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29화 (129/298)

# 129

129. 버리다.

129.

테세우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끔찍한 고통에 휩싸인 호쌈은 뭐라 그러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우두두둑

“크허허헉”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 다리가 으스러졌다.

“말해라. 어떤 놈이냐?”

그의 수하들은 호쌈이 제압당한 순간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테세우스의 위용이 너무나 대단했기에 동료로 여겨지는 캄바를 인질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드시 끔찍한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리라.

호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당장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에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도.. 도리안!! 도리안!! 도리안 그자가 당신에게 처... 천금보다 귀한. 귀한 보물이 있을 거라고.”

“도리안? 흠.”

테세우스는 도서관에서 만난 탐욕스러운 눈빛의 학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죽이려고 들었으니 죽이면 될 일이지만, 또 학자 한 명을 죽이는 것이 테세우스에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냐만은 함부로 행할 일은 아니었다. 무뢰배를 죽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일이다. 학자를, 그것도 대도서관 소속 학자를 함부로 죽인다면 이집트 공권력과 맞서게 되는 결과를 빚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일은 아흐모세와 상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보니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방법이 없어도 만들어낼 테지.’

우두둑

결정을 내린 테세우스는 더 볼 것 없다는 듯 호쌈의 목을 분질렀다.

고통에 울부짖던 호쌈은 그르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금껏 자신이 이끌어온 잔혹한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의 피로 마무리했다. 그의 원수된 자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테세우스에게 아낌없이 갈채를 날리며 호쌈의 죽음을 조롱했을 것이다.

캄바는 멍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테.. 테세우스님이 뛰어난 전사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소..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것이었군요.”

챙그랑

하나 테세우스는 별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짧은 검을 바닥에 집어던진 다음 캄바에게 말했다.

“일이 더 이상 번거로워지는 건 피하고 싶은데.”

사람이 죽었으니 조사가 이뤄질 것이다. 당연히 이 일의 주범인 테세우스가 주목을 받게 될 터, 그것을 피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들 코브라파는 적이 많았으니 원한 맺은 자들이 저들의 시신을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입니다. 다만 저들의 재산이 문제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의 두목을 처리하고 코브라파를 와해시킨 장본인은 바로 테세우스다. 따라서 코브라파의 모든 소유는 테세우스의 전리품이니 그에게 권리가 있었다.

“대신 처리해줄 자들이 있다면.”

그러자 캄바가 눈을 빛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더 이상 제가 안내할 필요도 없으니.”

보아하니 이곳엔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공권력을 돈으로 매수했거나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찬가지로 코브라파의 재물을 얻든 얻지 못하든 그런 건 별 의미도 없었다.

캄바가 눈을 빛내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저들의 이권이 컸던 모양이지만 그가 이득을 본다면 캄바가 보상을 하지 않을 사람도 아니고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별 의미도 없는 번외 수입에 불과했다.

캄바는 그 말을 하며 전투가 끝나자 구경나온 무리중 한 사람을 바라봤는데 그는 테세우스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아흐모세였다.

아흐모세를 확인한 테세우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캄바는 공손히 그에게 인사를 한 뒤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태도였다. 어쨌든 다수의 사람들이 죽었으니 그것을 무마하든 그것으로 다른 이득을 챙기든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자세한 건 됐고. 일단 옷부터 좀 빌립시다.”

피로 흠뻑 젖은 테세우스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흐모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흠. 옷도 옷이지만 그전에 목욕부터 하셔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

햇빛을 받아 더욱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기둥이 그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청동 금박을 씌운 지붕은 마치 금을 지붕 위에 쏟아부은 것 같은 화려함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 모습에 어울리지 않은 여러 곳에서 어럽지 않게 거뭇거뭇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차분한 시선으로 그 얼룩덜룩한 흔적을 매만졌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러니까 자신이 플라멘 디알레스(유피테르 고위신관)에 오른지 대략 1년쯤 되는 시점에 유피테르 신전이 화마에 휩싸였다. 그때 전설적인 무녀 쿠마에(Cumae)가 기록했다는 시빌라인(Sibylline)의 서도 같이 불타버렸다. 그 파편이 남아있기는 하나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신물로까지 신성시되던 예언서이자 신탁집인 시빌라인의 서가 불타버렸다는 건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당시(BC83) 로마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BC87년경 술라가 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자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도망쳤던 마리우스가 킨나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그 숙청대상이 술라파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BC86년 그렇게 마리우스는 무려 일곱 번째 집정관에 오르나 집정관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1월 13일쯤 사망한다.

BC84년 소아시아 서부에서 미트라다테스군 격파하고 아시아 속주를 재조정하는데 성공한 술라는 BC83년 군을 이끌고 두 번째 로마 진격을 감행한다. 그 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BC82년 독재관까지 오른 술라는 마리우스라는 이름 자체를 로마에서 말소시켜버린다.

