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8화 (118/298)

# 118

118. 이집트.

118.

테세우스는 미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니······. 뭐 그럴지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모르겠다. 말했지만 어떤 뚜렷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이집트로 향하는 것은 아니야. 다만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이집트라고 들었다.”

나디르는 그 말에서 테세우스의 목적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흐음. 모호한 대답이지만 그래도 테세우스님의 목적지는 알겠군요.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로군요. 하지만 그곳엔 피라미드가 없을 텐데요?”

그는 갸우뚱거리며 말을 꺼내다가 말이 끝날 때쯤 미소를 지었다.

테세우스 역시 나디르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에 자신이 피라미드를 구경하기 위해 이집트로 간다는 말을 기억하고 꺼낸 말이리라.

“대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지. 듣기로 장서가 수십 만권에 달한다는데 과장인지 아닌지는 가보면 알 노릇이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하얀색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이뤄졌는데 맨 아랫부분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채, 중간 부분은 팔각형, 맨 윗부분은 원형으로 총 3개 층의 구조로 이뤄졌다. 그 높이가 무려 120m에 달했는데 정상의 포세이돈 청동상까지 합치면 무려 140m에 이르는 대 등대였다.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 막사로도 쓰였는데 적국의 군함이 쳐들어오면 바로 대처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심지어 등대의 불빛은 56km 밖에서 보일 정도로 밝았는데 이는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구조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거대한 도서관으로 49만 권(사본 제외, 진본만 12만 권 이상으로 추측)도 넘는 두루마리 서책이 보관된 전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었다. (참고: 클레오파트라 치세 때에는 70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하게 된다. 안토니우스가 소아시아 지역, 페르가몬 도서관의 20만 권 서책을 압수하여 선물했기 때문)

당연히 당대의 지식인들은 반드시 한 번씩 들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만 도서관이나 등대 모두 후대에 불타거나 파괴되어서 현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정말 대단한 건축물이지요.”

“본 적이 있나?”

“등대를 가까이서 본 적은 없지만 그 불빛을 본 적은 꽤 많습니다. 밤바다를 밝히는 불꽃을 말입니다. 등대 안에 반사경이 있어서 먼 곳까지 그 빛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당연히 등대를 보고자 그곳으로 향하시는 건 아니실 테고 최종 목적지는 대도서관이겠군요.”

“맞아. 일단은······.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다. 지식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학자들이 버려두고 지식의 불모지에 가까운 히스파니아로 올 리는 없겠지만······. 뭐 그래도 그 가운데 자신의 습득한 지식을 실제로 실현해보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자들 역시 없지는 않겠지.”

단순히 장서가 많기 때문에 지식의 요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때문에 요람이라고 언급한 것이었다.

“음.”

그게 전부일 리가 없었다.

여유가 있다는 건 바로 경쟁자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소리다. 그 기회를 마냥 흘려보낸다면 로마를 압박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고작 학자들의 조력을 얻고자 이집트까지 항해한다고? 심지어 저들의 조력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테세우스가 이집트로 향한 저변에는 분명히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뚜렷한 목적이 없다는 말은 그 이유가 단순히 한두 개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았다. 방금 언급한 학자들 이야기 역시 그 여러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로마에 대한 계략을 수립하거나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는 것보다 이집트로 향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의 임무는 테세우스를 무사히 이집트로 데려가고 히스파니아로 다시 무사히 데려가는 일이다. 필요 이상의 것을 더 알 이유가 없었다. 테세우스 역시 자신에게 일일이 말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가 더 언급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디르는 히스파니아나 로마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테세우스의 계책은 언제나 자신의 이해를 넘어섰지만 역시 이해를 넘어선 결과를 도출해냈다. 이번 역시 그럴 공산이 컸다.

그는 그의 일은 나는 나의 일을 한다. 나디르는 테세우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째 뭔가 질문을 던지기 전보다 더 모호해진 듯하지만 저는 당신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테세우스는 나디르의 눈을 마주하며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나디르는 역시 말없이 그의 팔을 맞잡았다.

턱.

촤아아악

그때 트라이림의 측면을 파도가 강하게 때리며 바닷물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 순간 나디르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아. 호라티우스가 꼭 전해야 한다고 했는데······. 잊을 뻔했습니다.”

나디르를 제외한 테세우스의 심복들은 대부분 히스파니아에 남았다. 그것만 봐도 테세우스가 아무 대책 없이 이집트로 향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되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테세우스는 입매가 슬쩍 비틀어진 나디르를 멀뚱히 바라보며 반문했다.

“뭘?”

“검 쓰는 걸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 한 날이 없다. 무겁든 가볍든 테세우스는 반드시 무예를 수련했다. 전장에서는 단 한 번의 서늘함이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니까.

호라티우스는 도리어 그런 테세우스를 보며 단련에 미친 사람이라며 학을 떼곤 했다. 그런 사람이 테세우스에게 훈련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그야말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아닌가?

“뭐?”

테세우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나디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 거리며 말을 이었다.

