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 대도서관.
125.
병사들은 테세우스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캄바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아모시스 선생님께서 만나 뵙고자 하는 분입니다. 저 역시 그분께 학문을 배운 적이 있는 제자입니다.”
그러자 병사는 캄바를 유심히 바라보며 대뜸 질문했다.
“하면 이름을 밝혀라.”
“캄바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병사는 이내 곧 도서관의 노예를 시켜 안에 기별을 넣었다. 잠시 기다리자 얼마 뒤 노예가 다가와 병사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아모시스 선생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 캄바, 당신의 신원은 보증이 되었지만 저자의 신분은 확인된 바가 없으니 일단 저자는 정원까지만 들어가는 것을 허한다.”
도서관은 정원, 공동 식당, 독서실과 강의실, 집회실 등을 비롯해 신간 도서나 책을 분류하는 서기들의 위한 공간도 별도로 존재했다. 하지만 도서관의 정원이나 보려고 테세우스가 이곳까지 발걸음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정원까지만 출입한다는 건 도서관에 출입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자 캄바가 작은 돈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스승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후에 아모시스 선생님께서 정말로 이분을 만나 뵙고자 했는지는 그때 확인해보고 그 대가를 물으시면 될 일입니다. 아니라면 아모시스 선생님의 제자와 손님의 편의를 봐준 것이 되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음. 좋다. 만약!”
병사가 다시 엄포를 주려고 하자 테세우스가 태연한 기색으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요. 하물며 나는 어떤 무기도 없지 않소?”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미 그의 육체가 살인병기인데 무기가 있고 없고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금세 피와 고통으로 뒤덮일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말이 일반론이기는 했다. 따라서 이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음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니 병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흥! 통과!”
이집트 특유의 경무장을 한 병사는 코웃음을 치며 결국 테세우스와 캄바를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허가해줬다. 그렇게 도서관에 들어온 캄바는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곳의 서기들에게 요청한다면 대부분의 자료는 열람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확인 좀 해봐야겠습니다.”
기밀자료를 얻고자 이곳까지 발걸음한 것이 아니니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캄바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소.”
“당연한 말씀을.”
테세우스가 고마움을 표하자 캄바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다시 띠며 가볍게 인사하며 다른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도서관 안에 높이 솟은 서가들과 그 안에 담긴 수많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기들과 학자들이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요란하지는 않지만 도서관 곳곳을 누비며 분주하게 저마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멀뚱히 서 있자 한 서기가 테세우스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혹 필요한 자료가 있으십니까?”
보아하니 캄바가 이동하며 안면이 있는 서기에게 말을 꺼낸 모양이리라. 서기인 것은 확실해 보였는데 그가 노예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참고로 로마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역시 노예가 재산을 축적하거나 자유를 살 수 있었기에 노예에 대해 제법 너그러운 나라였고 무엇보다 이 시대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건 특권에 가까웠다.
이집트의 계급은 크게 삼층 구조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왕족, 부유한 지주, 정부 관리, 군 장교, 의사 등이 상층계급에 속하고 상인, 수공업자, 제조업자 등은 중간계급에 나머지 농경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하층계급에 속했다. 하지만 계급구조가 매우 엄격한 사회는 아니었다.
“필요한 자료라면······. 아니 그보다 추천해줄 만한 인물이 있소?”
자신이 일일이 파피루스를 읽고 있는 것보다는 관련 정보에 대해 빠삭하게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더 효율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세르토리우스 밑에서 그리스어와 문자에 대해서도 배웠지만 이집트 문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글쎄요. 어떤 정보를 얻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서기가 주저하며 말을 흐리자 테세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서기에게 돈을 건넸다.
“기하학, 천문학, 지리학 등······. 음 역사학에도 두루 능한 사람이면 됩니다.”
“흠. 모두 개별적인 연구를 시행하느라 바쁘신 분들입니다. 개개인의 호기심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그분들이 과연······.”
“학자들도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필요하지 않겠소? 많은 시간을 뺏지 않을 것이고 얻고자 하는 지식 역시 고차원적인 내용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니.”
서기는 테세우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가서 의견을 여쭤보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서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도서관 곳곳을 누비며 이모저모를 살폈다. 건축부터 시작해서 서가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렇게 도서관을 살피던 테세우스가 호기심에 손을 내밀어 서가의 파피루스를 꺼내 들려는 순간, 그의 뒤편에서 카랑카랑한 청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건 히에라틱으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무엇보다 기록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인가받은 사람에 한합니다. 주의사항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테세우스는 파피루스에 가져가려던 손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학자풍의 한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수할 뻔했군. 고맙소. 다만 히에라틱이라면?”
테세우스는 생소한 단어에 그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청년은 한숨을 내쉬며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대도서관에 출입한 자가 뭐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에 가깝다랄까?
“이집트인의 문자입니다.”
그 말에 테세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도서관의 벽에 새겨진 문자도 이집트의 문자로 보이는데 아니오?”
