분 손이 맞닿아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니만큼 저들의 지닌 재산은 생각 외로 대단할 것이다. 다시 말해 괜히 캄바가 눈을 빛내며 그 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재물을 거리낌없이 포기한다니······. 아흐모세는 테세우스가 종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육체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세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왕 앞에서 몸을 숙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듯 그의 기세에 압도당하는 것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
“그건 이쯤하고.. 아니 그 전에 호쌈에게 듣기로 이 일을 주도한 자가 도리안이라고 하더군.”
“도리안? 으흠.”
테세우스의 말에 아흐모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던데······. 아니오?”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만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조금 복잡합니다. 무엇보다 코브라파와의 연관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한 이 일로 그를 추궁하기는 어렵습니다. 설혹 연관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손치라도······.”
그 말에 테세우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는 도리안에 대한 내용이 의문이 아니라 아흐모세를 향한 의문이었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은 것이오?”
그도 들었을 것이다. 아흐모세와 헤어진지 얼마지나지 않아 도리안이 오리칼쿰, 오레이칼코스라 외쳤으니 그것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도 아흐모세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대도서관을 떠났다. 물론 이 사실은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어쨌든 테세우스는 그것이 불현듯 궁금해졌다.
“무엇을? 아! 오리칼쿰 말입니까?”
“보다시피 도리안은 그것을 얻고자 나를 습격까지 했소.”
“글쎄요. 그건 도리안의 사정일 뿐이지요. 무엇보다 그게 오리칼쿰이라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만 오리칼쿰이라 할지라도 그저 오리칼쿰일 뿐입니다.”
“으흠. 다른 학자들 역시 오리칼쿰이라는 금속때문이 아니라 오리칼쿰이 지닌 파급력에 대한 위력을 짐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러는 당신은 왜 오리칼쿰을 대도서관에 기증한 것입니까?”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한다라. 어쨌든 내 질문이 먼저인 것 같군.”
“흠. 무엇을 확인하시고자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리칼쿰의 주생산국이었던 아틀란티스는 9000년도 더 된 시점에 사라진 제국입니다. 심지어 존재했었는지도 불명확한 제국이지요. 어쨌든 그 후에 오리칼쿰이 발견될 것이라면 벌써 발견되었어도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그간 그 비슷한 것도 발견되지 않다가 900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 뜬금없이 오리칼쿰이라니요? 바로 이 점이 오리칼쿰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던 제 근거입니다. 물론 저도 학자인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금속류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겠군요.”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넘어가고 내가 왜 찾아온 지는 알고 있소?”
“예. 물론입니다. 아모시스님께 전갈을 받았습니다.”
“말해보시오.”
아흐모세는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가 테세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듣기로 히스파니아에서 고귀한 신분이라 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아흐모세의 태도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피는 방금 전에도 만지고 왔소. 상관없으니 일단 말해보시오.”
아흐모세는 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좋은 사람은 아무래도 죽은 사람이겠지요.”
“염두에 둔 로마인이 있나?”
테세우스의 거침없는 발언에 아흐모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로.. 로마인이라니요? 당연히 아닙니다. 저희는 이집트를 지키고 싶은 것이지 이집트를 전화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로마인 한두 명은 죽을 수 있다. 그 역시 위험한 일이긴 하나 사고사로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로마인이 이집트 내에서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라면? 동일한 목소리를 내는 로마인들이 대부분 살해당한다면? 로마가 그것을 두고볼 리가 없었다. 군대를 파병할 것이고 상황은 매우 험악해질 것이다.
사실 테세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집트와 로마의 사이가 뒤틀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히스파니아는 일종의 반사이익을 얻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집트인인 아흐모세나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흐모세의 대답에 테세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당신들 스스로 해결하면 될 일 아닌가?”
전에도 의문이긴했다. 로마인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면 구태여 자신을 통해 이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같은 이집트인을 살해하는 것이라면 로마가 개입할 명분도 없으니 저들로서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게.. 상황이 애매합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애매하다는 거요?”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아흐모세를 추궁했다.
“하아.. 부끄럽지만 이집트 내에서 저희의 세력은 미미합니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저희쪽이 말살당할 수 있습니다.”
테세우스는 아흐모세의 말의 뜻을 이해했다.
“역공이 당할까 두려워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로군. 보아하니 병권이나 그 모든 것이 열세인 모양이야.”
“그.. 그렇습니다.”
“쯔.”
그 대답에 테세우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프톨레마이우스를 지킨다는 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왕에게도 인정을 못 받고있는 상황이라니? 황당하군.”
“그.. 그걸 어떻게?”
아흐모세는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