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3화 (113/298)

# 113

113. 뭐 이런 놈이?

113.

솟구치는 붉은 피를 보며 테세우스는 적의 목숨을 취할 수만 있다면 종일토록, 아니 일주일 내내라도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을 느꼈다.

‘확실히 이건..’

이건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항우와 리처드의 기억을 가진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온 것만큼이나 기묘한 일이다. 적의 목숨을 취하면 기력이 차오른다는 건 그만큼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단순히 기력뿐이라면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르나 이게 기력뿐인지 아니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기이한 현상이 동반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는 건 확실히 꺼림칙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살인을 피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게 여겨졌고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지내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별수 없다.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반역 자체를 억누르기 위해선 압도적인 신위로 저들의 전투 의지를 박살 낼 필요가 있다. 아군은 병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로마에 대한 충성을 무마시킬만한 거창한 명분을 지닌 것도 아니다. 로마인에게 세르토리우스는 반역자의 이미지만 강할 뿐이다.

그러니 당분간 찍소리도 내지 못하게 몰아붙일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바에티카 내에서도 피의 숙청이 이뤄져야 할 것인데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로마인을 죽이는 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내 욕심인지도 모르지만 이곳의 모든 적병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의 전투로 이곳의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같은 로마인을 죽이더라도 전장에서 적병을 죽이는 것은 큰 흠이 되지 않는다.

‘아니 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테세우스는 냉정한 눈으로 보아디케아를 길게 잡고 휘둘러 다가오는 적병의 몸을 베어냈다. 심지어 보아디케아의 무게가 꽤 나감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은 한 손만으로 이뤄졌다.

촤아아악

다시금 피와 살점이 전장에 흩뿌려졌다.

테세우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메르코스군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외려 마메르코스군이 테세우스를 포위하고 있는지 아니면 테세우스가 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테세우스를 향해 치명적인 공격이 계속해서 짓쳐 들었다. 물론 그 치명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한 표현일뿐, 테세우스에게는 조금도 치명적이지 않았다. 테세우스의 몸에 흔한 검상 하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테세우스는 냉철하게 전장의 흐름을 주시했다.

마메르코스의 후위는 밀집대형으로 집결 중이고 아군의 기병의 양익은 적 기병을 착실하게 줄여가며 적을 차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아직은 불안하다. 적의 숫자는 여전히 더 많고 마메르코스의 기병도 만만치 않은 듯 자신을 따라 이동하다가 양쪽으로 나눠진 에고르와 오넨구스의 기병들 모두 분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뛰어난 자들이라 승리를 거두긴 할 것이다.

그간 전쟁만 치르지 않았을 뿐이지 나름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해왔다. 병사의 훈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분전 중이기는 하나 아군의 기병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승리를 거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승리가 아군 전체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연환계로도 이어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적장, 마메르코스의 눈과 귀를 더 어지럽힐 필요가 있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주어 그것에 집중하게 만들 필요가 말이다.

적의 총사령관보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도 있던가? 더욱이 그자가 싸우게 될 적장의 아들이라면? 명예와 실리를 단번에 취할 수 있는 미끼다. 그런 날 것이 삼키기 좋게 자신의 품에서 날뛰고 있는데 왜 취하지 않겠는가?

테세우스의 군단병이 마메르코스군을 전방에서 압박하고 있으나 비등한 세를 유지하며 전투 중이고 적 기병과 아군의 기병 역시 호각지세에 가까운 상황, 잉여병력이라 할 수 있는 군단병으로 적의 군단장을 죽이고 후퇴한 후 재정렬해서 혼란에 휩싸인 적군을 섬멸하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으리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하나 아군의 기병이 적 기병을 압도하는 순간이 곧 온다. 그때가 되면!

테세우스는 말머리를 뒤틀며 다시금 창을 거세게 내질렀다.

*

마메르코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고작! 고작 한 놈이다! 고작 한 놈인데 왜 죽이질 못하냔 말이다!”

