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9화 (119/298)

# 119

119. 이집트.

119.

테세우스의 배가 전방으로 가속함에 따라 양 측면에서 출현한 해적들의 바이림은 호선을 그리며 테세우스를 추격했다.

“제길. 완벽한 함정이로군요.”

나디르가 손바닥으로 뱃전을 내리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방에는 무려 7척의 트라이림이 바다 위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만. 저 형태는?”

나디르는 미간을 좁히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7척 모두 예전 카르타고가 건조한 형태의 트라이림이었다. 또한 그 위에 펄럭이는 깃발은 자신도 익히 알던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건 카르타고의 그림자회 문양이 확실합니다.”

“음?”

테세우스는 의문을 품었다. 그림자회가 자신을 노렸다? 원한 측면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자신은 그림자회 두목인 히밀코를 잔인하게 죽였고 토페트에서 바알과 타니트 신상을 무참하게 파괴해버렸다. 원한 관계가 성립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하지만 저들에게 저만한 영향력이 있던가? 정보력은 둘째치고 저들은 해적들을 선동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 아니었다.

카르타고의 트라이림은 로마의 것보다 날렵하고 그 크기가 작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노잡이를 제외하고 전투병력이 60명 이상 탑승하고 노잡이 포함하면 최소 150명은 족히 넘는 인원이 한배에 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최소인원으로 계산해도 그 수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다시 말해 1000명에서 해적들까지 포함하면 2000명도 더 되는 인원이 자신을 잡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소리다. 자신이 겪었던 그림자회는 이 정도까지 세력이 강한 자들이 아니었다. 세는 그렇다쳐도 히스파니아까지 정보원을 보내고 다시 정확한 시점에 정보를 습득, 활용하려면 그만한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자회는 그 정도 수준에 달하는 세력이 아니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죽이려는 계획은 결코 우연으로 성립되지 않아.’

드물긴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실수로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는 건 결코 실수나 우연으로 빚어지는 일이 아니다. 현재 자신이 맞닥뜨린 함정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획된 습격이었다.

그림자회가 주축이라면 이 모든 계획을 저들이 수립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주제가 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군.”

테세우스는 배에 마련된 자신의 무구를 하나하나 걸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디르는 갑주를 걸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테세우스가 갑주를 걸치는 것을 도와줬다.

‘파이살이 새롭게 만든 갑주를 이렇게 또 사용하게 되나?’

정강이받이와 팔보호대 그리고 갑주까지 완벽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호심경이라 볼 수 있는 단단한 철판도 갑주의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상을 띠고 있었는데 어떤 전장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에 가까운 계열의 색상이었다. 물론 눈밭에서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글쎄요. 저도 그림자회에게 이만한 저력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히밀코는 푸뉘쿠스인이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푸뉘쿠스인들은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편입니다. 히밀코 역시 카르타고를 다스릴 때 우티카의 푸뉘쿠스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바로 그 때문에 당시 제가 그림자회를 맡는 것을 마다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히밀코는 분명 그림자회의 두목이었지만 그것을 고려하면 그림자회 자체가 저들 푸뉘쿠스인들 모임의 지부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음..”

테세우스는 침음을 삼켰다.

푸뉘쿠스(페니키아)인들은 북아프르카 지역에 문명을 전파한 장본인들이다.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자신들의 문명을 전파한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 푸뉘쿠스인들이 어떤 단체를 형성하고 있고 그들이 자신에게 원한을 느끼고 있다면 이만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테세우스님께서는 저들의 신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림자회가 어떤 단체의 지부가 아니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이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기엔 충분합니다.”

‘알라후 아크바르······.’

문득 테세우스는 폭탄 테러범이 소리친 말이 떠올랐다. 수많은 재물을 준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광신도들은 신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디르의 말대로 그림자회가 어떤 자들의 수하가 아니더라도 이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테세우스라는 미친놈이 바알 신상과 타니트 신상을 부수고 우리의 신들을 모욕했다. 저자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를 모욕하는 행위가 동일하다. 죽이자! 놈을 죽이자!’ 누군가 이런 식으로 선동했다면 바알과 타니트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어떤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또한 자신에 대한 원한이 그토록 깊었다면 지금껏 왜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음?”

