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6화 (116/298)

# 116

116. 약육강식(弱肉强食).

116.

헤르미니우스는 입을 다물고 레피두스를 주시했다. 레피두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런 헤르미니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설마 에트루리아인을 끌어모았다고 해서 로마를 전복시킬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로마와 자웅을 겨룰만한,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로마의 공세를 버틸만한 세력은 키워냈을 거다. 하나 안타깝게도 로마의 대응이 너무 신속했다. 현재의 세력으로는 로마를 넘보기는커녕 레피두스가 이끌고 온 군대도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헤르미니우스는 말을 아꼈다.

“······.”

“왜 지금보다 시간이 더 주어지면 로마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너희는 로마를 넘어설 수 없어. 식량도 재물도 병력마저 모두 열세다. 게다가 너희의 연합이라는 건 참으로 연약하기 이를 데 없지. 툭 찌르면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너희의 현실이다. 당장 나만 해도 너희를 무찌를 방법이 서너 개는 넘게 떠오르는군.”

“정확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헤르미니우스가 날선 반응을 보이자 레피두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그토록 약해진 건 술라, 결국 술라의 작품이지. 그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수완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지지자들의 충성은 높이고 적이 될 자들은 약하게 만든다.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내 앞에서 지금 술라를 찬양하는 건가?”

“현실을 직시하라는 소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게 협조해라. 그러면 너희 에트루리아와 원한 관계에 얽매인 자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헤르미니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레피두스에게 말했다.

“······.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네게 협조한다고 하자. 하나 그 약속을 어떻게 믿지?”

“나를 믿어달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에게 넘기려는 그들은 나의 적이다. 어떻게든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건 너도 알 거다. 너희 손에 맡기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 헤르미니우스. 네게도 결코 나쁜 제안이 아닐 것이다. 너는 그들의 피를 손에 묻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지 않나?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신뢰를 운운하는 건 어떤 의미도 없다. 어차피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지 않나?”

틀린 말이 아니다. 로마의 품에 있을 때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저들을 적으로 돌리고 보니 로마의 영향력과 그 위세가 얼마나 큰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레피두스가 자신들과 손을 잡는다는 건 현재 로마의 주류 세력과 척을 진다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된다.

로마를 전복시킬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레피두스의 제안대로 일단 그에게 협력하고 그 후에 기회를 엿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따라서 헤르미니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에트루리아는 전폭적으로 네게 협조할 것이다.”

레피두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나의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한다. 대신 원로원의 늙다리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점 하나는 확실하게 약조하지.”

헤르미니우스는 말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피두스와 눈을 마주하며 내밀은 그의 팔을 강하게 맞잡았다. 레피두스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

고운 빛깔을 내고 있는 붉은 포도주를 힐끗 바라봤다. 그 옆으로는 다양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투욱

비스듬히 누워있던 테세우스는 탐스럽게 열린 포도 열매를 하나 따서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신맛과 단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었지만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하게 그의 미각을 자극했다. 그 대신 포도의 진한 향을 입안 가득 퍼트렸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렇다. 테세우스가 있는 곳은 화려한 연회장이었다. 히스파니아 지역이 안정됨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세르토리우스 세력 안에서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바에티카로 몰려온 상황이었다. 당연히 연회는 하루 이틀 벌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 규모도 상당했다.

그러나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세르토리우스도 있었다. 함께 있는 자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던 세르토리우스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비스듬히 누워있던 테세우스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사비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그 말씀은 혹여 저희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지요?”

세르토리우스 눈매를 좁히며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너는 전에 히스파니아를 서둘러 점령해야 하는 이유가 로마가 진격하기 전에 내부를 안정시켜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라고 했었다.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 내부의 에트루리아는 물론 로마 외부의 달마티아도 로마에 반역을 든 시점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의견을 내는 것이냐?”

“혹 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고 싶으신 겁니까?”

잠시 멈칫거리던 세르토리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로마로 진격을?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알다시피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는다.”

히스파니아 내의 로마 세력을 말소시키고 이곳이 세르토리우스의 왕국처럼 변했다고 해도 실제 점령한 지역은 동편 해안선과 남부 해안선의 지역에 불과하다. 내륙지역은 여전히 켈타이족이 득세하고 있고 그들을 토벌하는 건 로마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버거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면 힘의 공백으로 인해 애써 점령한 지역마저 잃을지 모르니 로마로 진격하고자 해도 진격할 수가 없다.

“로마가 반란에 휩싸인 건 아군에게 호재인 것은 맞습니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군은 그 호재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로마를 피로 물들일 야심을 품고 계신 것도 아닌 바에야.”

