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 버리다.
127. 버리다.
테세우스는 캄바를 슬쩍 바라보자 캄바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도서관으로 돌아오시는 길이었던지라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모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집트 왕성에서 요청한 일에 대해 보고하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번 해의 나일강 범람이 어느 시기에 시작하는지에 대해 보고하고 오는 길이었네.”
“선생님?”
캄바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아모시스를 불렀다. 이에 테세우스 역시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기밀에 가까운 내용이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모시스가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범람시기를 알면 그것을 막을 텐가? 아니면 강이 범람하는 시기를 앞당길 텐가?”
“······.”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댐과 같은 거대한 치수(治水) 시설을 건설하기 전에는 일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혹 댐을 통한다고 해도 그것을 완벽히 통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침묵을 지키는 테세우스에게 아모시스가 말했다.
“그런 걸세. 세상의 흐름이라는 건 이토록 거대하다네. 자네가 걸출한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홀로 그 흐름을 뒤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흠..”
테세우스가 침음을 삼킥자 아모시스가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들지.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니.”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아모시스의 제안에 따라 그에게 마련된 방으로 이동했다. 아까 학자들의 태도도 그렇고 보아하니 이곳 도서관에서 아모시스의 위치가 꽤 높은 것으로 보였다. 도서관을 대표하여 왕궁에 출입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의 방은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았지만 도서관 자체에 장식된 문양이나 색상 자체가 워낙 화려했기에 그것만으로도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대단한 분을 선생님으로 두셨군요.”
“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스무 명에 달하는 사서 중 한 사람일 뿐일세.”
이집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긴 하지만 조사를 아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그 말에 이집트 왕국을 세분하면 대략 그 정도 숫자의 지역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했다.
“각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겁니까?”
“으음? 우리가 고위관리도 아닌 마당에 무슨 관할까지야.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수준이지. 그나저나.. 과연!”
고개를 주억이던 아모시스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히스파니아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하지만 한가롭게 이집트 관광이나 할 상황이 아니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네. 특히 로마가 들끓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말이야. 아마 자네의 목적은 로마와 이집트와의 연계를 약하게 하려는 것일 테지?”
“음.”
테세우스가 침음을 삼키자 아모시스가 말했다.
“자네의 신분을 알고 있다면 또한 히스파니아와 로마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그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야 뭐 어렵겠는가? 나뿐만 아니라 캄바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야.”
테세우스는 아모시스의 말에서 왠지모르게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씀은 그 일을 도와주신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 전에 그 연유부터 묻고 싶습니다.”
“그 연유를 설명하자면 이집트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네. 들어보게나. 현 왕조를 이끌고 있는 프톨레마이우스 이전의 왕께서는 그의 이복자매였던 베레네스와 결혼하여 왕위를 이어받았었지. 하나 결혼 후 19일 만에 왕비를 살해했고 그로 인해 왕위는 지금의 왕께 돌아왔네.”
프톨레마이우스 11세와 베레네스 3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베레네스 3세는 민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프톨레마이우스 11세의 행동은 매우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프톨레마이우스 11세는 근 19일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결국 살해당한다.
저들에게는 당연히 후손이 없었고 이에 프톨레마이우스 1세의 혈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남자 후손은 프톨레마이우스 9세의 사생아들이었다. 그가 바로 현재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프톨레마이우스 12세였다.
“혹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나?”
아모시스가 반문하자 테세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될 것이 없네. 다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선대왕은 유언으로 왕권을 로마에 이양한다고 했네. 또한 현 프톨레마이우스께서는 그 출신의 한계로 인해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 떨어지지.”
“출신의 한계라면?”
“사생아일세.”
“으흠. 그건 좀 이상한 일이군요. 왕위계승권이 정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언이 없다면 또 모를까 유언마저 그를 지목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기 매우 어려웠을 텐데요?”