순간 무스타파가 떠올랐다.

‘설마 그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에 대해 밝혀진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스타파는 바알이나 타니트 신상을 부순 일에 대해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자신에게 증오를 느끼고 있는 자는 아니었다. 실례로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꺼림칙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그것을 고려하면 당연히 바알과 타니트 등을 따르는 자는 아닐 것이고 자신이 만나본 무스타파는 광신도들의 용병으로 활약할 자도 아니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는 점점 더 빠르게 울려 퍼졌다. 갑주를 걸치는 것을 도와준 나디르는 주변의 병사들에게 고함을 치며 곧 일어날 전투를 대비했다.

저들의 정체가 어떠하든지 간에 저들이 세운 계략은 탁월했다. 이런 좁은 배 위에서라면 자신의 활약이 무용해진다. 아닌 말로 저들은 배만 침몰시키면 되는 거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자가 계책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나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마친 자가 세운 계략이야. 누구지? 로마인도 아니다. 그림자회라고도 확정할 수 없다. 누구지? 어떤 자들이지? 어쩌면 로마인과 그림자회의 합작품일지도······. 제길.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없군.’

과하게 추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고 있다고 뒤통수를 처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러한 태도가 일상생활에서도 적용된다면 삶을 피폐하게 만들겠지만 전장에서의 의심은 생존확률을 비약적으로 높여준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심지어 우연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에 대해 의심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살아남고 싶다면. 잔혹한 전장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지금 이것을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자세한 건 적을 족치면 될 일.’

테세우스의 눈빛에 살의가 번뜩였다.

자신은 호인이 아니다. 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보일 자비 따위는 없다. 죽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인권 따위를 집어넣을 이유가 없다. 그럼 적의 손에 죽으란 말인가? 적을 죽이고 살리고는 적의 손에 죽을 뻔한 자의 권한이다.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평하고 간섭할 권한 따위는 제삼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벌써 전에 결단했다. 적은 죽이기로.

테세우스는 손방패와 활과 활통에 등에 메고 두 자루의 칼을 허리춤에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아디케아를 들고는 허공에 두어 번 휘돌린 다음 옆구리에 끼웠다.

붕 부붕 착

‘나디르의 말대로 함대를 이끌고 왔어야. 아니 의미 없는 생각이군.’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애초에 히스파니아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고 토페트에서 살육을 벌이지도 말았어야 했고 더 나아가 검투장에서 벗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 그런 식의 가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나디르.”

“예.”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다. 알고 있나?”

나디르는 인상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다른 건 둘째치고 배가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들에게 불화살이 있다면 저들에게도 불화살이 있고 자신들에게 충각이 있다면 저들에게는 무려 17개는 넘는 충각을 보유하고 있다. 충각은 어떻게 피하더라도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이 배에 박히지 않게끔 막아낼 수단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배가 불타오르기 전에 전투를 수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전에 전투가 끝날지도 의문인 상황. 테세우스의 말대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테세우스조차 지금의 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니 그야말로 불시의 습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자신만 해도 고만고만한 해적 놈들 몇 척을 상대하게 될 줄 알았지 이렇듯 체계적인 함정을 파고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해라.”

테세우스의 말에 나디르는 전투의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어오는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디르는 그로서도 방법이 없을 거라 여기면서도 기대감을 품었다.

“놈들이 나를 노리는 것이 맞다면 아마 효과적인 전술이 될 것이다. 전속력으로 놈들의 대장선으로 향해라.”

하지만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생각과 부합한 내용이었기에 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으흠. 대장선을 파괴하실 생각이십니까? 대장선이 파괴된다면 그나마 승산이 높아질 테니······. 알겠습니다. 백병전을 준비······.”

테세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다. 저들 가운데 대장선이 있다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나거나 승산이 높아질 수 있겠지. 하나 내 생각엔 지금 이들 가운데 대장선이라 불릴만한 배나 인물이 딱히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물론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 없진 않겠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다.”