바렌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악하면서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신위 앞에 바렌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보시다시피 테세우스 저자의 무용은 이미 인간의 것을 넘어섰습니다. 누구도 저자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이이익! 놈을 죽여야 한다. 모르겠느냐? 놈을 이대로 놓아준다면!”

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장에서도 놈을 죽일 수 없다면 아군에 둘러싸인 놈은 대체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인가? 지금껏 테세우스를 무시했던 마메르코스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왜 1만의 병력만으로 바에티카를 견제하려 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인외지경에 달한 테세우스의 무위를 보고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그건 눈먼 봉사나 다름없었다.

바렌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테세우스 저자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정확하게 아군의 지휘관들을 요격하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테세우스 저자가 너무..”

틀린 말이 아니다. 저자의 손에 죽은 센튜리온의 숫자만 대체 몇 명이던가? 마치 아군의 진형을 유람이라도 하듯이 헤집으며 실전 지휘관들의 명줄을 끊어놓고 있었다. 백부장은 군단병의 꽃이자 근간이다. 저들이 없다면 지휘체계 자체가 무너진다. 혼자서 진형을 바꾸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아군의 근간마저 차근히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고작 한 놈. 고작 한 놈 때문에 이 무슨!! 이 무슨 치욕이란 말인가? 이이이익!”

수월하게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놈들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왔든 자신은 그것에 대응할 전략을 수립했고 무엇보다 저들은 대군에 유리한 평지를 전장으로 삼았다. 따라서 필승을 자신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사실상 2만에 달하는 병사가 검은 말에 올라탄 한 놈을 잡지 못해 쩔쩔매는 광경이라니······. 이 소문이 퍼지면 세간의 사람들은 자신을 또 얼마나 조롱할 것이란 말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장수였으면, 또 얼마나 훈련을 게을리했으면 한 명의 장수도 당해내지 못하는 군대를 양성했는지 등의 말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 면전에서 놈을 칭찬이라도 하는 것이냐? 죽여라! 놈도 사람인 이상 지칠 것이 아니냐?”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놈의 기세는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었다. 바렌스는 테세우스가 사람인지 아니면 마르스의 화신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람이라면 저럴 수가 없다.

방패째로 적을 베어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 일을 수시로 행하고 있었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마메르코스의 말대로 놈도 사람인 이상 저토록 강맹한 신위를 연달아 보였으면 막대한 힘과 체력이 소진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지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멀리서 지켜보는 자신조차 두려울 지경이었으니 그와 맞상대하고 있는 병사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명왕 플루토가 자신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끔찍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는 건 엄정한 군기와 군인의 명예 때문이리라. 그런 병사들에게 테세우스를 죽이라고 명해봤자 죽일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저 괴물 같은 작자가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실로 괴물 같은 자다. 신화 속의 영웅이 현세에 출현하여 전장에 선다면 저런 신위를 보여줄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적진을 마치 산보하듯이 돌아다니며 아군 지휘관의 목을 댕강 베어내니 어떤 지휘관인들 목숨을 사리고 싶지 않을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무위였다.

황당할 노릇이지만 현재로서는 저자를 사로잡을 방도가 없었다. 놈이 타고 있는 흑마라도 죽여서 기동력이라도 앗을 수 있다면 모를까? 놈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말에게 쏟아지는 공격도 모조리 걷어내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 기동력을 제거한 뒤 공성 무기인 발리스타나 투석기를 퍼부으면 죽일 수 있을지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지만 바렌스는 스스럼없이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하오나 당장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대로 상황이 고착화되면 군단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바에티카로 후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현재 전장에 테세우스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테세우스 한 사람이 그가 이끄는 군단보다 더한 존재감을 발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어쨌든 그의 군단 역시 무시할 계제가 아니었다.

“뭣이? 지금 한 놈 때문에 후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하지만 상황이······.”

황당하다는 건 본인도 알고 있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바에티카 시에서 마메르코스의 레가투스직을 철회시킬 것이다. 다시 말해 바에티카로 후퇴하는 순간, 그의 정치적 생명도 종결을 맞이한다.