“그건 이집트의 왕위가 남자에게 남자에게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통해 계승되기 때문이네. 왕에 오르는 것은 대개 남자이나 계승권은 여자에게 있네. 따라서 현 왕은 그의 사촌인 트리페나와 결혼함으로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보장받았네. 하지만······. 선대왕의 유언 역시 그 정당성이 없지는 않네. 어쨌든 왕위를 인정받은 자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니. 그것을 무시한다면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권위나 위엄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나 다름없을 것이야.”
테세우스는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다가 아모시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모시스님은 현 왕조가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신다는 뜻이로군요. 맞습니까?”
“통찰력이 뛰어나군. 바로 보았네. 우리는 지금의 왕조가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네. 다시 왕위가 바뀐다면 더 혼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야.”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아모시스에 말했다.
“글쎄요. 이집트로서는 친로마 정책을 펼치는 것이 훨씬 유리할 텐데? 그것을 알지 못하실 분 같지는 않고. 무엇보다 로마는 선대왕의 왕권 이양이라는 명분이 없더라도 이집트를 침공할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충분한 나라입니다. 지금 그런 로마를 적대하겠다는 뜻입니까?”
고대의 이집트는 그야말로 막강한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형세라 자칫하면 이집트라는 이름이 사라질 우려도 있었다. 누군가의 속국이 되어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는 상황인데 로마보다 속국을 우대하는 나라는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기존 기득권층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해주는 나라 말이다.
테세우스는 바로 그 점을 짚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적대? 적대라니. 가당치도 않네. 내 말을 오해했군.”
“으흠.”
아모시스의 태도에 테세우스는 아모시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로마와 적대하지 않으면서도 현 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 아마도 극로마주의자들을 말하는 모양이로군요.”
아모시스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 프톨레마이우스께서는 사치와 낭비벽이 심하시네. 그리고 아직 그 후손이 없으시지.”
참고로 프톨레마이우스 12세는 시저와 안토니우스와 사랑을 나눴던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BC69~30)의 아버지다. 다시 말해 현 시점(BC77)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왕이 암살당할 것이다?”
“그것까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다만 이집트와 로마가 더 가까워진다면 자네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지. 아니 그런가?”
테세우스는 아모시스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집트의 왕이 죽는다면 왕위를 이을 자가 없다. 지금의 왕이 아니라 다른 자가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면 구태여 사생아를 왕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내부가 혼란해지는 건 나쁠 것이 없지만 선대왕이 유언으로 로마에 왕권을 이양했다면 그 혼란은 로마에 큰 도움이 된다. 도리어 이집트를 완전히 로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야.’
테세우스는 생각을 멈추고 아모시스를 바라봤다.
“이집트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이 학자들에게는 나쁠 것이 없을 텐데요?”
“쯔.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자들이 그 일에 동참하고자 하고 있네. 하지만 이집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겠지. 예전보다는 왕권에 대한 권위가 많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집트는 제사장과 왕이 하나로 결합된 신권통치일세. 두 체제가 충돌함에 따라 반드시 극심한 혼란을 일으킬 것이야. ”
이집트의 왕은 신의 아들, 즉 호루스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이집트는 기본적으로 영원불멸을 믿었으며 그렇기에 미라를 만들어 보관했다. 썩을 만한 내장을 모두 뽑고 미라를 만드는 과정 중에서 의술이 자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집트의 의사는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로마도 이집트처럼 다신교이기는 하나 로마는 신권통치, 즉 신에 의한 통치가 아니다. 그 차이점은 민중에게 많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 점을 염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괜한 걱정이군. 식량과 재물을 충분히 풀면 그런 건 별 문제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아군의 입장에서 일이 이렇게 급진전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인들이 설 자리는 더더욱 없어지겠지······.”
“으흠. 로마는 인종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화는 구별하지. 이집트 문명과 문화는 로망의 그늘 아래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야. 우리의 신들 역시.”
테세우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지만 더는 캐물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이들에게 적절한 계획이 있다면 굳이 자신이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꺼냈다.