바로 그런 혼란한 가운데 유피테르 신전과 시빌라인 서가 불탔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유피테르 신전 안에서 타오르는 제화(祭火)에 사프란 꽃을 던져넣는 사제들을 바라봤다. 사프란 꽃은 무미(無味)하나 그 향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오묘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프란 꽃을 태우는 건 제화에 태우는 것은 정해진 제법의 일환이었다.

신전의 외관은 그럴 듯하게 복원했지만 내부는 불타오른 흔적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외관만 그럴 듯할 뿐이다.

자색 장식 선을 가진 토가, 프라에텍스타를 입은 제사장도 저멀리 눈에 들어왔다. 크림색의 거세된 소들이 황금으로 장식된 제단 앞에 서 있었다. 곧 제물로 바쳐지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일련의 일들은 바로 카이사르가 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카이사르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객이 되어 본인이 하던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기둥에서 손을 떼며 몸을 돌려 카피톨리누스 언덕 아래로 펼쳐진 로마를 바라봤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패소했군.”

그간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개업하고 사람들을 고소했다. 고소한 자들의 면면이 가히 대단했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풀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까지, 모두 술라파였고 크라수스를 제외하면 모두 프로콘술, 전임집정관이었다.

술라가 죽었다지만 아직 대부분의 요직에 술라파가 남아있는데 그들을 고발해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바위에 계란을 쳐도 카이사르가 싸우던 재판보다는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만류했다. 그의 친척, 친구를 비롯한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들을 고발했고 누구나 예상했다시피 패소했다.

카이사르 본인도 예상했던 결과지만 가슴이 쓰라렸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높다고는 하나 해발 50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구릉이다. 하지만 이곳은 로마의 최고신들이 거주하는 장소로 여겨지는 신성시되는 곳이다. 실제로 이곳은 로마의 정치, 사회, 종교, 생활의 중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올라왔다. 로마를 직시하기 위해서. 어떤 확신을 얻고자.

또한 오늘 자신이 이곳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 로마의 정경을 바라보는 것은 다시금 이 로마를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로마의 법을 어겼다. 그러나 그 법을 집행하는 자들마저 저들의 편이다. 누가봐도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하지만 해야했다. 다시금 쫓기듯 로마를 떠나게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야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표정 어디서도 낭패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의 눈빛은 형형했고 그의 표정은 어떤 확고한 믿음에 차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외관만 그럴 듯할 뿐이다. 이 신들의 언덕에서 유피테르 신전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전에는 제사장으로서 토가 프라에텍스타를 걸쳤다. 이제는 아니다. 아니 현재 자신의 신분은 상당히 기묘한 상황이다. 플라멘 디알레스는 로마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제사장 직위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한데 자신이 처했던 특수한 상황때문인지 자신은 신전에서 축출(逐出)되지 않았다.

고로 제사장이지만 제사장이 아닌 상황,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면 당장에라도 토가 프라에텍스타를 걸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프라에텍스타를 걸친다면 자신은 앞으로 영원히 제사장으로 남을 것이다. 급히 외관만 그럴 듯하게 보수된 불타버린 유피테르 신전의 제사장으로서.

무엇보다 유피테르 신전은 당금 로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미 자신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그것이 폭풍과 같은 격랑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지나간 운명, 자신의 것이 아닌 운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의 패배는 바로 그것을 위한 걸음이다. 술라파든 마리우스파든 혹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재판에서 이겼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관없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사실 누구나 패소할 것이라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승소할 수 있다고 여겼다. 패배가 쓰라리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상관없다. 쓸데없는 감정에 휩쓸릴 시간따위는 없다.

이윽고 카이사르는 묵묵하게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테세우스는 목욕을 마치고 이집트식 문양이 수놓인 아마포 옷을 걸쳤다. 그 문양은 너무 화려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정갈한 느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옷을 걸친 테세우스가 밖으로 나가자 아흐모세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테세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그게 당신을 보겠다는 사람이 집 앞에 많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테세우스는 그렇게 반문하다가 일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합니다. 그런 자들을 만날 이유가 없소.”

아흐모세는 테세우스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게.. 그게 말입니다. 은혜를 갚을 수 있게 간청하고 있는지라 매몰차게 내어쫓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은혜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코브라파의 호쌈을 테세우스라는 사람이 죽였다는 소문이 이 일대에 퍼졌습니다. 하여 그 은혜를 갚게 해달라고. 적어도 감사인사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하는지라.”

테세우스는 아흐모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짐작하기로 아흐모세와 상의할 내용은 아마도 누군가를 제거하는 내용일 확률이 높은데 그 일을 주도할 사람이 유명해진다면 그닥 유익한 상황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쌈이라는 자가 악명이 대단하긴 했나 보군요. 그 자의 죽음을 기뻐하는 자가 이리도 많은 걸 보니······.”

아흐모세는 테세우스의 말에 침묵으로 응수했다. 테세우스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흐모세에게 말했다.

“일단 이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후 알겠습니다. 내가 저들을 만나보겠습니다.”

테세우스의 대답에 아흐모세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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