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21화 (121/298)

# 121

121. 사람의 마음.

121.

후우우웅

테세우스는 창대에 흐르는 피를 털어내기 위해 허공에 세차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에게 죽임당한 자들의 피가 비수처럼 날아가 선상 곳곳에 흩뿌려졌다.

후두두둑

“토페트에서 행한 일을 가지고 신성모독이라 지랄하며 이곳까지 왔다는 건 네놈들도 그때의 그들과 동일한 행동을 하는 작자라는 소리일 테지. 오냐! 소원대로 모조리 죽여주마.”

테세우스는 그나마 있던 자비심까지 모조리 버렸다.

테세우스의 능력이면 모두 살려둔 채로 굴복시킬 수 있지 않냐고? 그야말로 헛소리다. 죽을 자들은 죽어야 한다. 죽을 자들이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자들이 힘들어진다. 특히 다른 자를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는 자들은 그냥 깔끔하게 죽여버리는 게 세상에 이롭다.

‘이렇게 된 마당에 너 때문에 죽었다고 원망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노가 치미는 것까지 막을 생각이 없다.’

“와라! 안 오냐? 그럼 내가 가지!”

테세우스는 다시 쇄도하자 저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선상이고 사람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피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테세우스는 물러서는 자들의 목을 보아디케아로 수거하며 일갈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지? 인신공희까지 하면서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너희의 믿음 아니냐? 그러니 너 스스로를 네 신에게 바쳐라. 그러면 아주 간단하지 않나? 세상천지 어디에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게 있나? 그러니 그냥 깔끔하게 네 목숨 하나 불 속에 던져넣으면 되는 거야. 애먼 사람들 잡아다가 신을 기쁘게 한답시고 집어처넣지 말고. 이 새끼들아.”

그가 그렇게 말할 때 보아디케아는 사람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죽여! 죽여라!!”

“씨.. 씨발!”

“그래 봐야 한 놈이다. 저놈도 지쳤을 거다. 그러니 몰아붙여!”

뒤편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아마도 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이겠지. 하지만 그 말에 권위가 없는 것으로 봐선 저자가 주동자가 아니라는 건 보다 확실해졌다.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그를 향해 다시 달렸다. 일단 벤다.

퉁 퉁 퉁

그의 거센 발걸음을 이기지 못한 갑판이 삐거덕거리며 그의 기세를 드러냈다.

“마... 막아! 놈을 막아!”

테세우스가 달려오자 어떻게 그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들로서는 무리였다. 고작 3백도 채 되지 않는 자들이 테세우스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이들이 오합지졸까지는 아니었지만 군단병도 썰어버리는 테세우스다. 그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뿌우 뿌우우우

쿵 쿠쿵

그때 뿔나팔 소리와 함께 다른 트라이림이 이 배에 다리를 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저들의 배가 우훅죽순 사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는데 그 배의 숫자가 무려 4척이었다. 트라이림 7척 중 5척이 테세우스를 처리하고자 집결한 셈이다.

다행히 대장선처럼 보이는 이 배보다는 병력의 수가 적어 보였지만 배 4척에 나눠타고 있던 병력이 집결된다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숫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냐! 내가 테세우스다. 누구든 자신 있거든 와서 내 목을 가져가 보거라!”

테세우스는 흉흉한 기세를 발하며 더욱 가열차게 적을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

파도 소리, 고함, 비명, 북소리 등등 온갖 전투소음이 고요한 바다를 찢어놓았다.

나디르는 그 가운데서 고요한 눈으로 뒤편을 빠르게 추격해오던 해적들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뭔가.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 자신들을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의 배를 포위한단 말인가?

“불화살을 준비해놓고 어째서?”

아군이 쏜 불화살이라고 해서 아군의 배에 불이 붙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저들의 아군을 포위한단 말인가? 그대로 불화살을 날리기라도 할 참······.

그 순간 나디르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제길!”

