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 뭐 이런 놈이?
112.
에고르는 이미 멀찌감치 사라진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뭐라 평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아닌 말로 방패를 들어 막아도 방패째로 단번에 양단해버리는 테세우스를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괴력을 가진 사내가 극에 달한 무예도 지니고 있으니 그를 상대하는 마메르코스군이 가여워질 정도였다.
“죽어라!”
에고르는 장검으로 자신에게 뭐라고 외치는 마메르코스 기병의 목을 찔렀다. 붉은 피가 자신의 검신을 타고 흥건하게 터져 나왔다.
마메르코스 기병은 꿰뚫린 자신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그의 육체는 뒤따라오던 다른 기병들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밟혀 으스러졌다.
우두두둑 우둑
히이잉
말은 섬세한 동물이고 내구성이 강한 동물도 아니다. 말발굽에 의해 이리저리 튕겨 나오던 시신에 다리를 다친 말 한 마리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아아아악!”
기병은 그 충격으로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불행하게도 머리부터 처박혔던지라 그의 목은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당연히 즉사였다.
에고르는 자신이 이끄는 기병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일단 성가시게 만드는 적 기병들부터 처리한다!”
이대로 테세우스를 뒤따르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들에겐 방패째로 적을 베어내는 괴력이 없다. 테세우스를 쫓고자 다시 방패벽을 형성한 저들의 진형 안으로 무리하게 진입하려고 한다면 군단병과 기병의 합동 공격으로 모조리 허무하게 몰살당할 수 있었다.
돌파력으로 몇 명의 방패병은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나 속도를 잃은 기병은 창병의 탐스러운 먹잇감이 될 뿐이다. 그렇게 돌파력을 잃은 상황에서 후미나 측면에서 적 기병에 들이닥친다면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하고 격파당하고 말 테니 일단은 마메르코스 기병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테세우스가 무시무시한 위용을 보이며 홀로 무작정 돌파를 한 탓에 따라붙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적 기병을 견제하느라 간격이 벌어진 탓도 있었다. 자신들은 테세우스가 아니다. 그는 짓쳐드는 적병을 파리 눌러 죽이듯이 죽이며 쇄도했지만 그를 쫓는 자신들은 기병들이나 군단병의 저항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테세우스가 홀로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지 적병이 오합지졸 군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테세우스와 아군의 간격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를 쫓아 진형으로 안으로 진입한 기병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 결과는 더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에고르는 벌써 꽤 먼 거리에서 적병을 참살하고 있는 테세우스를 힐끗 바라봤다. 그의 강맹한 창이 움직이면 적병은 처참하게 갈라져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었다. 분명 위험한 상황임에도 그 모습이 조금도 위태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위험한 것을 따지자면 테세우스보다 본인들의 안전이 더 위험했다. 무엇보다 테세우스가 에고르 본인은 물론 오넨구스 등에게 언급한 것이 있었다.
“서둘러 적 기병을 처리한다!”
일반적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다. 총사령관인 군단장이 적진 안에서 날뛰고 있는데 그를 돕기는커녕 적 기병이나 처리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에고르를 따르는 기병은 누구도 그 명령에 의아함을 품지 않았다. 일반적인 것을 따지자면 애초에 총사령관이 아군을 두고 홀로 적진에서 날뛰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도 두 눈과 두 귀가 있었다. 마르스와 헤르쿨레스의 위용을 합쳐놓은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레가투스를 자신들이 왜 걱정한단 말인가?
*
마메르코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군의 진형을 갈가리 찢어놓는 한 명의 장수를 바라봤다.
“저.. 저 미친놈은 대체 뭐야?”
그의 프레펙투스 바렌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곰처럼 막강한 힘과 표범보다 날렵한 몸놀림.. 무엇보다 착용한 갑주의 형태를 감안하면 테세우스가 분명합니다.”