“크큭. 가감할 것도 없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검을 관리 안 하면 녹슬고 썩어서 결국엔 쓰고 싶어도 못쓴다는 건 테세우스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집트 여인들이 이쁘다고 그래도 정평이 나 있으니.”

테세우스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고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거 두 다리 위의 검도 매우 튼실한 걸로 아는데 녹슬기 전에 검 쓰는 걸 잊지 말고.”

“그만하라 했다.”

“큭큭큭큭. 호라티우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뭐든 안 쓰면 녹 쓸기 마련이니. 아 한 가지 더 빠뜨렸습니다. 이번에도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그 검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집트, 그 화려한 곳에 가면서도 자신을 히스파니아에 버리고 갔으니 화려한 무용담이라도 반드시 들어야겠다고. 그것도 반드시 테세우스님의 첫 출검식을. 크큭.”

테세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호라티우스와 어울리더니 그에게 물들기라도 한 건가?”

나디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뭘 말입니까? 증명하면 될 일입니다. 증명 말입니다.”

테세우스는 나디르의 장난기 서린 미소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여인이라 딱히 멀리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이집트에서 해야 일들의 목록에 대해 빠르게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그의 눈빛은 하늘의 태양과 같은 섬광이 서려 있었다. 정확하게는 눈동자에 태양이 반사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입매에 서려 있던 미소도 태양 앞의 그림자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하나다. 아군을 이롭게 하고 적을 괴롭게 하는 것. 다만 세부적인 목표는 적게 잡아도 열 가지 정도는 되겠군. 그 일 가운데 여유가 있다면 여인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집트. 이집트라.’

테세우스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고대 이집트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나디르에게도 말했지만 이집트에 대한 기대는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그 기대가 이집트행의 전부가 아니었을 뿐이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거뭇거뭇한 점 같은 것들이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딱 봐도 배의 형상이었다.

“그나저나 전투를 준비해야겠군.”

나디르 역시 테세우스가 바라보던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섯 척가량의 2단 갤리, 바이림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직 해적 출신인 나디르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바이림의 기동성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바이림은 기본형에 가까운 배에 불과하다. 당연히 트라이림의 기동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거리가 아직 멀기 때문에 이대로 저들을 따돌리고자 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나디르는 테세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하실 겁니까?”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든 피해가 발생한다. 허접한 해적들의 습격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나?”

“무엇이? 음. 그러고 보니.”

나디르는 반문을 하다가 테세우스가 왜 이상하다고 언급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자신들의 배는 트라이림이다. 그것도 전투형 트라이림. 해적들이 해적질하는 주요 목적이 무엇일까? 바로 재물을 얻기 위해서다. 전투형 트라이림에 많은 양의 재물이 실려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전투형 갤리선은 잘 노리지 않는다.

해적들이라고 해서 바다에 뜬 모든 배를 노리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 놈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 그런 자들은 험한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침몰당한다.

“게다가 다섯 척이 아니로군.”

다섯 척의 배가 나타난 반대편 바다에서도 다시 다섯 척의 바이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현재 항해하는 항로 전방에도 해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건 저희를 기다렸다고 봐야겠군요.”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히스파니아로 항로를 변경하지 않는 한.”

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알겠습니다.”

“전속력!”

“전속력!!”

양 측면과 전방에서 자신들을 압박할 요량이니 일단 더 가속해서 포위를 그나마 옅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고 노잡이들이 그 박자에 맞춰 빠르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돛은 그 전부터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화로에 불을 피우고 전투를 준비해라!”

나디르는 우렁찬 목소리로 재차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화로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상대편 배에 불화살을 날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 모든 일든 분주하지만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그건 현재 배에 탄 이들이 해전에 익숙한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리고 주변을 주시하던 나디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함대를 이끌고 올 것을 그랬습니다.”

“그럼 나의 행로를 만방에 알리는 결과를 낳았겠지.”

“결국은 알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없군.”

최대한 기밀을 유지한 채 히스파니아를 떠났다. 정보가 새더라도 그 정보가 누군가에 닿을 때쯤엔 자신은 이미 이집트에 도착해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집트로 향하는 항로를 장악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트라이림이 점점 빠르게 가속함에 따라 바닷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테세우스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뒤로 슬쩍 쓸어내며 눈매를 좁혔다.

‘히스파니아로 유입되는 로마인들? 바에티카 점령으로 나에 대해 아는 자들이 제법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 패배는 마메르코스의 실책으로 빗어진 결과라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게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고. 그러니 나를 경계한다고는 하나 이렇게 직접적인 행동을 일으킬 정도의 동기를 가진 로마인은 많지 않아. 게다가 15척도 넘는 배를 동원한다? 내가 이집트로 향하는 시점을 정확히 노려서?’

일개인이 할 수 있는 공작의 수준이 아니다. 자신이 히스파니아를 떠나는 것을 아는 것도 힘들지만 해적들을 동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닌 말로 자! 이제 습격하러 가자! 이런다고 해적들이 움직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저들을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건 그만한 자금력도 바탕이 된다는 소리다.

‘내게 적의를 가졌고 정보력, 주변 장악력, 자금력을 모두 갖춘 자가 누가 있지?’

일단 히스파니아의 로마인들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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