“반전! 반전하라!”

저들은 아군의 배를 추격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모든 것은 테세우스가 대장선에 올라타게끔 계획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해적이 보이는 배치는 바로.

“미친! 한 명을 죽이려고 수백 명을 수장시킬 생각이라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 계략을 꾸민 자는 진정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긴 하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악랄하고 냉철하단 말인가?

“서둘러라! 서둘러!”

둥 둥 둥 둥

이에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디르의 배는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적들의 배는 이미 저들의 포위망을 단단하게 구축했다. 그들의 배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작은 불꽃이 어찌 그리도 불길하게 보이는 것인지, 나디르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제길!”

너무 느리다. 그럴 수밖에. 배라는 것은 단번에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전방으로 질주했던 배가 방향을 뒤집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다.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 더딤에 나디르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해적들이 준비한 불화살은 아마도 그림자회의 트라이림에게 쏟아 부어질 것이다.

해적들은 당연히 나디르 자신이 탄 배를 쫓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아.. 화살이!”

“적선으로 불화살이 쏟아집니다.”

불길한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나디르는 욕설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젠장!”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중앙의 배가 모조리 화마에 뒤덮인다면 함부로 다가가서는 곤란했다. 적어도 해적을 처리해야만 구출작업을 해도 할 수 있다. 섣불리 움직여서 배를 잃어버린다면 테세우스가 살아있어도 모두 함께 죽게 될 운명에 놓일 것이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건 배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테세우스의 계략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놈들이 너무 잔혹한 계략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냉정, 냉정해야 한다. 나디르는 눈을 질끔 감았다가 뜨면서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우리를 무시한 해적 놈들을 하나씩 처리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시간이 생명이다. 그러니 실수하지 마라.”

“예.”

자신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둔 대가를 철저하게 치르게 할 것이다. 나디르는 매서운 눈빛으로 연신 불화살을 쏘아내는 해적들을 바라봤다.

*

샤파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림자회의 트라이림을 향해 날아가는 불화살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고작 한 명을 죽이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불만이었지만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정체는 알 수 없는 두려운 자들이 지시한 내용이고 따라서 그 지시에 따를 필요가 있었다. 비효율적이든, 비겁하든 뭐 어쨌든 간에 목표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고 괜히 저들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에 샤파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음에도 그대로 시행했다.

“뭐 잘 타기는 하는군.”

기이하게도 저들의 배는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점이 기이하면서도 재밌었다. 뭔가를 불태우고 파괴한다는 건 그래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크크크. 뭐가 됐든 잘들 타죽어라. 물에 빠져 뒈지든가? 뭐 그것까진 내 알 바 아니고. 크크크.”

*

테세우스가 위용을 떨치긴 했지만 한정된 지역에서 아직 몇십 명의 적을 베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도 대단하고 적으로 상대하기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 정도 신위를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자들 역시 결국엔 죽임을 당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들은 끝없이 테세우스를 압박했다. 더욱이 아군의 병력이 추가로 합세한 상황이 아닌가?

“죽어라!”

“와아아아아!”

테세우스는 다시 창을 횡으로 휘둘러 저들의 병장기를 부수거나 걷어내고 저들의 육신을 무참하게 헤집어놓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테세우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테세우스에 대한 살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쇄에에엑 퍼퍼벅 퍼벅

테세우스는 적을 베어내다가 불화살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화살을? 같은 편에게 불화살을 날려?’

뭔가 불길한 느낌에 테세우스는 달려오는 사내의 머리통을 날리고 급히 배의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화살이 적의 배에 박히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화르르

‘이건?’

테세우스는 끝없이 적을 베어내다가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거 뭔가 겪어봤던 상황이 아닌가? 자신이 겪은 건 아니고 자신의 적이었던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그의 해군이 겪었던 일말이다.

테세우스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불바다였다. 적들도 그제야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저들이 왜 우리에게 불화살을 날려?”