나디르가 의문을 가지고 테세우스에게 되물었다.

“그럼?”

“저들의 배를 빗겨 쳐라. 그리하면 나 혼자 저들의 대장선에 옮겨타겠다.”

“예? 그게 무슨?”

“아군이 전부 대장선을 공격한다면 저들은 아군의 배와 옮겨 탄 대장선 모두를 불태우면 될 뿐이다. 어떻게든 아군을 죽이는 것이, 다시 말해 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이다.”

나디르는 인상을 굳히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테세우스님이 미끼가 되어 적의 공격을 분산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모합니다.”

테세우스는 나디르를 지그시 바라봤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내가 고작 몇백 명도 상대하지 못해서 죽을 인물로 보이나? 예상치 못한 습격이기는 하지만 나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적을 베는 일만 남았을 뿐.”

생각해보니 저들의 배의 구조상 한배의 최대인원이라고 해봐야 많아야 삼백 명이다. 확실히 테세우스가 삼백 명도 상대하지 못하고 죽을 인물은 아니었다. 나디르는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황당한 상황에 그저 침묵을 지켰다.

“······.”

“이집트로 가려면 배가 필요하다. 아군의 배를 사수하든 저들의 배를 탈취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나는 저들의 가진 배보다 아군의 함선이 더 좋은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군.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배를 지켜라. 적을 부숴라. 너는 너의 전투를, 나는 나의 전투를 치른다. 승리할 자신이 있는가?”

나디르는 코를 찡긋거리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저들에게 아군에 대한 공격을 분산시킨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겁니다. 아마 테세우스님께서 대장선의 적을 베는 것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르지요.”

테세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뱃전 위로 올라서며 나디르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럼 서둘러 처리하고 나를 데리러 오도록!”

나디르는 절도있게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대로 전속력을 유지! 전술은 디에크플러스다!”

“디에크플러스!”

말한 바 있지만 디에크플러스는 한쪽 배의 측면을 빗겨 치는 배의 전술로 담력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전술이다. 이 공격을 당한다면 충격을 받은 측면의 노잡이들은 거의 모조리 몰살당한다. 다시 말해 적의 기동력을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전술이다. 물론 돛을 이용해 대부분의 기동력을 감당하나 전투 때는 노잡이 역할이 그야말로 지대했다.

그렇게 저들이 소리치는 순간 적선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방패 들어! 적의 화살이다!”

퉁 두두둥 투둥

화살이 배와 방패 곳곳에 틀어박혔다.

“응사!”

그러자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로를 이용해 불을 붙인 불화살을 적선을 향해 날렸다. 이리저리 퍼져서 날아온 적의 화살과 다르게 테세우스의 병사들이 날린 화살은 정확한 화망을 형성해 저들을 요격했다. 이에 적선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였다.

화살이 오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진 상황. 곧 충돌이 임박했다.

“오른쪽 노 집어넣어! 왼쪽으로 틀어라!”

나디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른편 노잡이들이 일제히 노를 배 안으로 집어넣었고 조타수에 해당하는 자는 급히 배를 왼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적의 대장선에 해당하는 배의 측면을 갈아버렸다.

콰드드드득

“크아아아악!”

“아아아악!”

파도의 출렁임과 배의 충격으로 인해 균형을 완전히 잃을 법도 하건만 테세우스는 뱃전을 장식하는 조각처럼 별 미동도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적선으로 도약할만한 거리가 된 순간, 테세우스는 지체없이 대장선을 향해 도약했다. 적의 궁수는 나디르 휘하의 궁수대의 위력 앞에 별다른 힘도 못 쓰고 픽픽 나자빠졌기에 테세우스를 요격할만한 궁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테세우스는 대장선의 갑판 위에 올라서며 적병의 목을 보아디케아로 대번에 날려버렸다.

촤아악.

그리곤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내가 바로 테세우스다. 누가 감히 내게 맞서볼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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