“더 이상 허튼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너부터 참할 것이다.”

당연히 마메르코스가 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놈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죽여라! 반드시 죽여!”

마메르코스는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병사들의 죽음 따위 알게 뭔가? 이대로 후퇴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난다. 모든 것이! 그러니 네놈들의 살이 찢기고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든 간에 어쨌든 놈을 죽이란 말이다! 죽더라도 내 명을 수행하고 죽으란 말이다!

바렌스는 더 말을 않고 고개를 숙이다가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아진을 제 마음대로 활보하는 자가 어째서 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레가투스는 가만히 내버려 뒀단 말인가? 저 무위 저 기동력이라면 마메르코스를 노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바렌스는 급히 전장을 살폈다.

“아 아 아..”

그 즉시 바렌스의 입에서는 절망 어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군의 기병이······. 아군의 기병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중지세로 싸우던 아군의 기병이 갑자기 전멸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바에티카가 운용하는 기병은 대부분 용병이었다.

당연히 용병들은 군단병처럼 충성심이 강하지도 않고 전황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 용병들이 테세우스의 위용을 보았고 전장의 흐름을 파악했다면······.

끝. 끝이다. 아득한 절망감이 바렌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설마 이걸 노렸단 말인가? 대체 테세우스 저자는 뭐란 말인가?

*

적의 기병에 전투 도중에 도망치자 에고르와 오넨구스의 기병이 마메르코스군의 후미와 측면을 빠르게 점령했다. 그 움직에 발맞춰 전면의 호라티우스 역시 거세게 적을 몰아붙여 저들을 더욱 밀착되게 만들었다. 이미 후위의 마메르코스군은 테세우스를 포위한답시고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던 상황, 테세우스군이 거의 완벽하게 마메르코스군을 포위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노리던 계책이 착착 들어맞는 것을 확인한 테세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달렸다. 그 방향의 끝에는 적의 레가투스, 마메르코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테세우스의 질주에 이미 겁에 질려있던 군단병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방향에 있던 적병은 깜짝 놀라며 분분히 물러섰고 그 외의 방향에 있던 적병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마메르코스!!”

테세우스는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자들을 베어냈다. 아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단병도 얼마 없었다. 이미 압도당한 것이다. 오히려 그 살의 넘치는 고함에 오금이 저려 다리까지 떠는 자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오늘 테세우스가 보인 광경은 압도적일 정도로 잔혹했다.

생각해보라. 날아오는 투사체란 투사체는 모조리 걷어내는 무위와 방패마저 베어내는 괴력에 끝없이 전투를 치렀음에도 조금도 지치지 않은 괴물 같은 자가 달려온다면 그 누가 겁을 집어먹지 않겠는가? 현재 군단병이 보이는 모습은 이들의 담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건 마메르코스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전황이 어찌 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저 무지막지한 괴물 같은 놈이 이제는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오고 있었다.

“막아라! 놈을 막아! 놈을 죽이란 말이다!”

겁에 질린 마메르코스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조금 전 바렌스가 조언한 내용이 떠올랐다. 공적과 명예와 무슨 소용이랴? 수치와 멸시를 당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죽으면 다 소용없는 거다.

“바.. 바렌스! 나를 호위하라! 바에티카로! 바에티카로 후퇴한다.”

바렌스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늦었.. 너무 늦었습니다.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레가투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후퇴를 할 수 없다······.”

마메르코스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사색에 질렸다. 언제 전황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등하던 전황이 언제 이렇게까지 변했단 말인가? 이건 숫제 칸나에 전투의······. 저 밑바닥에서 맹렬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이럴 수는! 세르토리우스 본인도 아니고 그의 아들놈에게 이렇게 처참하게 당할 수는 없는 거다.

“으아아아아! 네놈! 네놈 죽여버리겠다.”

마메르코스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테세우스를 향해 말을 달렸다. 바렌스는 그를 막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애써 그를 막아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자신 역시 검을 뽑아 들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레가투스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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