“이게 무슨 일이야?”

“해적 놈들이 감히!”

“일단 저놈을 죽여라! 이 피해는 후에 해적 놈들에게 받아내면 될 일이다.”

‘몰라?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테세우스는 그 모습에 그림자회니 뭐니 하는 자들도 이용당한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무슨?’

하지만 배가 불타거나 말거나 테세우스 앞에 있는 적들은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며 그를 공격해왔고 테세우스 역시 조금 전처럼 열정적으로 적을 베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죽였다.

콰아아아앙

콰광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배 이편저편에서 거센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섬광이 자신의 망막을 덮는 순간, 이를 악물고 그대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쾅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부.. 불이! 내 몸에 불이!”

“아아아아악!”

몸에 불이 붙은 자들이 불을 손으로 꺼보려고 했지만 불이 꺼지기는커녕 그 손마저 태워버렸다.

“크아아아악!”

쾅 콰광 콰광

폭발은 한 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섯 척 모두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로 인해 다섯 척의 배가 모조리 불타올랐고 바다 위에 거대한 불꽃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배가 타오르는 것을 감상하고 있던 샤파트는 질겅질겅 씹고 있던 고기를 입 밖으로 뱉어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게 뭐여?”

이런 거대한 폭발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과 별개로 저들의 두 번째 지령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자들은 몇 날 며칠이고 주시하며 확실하게 죽이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참으로 지독한 취미를 가진 자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제길. 이러면 내 목도 성치 않을 확률이 높은데······.”

이렇게 지독한 자들이라면 자신도 살인멸구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그건 둘째 문제다. 저들이 지시한 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 걱정 자체가 무용한 일이 될 테니까.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상황도 아니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 뭔가 특별해서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을 뿐이니······.

“테세우스. 테세우스 그놈은 대체 뭐지? 뭐 하는 놈이길래 이런 자들과 원한 관계를 맺은 거야?”

“두.. 두목!”

“뭐야?”

“아군도 불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쏴서 그런거고.”

“아니 우리 해적들의 배가 불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저 멀리 그림자회의 트라이림에 정신이 팔려있던 샤파트는 그제야 해적들의 배가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도망친 배가 우회하여 공격을 감행한 모양입니다.”

“뭐? 어처구니없군. 네놈들은 대체 뭐하는 새끼들이냐? 내가 일일이 지시를 내려야만 움직이는 머저리들이냐? 진작 처리를 하던가, 견제를 했어야지. 이 새끼들이 진짜! 뭐해 새끼들아! 전투 준비해!”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샤파트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고작 한 척이다. 놈들의 충각을 피하는 건 어렵겠지만 놈들 스스로 발을 묶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백병전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전투였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

“쏴라!”

나디르의 명령에 궁수들이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저들의 화살은 정확하게 해적들의 돛을 불태우고 적의 궁수들을 요격했다.

나디르는 전방을 바라보며 해적들을 주도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함선을 알아본 것이었다.

“샤파트. 샤파트. 네놈이로구나. 내가 네놈을 진작 죽였어야 했다.”

으드득

나디르는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알겠습니다.”

둥 둥 둥

거센 북소리와 함께 나디르의 배는 샤파트의 배를 향해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해적들이 화살을 날렸지만 저들의 명중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화력이 포위망 안쪽의 트라이림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방향을 반전하느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해적은 해군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화망이 그로 인해 완전히 틀어졌으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나디르의 함선에 닿는 불화살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저들의 배는 완전히 멈춰있었기 때문에 우회하여 전속력으로 항해 중인 나디르의 배를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콰지지직 콰직.

이윽고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배를 잡고 그 충격을 버티고 있던 나디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샤파트의 배에 오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샤파트!”

이미 백병전을 준비 중이던 샤파트가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며 말했다.

“오호 나디르. 후사인을 죽인 게 네놈이라지? 크크크. 오늘 네 멱을 따서 피티우사 제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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