테세우스는 군단장을 상징하는 갑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군도 아니고 로마군이 그것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테세우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놈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속은 건가? 현재 세르토리우스가 전투를 이끌고 있는 것이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레가투스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세르토리우스는 카르페타니 연맹을 공략 중인 것이 확실합니다.”
마메르코스는 신중한 자다. 사람을 보내 세르토리우스의 위치까지 확인한 뒤에 성밖으로 병력을 이끌고 나왔다. 적군의 상황을 읽고 승리의 확신까지 얻은 후에 움직였으니 누구도 마메르코스의 행보를 과한 처사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놈들은 1만에 달하는 병력이 전부인 것이 확실했고 저들을 이끄는 자는 세르토리우스가 아닌 것도 확실했다.
“그럼 저놈이 레가투스가 맞다는 소리인데······. 그나저나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군단장이 적진에 홀로 존재하는 건 이끌던 군단이 패배했을 때나 일어난다. 그런데 군단장 홀로 적진에서 날뛰고 있으니 당연히 그 사실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메르코스의 당혹감은 단순히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렌스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테세우스의 무용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방패째로 사람을 베어내는 괴력이라니..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여겼는데 그게 오히려 축소된 것일지는 저도 생각해 본..”
“미친!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방패째로 사람을?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마메르코스는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런 자라면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양자로 들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세르토리우스였어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르토리우스는 그런 이유로 테세우스를 양자로 들인 것도 아니고 마메르코스의 성향상 테세우스를 이용하면 이용했지 로마인도 아닌, 즉 정계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이방인 따위를 양자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렌스는 그러니까 자신이 테세우스를 얕잡아보면 곤란할 것 같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바렌스 본인조차 마메르코스의 명령이 현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명령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본인이 마메르코스의 자리에 있더라도 확인되지 않은 한 사람에 대한 소문따위로 군의 진퇴를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그게 당연한 거다.
그들이 잠깐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테세우스라는 적장은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며 아군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 번의 휘두름에 두세 명도 넘는 병사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으니 진형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누차 말하지만 방패마저도 베어내는 괴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포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테세우스는 말을 탄 채로 그야말로 종횡무진 마메르코스군의 진형을 찢어놓고 있었다.
“이런 미친!”
마메르코스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전술과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그게 마메르코스가 맞닥뜨린 엄연한 현실이었다.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아군의 진형은 반드시 붕괴될 것이고 전방에서 싸우고 적의 본대와 싸우고 있는 전열마저 완전히 흐트러질 것이다.
진형이 붕괴된다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군에 비해 근 두 배에 달하던 바로군은 그 진형을 잘못 잡았기에 5만 명을 죽이는 대참사를 낳고 말았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병사 역시 마찬가지. 정예병이라고는 하나 어느 정점에 다다르면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병사의 훈련 정도는 전쟁의 기본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따라서 양측 모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기본이 갖춰졌다면(한쪽이 굳이 정예병 수준이 아니더라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건 단연 지휘관의 지략이다. 진형을 어떻게 잡느냐 전술과 전략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병사의 훈련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진형이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병사의 측면에서만 살펴보자면 일반적으로 병사는 지휘관처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군이 승리하는지 패배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고로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혹 패전의 기세가 강하더라도 진형이 굳건하여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면 사기가 급격하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울 전우가 있다는 건 그만큼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 진형이 깨어진다면? 반드시 진형을 재정비한 후에 적과 교전해야 한다.
적을 농락할 무슨 기책을 써보겠다고 병사들에게 훈련도 되지 않은 진형, 그러니까 익숙하지도 않은 옷을 입혀 전장에 내보낸다면 더 볼 것도 없이 필패다. 기책을 부리기는커녕 제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다. 나머지는 기본이 갖춰진 다음에야 부차적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들이다. 진형은 군대를 유지하는 근간이나 다름없다.