“이집트가······. 로마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기를 바래야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 자유무역지대 말일세.”
“어쩌다 나온 생각에 불과합니다. 캄바에게 설명한 것과 다르게 더 상세하게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아니. 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네. 혹 자유무역지대를 이곳 이집트까지 확장시킬 생각은 없는 것인가? 물론 당장은 어려울 것이라 여기네만.”
테세우스는 눈을 빛내며 아모시스에게 말했다.
“저희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상의해야할 문제로 여겨지는군요. 당장 이집트 왕조가 위태위태한 상황이니.”
“음.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람을 보내서 이르도록 하겠네. 아흐모세라는 이집트인으로 실무와 관련된 내용은 그자가 전부 파악하고 있네. 이곳 도서관에서도 여러 가지 사무를 보고있지.”
“음? 공교롭게도 만나본 적이 있는 인물이군요.”
“오호. 그랬던가? 그나저나 아까 그건 대체 뭔가?”
“못 들으셨습니까? 저들이 오리칼쿰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 그래서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로군. 어디 내가 한 번 봐도 되겠는가?”
테세우스는 말없이 품에서 금속을 꺼내서 아모시스에게 보여줬다.
“이건? 으흠. 잘 바스라지게 생긴 것으로 봐선 이건 화장품이나 자줏빛을 내기 위해 안료로 쓰는 금속과 비슷한 것 같긴한데.. 색상이 이렇게 다채롭고 형형한 금속은 나도 처음보는군. 게다가 이 정교한 균열은 마치 피라미드를 연상시킬 정도야. 어디서 얻은 건가?”
“히스파니아 지역인데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추적하다가 얻은 것이라 출처가 히스파니아 지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제가 아는 대장장이는 이것의 성질이 납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납이라? 음.”
그는 다시 금속을 돌려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것이 오리칼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희귀한 금속이라는 것에는 이견을 둘 수 없네. 학자들에게는 특이한 납이라고 둘러댈 터이니 다른 자에게 되도록 금속을 보이지 말게. 괜한 오해를 부를 물건이야.”
그 모습에 테세우스는 아모시스에게 질문했다.
“오리칼쿰이라 믿지 않으시는군요.”
“글쎄. 그것이 전설의 오리칼쿰처럼 단단한 금속이라면 모를까? 그저 색상이 특이한 납이지 않은가?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거의 맞다고 봐야겠지. 무엇보다 사라진 대륙에 신경을 쓰기엔 산재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말일세.”
이것을 고대인들이 오리칼쿰이라 여긴 것인지 아니면 오리칼쿰이 따로 존재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눈앞의 이 금속이 전설의 오리칼쿰처럼 어떤 초금속이 아닌 건 확실했다.
테세우스는 다시 품속으로 금속을 집어넣으려다가 생각을 바꿔먹고 그에게 건네줬다.
“그럴 게 아니라 차라리 학자들에게 연구하게끔 내어주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겠습니다.”
“으흠. 그래도 되겠는가? 그게 정말로 오리칼쿰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혹 그게 오리칼쿰이라고 할지라도 손바닥 절반만한 초금속으로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혹시 모르니 그 출처는 미정으로 해두십시오.”
“자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네. 그리하지.”
사실 테세우스가 들고 있는 금속의 정체는 비스무트라 불리는 금속이었다. 언제부터 비스무트를 비스무트라 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납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긴 했지만 독성이 없다시피 하기에 의약품, 화장품, 안료, 촉매 등으로 쓰이는 금속이었다.
납과 엄연히 다르지만 구분하기 어려웠기에 창연(蒼鉛, 푸른색 납)이라 불리기도 했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가지고 있기는 한데 반감기가 우주의 연령보다 무려 14억 배나 길기에 안정화된 금속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 비스무트가 존재하는 경우는 꽤나 희귀했다. 어쨌든 이게 전설상의 오리칼쿰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아니면 비스무트를 고대인들이 오리칼쿰으로 불렀거나.. 그건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