사비누스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들의 표정을 바라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확실히 자신만이 아니었다.

“아군이 직접적으로 군을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저들과 연계한다면 히스파니아로 이어질 로마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저들과 연합전선을 펼치면 로마를 압박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될 텐데 어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테세우스는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켠 다음 잔을 내려놓고 주변의 사람들을 훑어봤다.

“저들과 동일하게 로마를 적으로 두고 있으니 저들과 연계한다? 이점을 먼저 짚고 가야겠군요. 저들과 아군은 일단 추구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저들과 연계해서 아군이 얻을 이득이 미미합니다. 그 미미한 이득조차 연계하지 않더라도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에 불과하니 굳이 저들과 연계할 이유가 없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에트루리아는 에트루리아대로 달마티아는 달마티아대로 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에트루리아는 로마 본국에 속한 지역이고 달마티아는 속주에 속한 지역이지요. 어쨌든 두 지역의 위치가 어떠하든 간에 저들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성공하는 대로 문제가 됩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의 염려하는 바를 테세우스가 짚어내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흠. 확실히 내가 기억하는 로마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저들과 연계하여 로마를 이겨도 얻는 것은 수많은 또 다른 반란을 부추기는 행위밖에 되지 않을 테고 결국 아군은 그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쓰러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겁니다. 세계가 두려워하는 건 로마지 아군은 아니니 말입니다.”

“쌓아온 역사가 다르니 그건 당연한 말이다. 더 말해 보거라.”

“히스파니아는 또 하나의 로마가 될 것입니다. 술라의 치세 아래 고통받던 로마인들 가운데 이미 많은 수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로마인들이 아버지께 보호를 요청할 겁니다. 그건 그 어떤 무력과 병력보다도 훌륭한 자산이 됩니다. 마리우스라는 거두를 잃은 몸이 세르토리우스를 스스로 머리에 앉히려 할 것이니 말입니다.”

“흠. 네 말은 로마에 위협을 가하려는 반란군과 결탁한다면 그 영향력이 크게 감소할 것이다?”

“왜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에트루리아와 달마티아는 로마를 상대로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면 저들과 연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곳과 거리가 너무 멉니다. 아군이 로마에게 공격을 당하든 저들이 공격을 당하든 서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병력이나 물자를 지원할 수 없다면 저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뿐인데 저들을 돕자고 준비도 되지 않은 아군이 로마로 진격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게 아군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으흠.”

사비누스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침음을 흘리며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결국 아군은 로마를 도모하려고 했다는 악명만 쓰고 로마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 반드시 그렇게 선동하겠지요.”

“네 말은 마리우스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히스파니아를 향해 진격하려는 토벌군의 수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아마도 술라파의 인물이 될 겁니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를 막아낸다면 로마 내에서 술라파의 영향력이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종국에는 마리우스나 술라니 큰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닙니다.”

“토벌은 할 수 없으되 타협할 여지가 충분하니 로마는 아군과 타협하려 할 것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들 반란군과 결탁한다면 로마는 결코 아군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겁니다. 반란군과 결탁하는 건 아군과 로마 양측 모두를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는 결과밖에 낳지 않습니다. 이는 아군 스스로 타협의 여지를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과 연계해서 얻는 이점은 결국 로마의 혼란한 상황이 아군에게 득이 된다는 게 전부인데 고작 그것을 얻고자 이러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저들과 연계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이점입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 된다는 말이렷다?”

“예. 현 상황에서 아군이 신경 써야 할 것은 히스파니아로 오게 될 토벌군이고 그들을 이끌 자이겠지요.”

“음. 아마 정황상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에트루리아는 음.. 이번에 콘술 프라이오르에 오른 레피두스라는 자가 이끌게 되겠지. 좋아 그럼 이것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

“카르페타니 연맹을 정벌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켈타이 연맹들이 아군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하하하. 네가 있는데도 말이냐?”

세르토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든든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다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어쨌든 이미 그렇게 조치하셨겠지만 저들이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아군의 위용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군을 전방으로 배치해서 도발하는 족속은 처절하게 응징하도록 하겠다. 이리 당부를 하는 것을 보니 네 마음이 변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래서 언제 떠나려느냐?”

“허락하신다면 내일이나 모레쯤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이미 허락한 부분이니 더는 말을 않겠다. 하나 나는 네가 필요하다. 아군도 네가 필요하다. 그러니 반드시 무탈하게 다녀올 것을 내게 약조하거라.”

“약조. 드리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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