“맞습니다. 다만 도서관 벽에 새겨진 문자는 히에로글리프입니다. 혹 왜 히에로글리프로 새겼는지 의문일 수는 있겠지만 그거야 당시에는 히에로글리프에 대한 권위가 지금보다는 있었나 보죠. 지금이야 신관들이나 학자들이나 숙지하는 수준이지만 하긴 그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겠군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설립한 이는 프톨레마이우스이나 현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프톨레마이우스 왕가의 사람들은 이집트 말조차 배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청년은 그것에 대한 의문점을 미리 풀어버린 것이다.
이집트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 하다시피한 테세우스로서는 당연히 그의 말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히에로글리프는 신전과 같은 건축물에만 쓰이는 문자입니다. 방금 확인하려고 하시던 파피루스에 기록된 히에라틱은 그것의 흘림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파피루스에 기록할 때 쓰는 문자였는데 현재는 신관들만 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집트 신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실 것이 아니라면 다른 서가를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뭐······. 어쨌든 지금처럼 아무 문서나 마음대로 건드리려고 하면 추방당합니다. 주의하시길. 그럼.”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상형문자 내지 신성문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오래 쓰인 문자다. 공식문서 외에 기록되는 문자를 간소화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히에라틱(Hieratic, 신관문자), 다시 여기서 더욱 간소화된 것이 데모틱(Demotic, 민중문자)다.
데모틱 탄생 후로 앞선 두 문자는 특정계층 외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프톨레마이우스 왕조가 들어서며 그리스 문화가 빠르게 유입되었고 이에 다시 그리스어와 데모틱이 결합된 콥트문자가 탄생한다.
“잠깐. 하나만 더 질문하고 싶소. 내가 알아본 바로는 현재 대다수의 이집트인은 콥트문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거야 프톨레마이우스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인이 출세하는 법은 궁정관리나 행정관이 되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에 대한 불만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여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무는 젊은 학자를 테세우스는 이채 서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도서관에 쫓겨날 일을 막아줬으니······.”
“입을 다물라? 일단 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오.”
“음.”
그가 침음을 삼키자 테세우스가 재차 말했다.
“이집트 출신이오?”
“보시다시피.”
그의 말 따라 그는 이집트인만의 특색있는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테세우스라고 하오.”
청년은 테세우스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흐모세요.”
하지만 테세우스가 내민 팔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대신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테세우스는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겨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괜한 걱정은 마시오. 대신 내게 시간을 좀 내주시오. 나를 도운 일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어서 그러하오.”
“내가 거절한다면?”
테세우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믿고 안 믿고는 아흐모세 당신의 선택이겠지만 선의로 나를 도운 사람에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고.”
“······.”
아흐모세가 입을 다물고 테세우스를 바라볼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흐모세! 이번에 들어온 문서 분류 작업은 끝내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냐?”
그 소리는 불호령에 가까웠다. 하지만 도서관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고함까지는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아흐모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표정도 표정이지만 자신의 제안이 그 호령으로 인해 끊겼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테세우스 역시 살짝 안색을 굳히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머리가 벗겨진 그리스인과 안면이 있는 서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기와 눈을 마주친 테세우스는 눈앞의 이 학자가 자신이 요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한 짓을 했군.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에 불만을 품은 학자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게 알려줄 텐데 말이야. 게다가 그리스인이라면······. 으흠. 괜한 오해 사지 않게끔 적당한 질문으로 끝을 내야겠군.’
그때 아흐모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작업까지 분류를 마친 상황입니다.”
“흥! 이따가 내가 확인해보겠다.”
축객령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흐모세는 말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스 학자, 도리안은 자신 앞에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사내를 바라봤다. 전쟁기술이나 연마하길 좋아할 것처럼 생긴 자가 무슨 바람이 불어 도서관에 왔나 싶었지만 약간의 말을 늘어놓고 돈을 챙긴다면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오히려 깐깐한 학자들이 이것저것 캐묻는 것이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도리안이라고 하오.”
테세우스는 도리안의 모습에 낭패감을 느꼈지만 돈을 받은 서기가 애먼 사람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 필요한 내용을 질문해보기로 했다. 인성과 실력은 별개인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음.. 이것입니다.”
억지 미소 가운데 서린 귀찮음을 읽은 테세우스는 자신의 질문 중 이들이 민감하게 여기거나 의심하지 않을 만한 것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도리안은 이상한 눈빛으로 테세우스가 품에서 꺼낸 손바닥 절반 만한 물체를 바라봤다. 그것은 천으로 싸여있었기에 도리안은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불퉁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무엇을?”
테세우스는 천을 풀어내며 도리안에 말했다.
“대학자들이 모인 이곳이라면 이 금속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어서.”
“음?”
도리안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이 점점 커졌다.
“서.. 설마? 설마?”
도리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테세우스에게 물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당신이 이 금속에 무지개색을 집어넣은 것이오?”
예상 외로 반응이 너무 격해서 테세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왜 그런 질문을? 당연히 아닙니다.”
도리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럴 수가. 설마.. 설마 정말로 오리칼쿰, 오.. 오레이칼코스란 말인가?”
‘오리칼쿰? 설마 그 오리하르콘?’
도리안의 말에 테세우스는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뭔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