그런 진형과 전술을 고작 한 명 때문에 바꾸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진형을 바꾸게 되면 그만큼 틈이 생기고 그 틈은 당연히 적에게 기회가 된다.
자연히 자신의 군대가 입게 될 피해가 그려진 마메르코스는 이를 갈며 바렌스에게 말했다.
“놈이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 분명하렷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놈이 대단하기는 하나 그래 봐야 한 놈이다. 수비진형으로 전방의 경계를 구축하고 남은 병력은 모두 놈을 죽이는 것에 주력한다. 제아무리 대단해도 지치고 상처 입으면 뒈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어디 맹수보다 강해서 맹수를 사냥하던가? 레가투스라는 작자가 제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적진에서 날뛰다니 애당초 레가투스의 자격이 없는 놈이다. 흥! 놈을 죽인 후 전열을 재정비해서 남은 적들을 격퇴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곧 마메르코스의 명령이 그의 군단에 전달되었다. 트럼펫과 호루라기 소리가 그의 군단 곳곳에 울려 퍼지자 비교적 넓게 골고루 분포해있던 마메르코스의 군단이 테세우스를 죽이기 위해 그를 중심으로 밀집대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외각에 있던 마메르코스의 군단은 여전히 테세우스의 군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병력 자체가 많았기에 갑자기 진형을 바꿨어도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후미에 있던 진형이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
물결무늬를 가진 검은 창이 독사의 아가리처럼 마메르코스 병사의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으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커허허헉!”
검은 창은 그의 갑주와 가슴뼈와 심장까지 단번에 가르고 요사스럽게 그 피를 허공에 흩뿌렸다.
테세우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창을 횡으로 빙글 돌려 그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목을 마저 수거했다.
그래. 수거였다. 일방적인 전투이자 학살에 불과했다.
마메르코스의 판단은 옳았다. 현 상황에서 적합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가 싸우려는 대상이 테세우스가 아니라 다른 자였다면 말이다.
테세우스는 차오르는 활력을 느꼈다.
확실하다. 적을 죽이면 자신의 기력이 차오른다. 황당할 노릇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거짓말이라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쐐에에엑
자신을 향해 빗발치는 화살을 바라봤다.
아군이 있음에도 저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화살을 날렸다. 어차피 아군은 스쿠툼의 벽을 이용해 화살을 방어해낼 테니까. 방어해내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이 괴물 같은 작자에게 상처 하나라도 더 입힐 수 있다면 말이다.
화살뿐만 아니라 필룸 역시 수시로 날아들었다. 근거리에 가까웠기에 대부분 위력이 더 강력한 무거운 필룸에 해당했다
테세우스는 보아디케아를 현란하게 휘둘러 전방과 후방에서 날아오는 투사체들을 모조리 걷어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적병을 베었음에도 테세우스 본인은 물론 그가 타고 있는 흑마조차 어떤 상처를 입지 않았다.
테세우스의 공격 범위에 들어온 적은 어김없이 목이 달아났고 원거리 무기들은 그의 범위 안으로 침투조차 하지 못했다.
창대가 나무로 이뤄졌다면 테세우스의 강력한 힘에 대한 반동으로 부숴져도 벌써 부숴졌겠지만 통짜 쇠로 이뤄진 보아디케아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든든하게 그 힘을 버텨내고 있었다.
두두두
테세우스의 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흑마는 쉴 새 없이 적진을 달렸다. 물론 전력질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공간도 없었다. 흑마는 테세우스가 길을 열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말의 동작은 크게 그 속도에 따라 평보, 속보, 구보, 습보로 구분되는데 현재의 걸음걸이는 최대 속력에 가까운 습보는 당연히 아니었고 구보보다 약간 빠른 속도였다.
테세우스는 그런 흑마 위에서 야차처럼 창을 연신 휘둘러 적병의 수급을 강탈했다.
뿌우우우우
그렇게 종횡무진으로 적병을 베어내는 테세우스의 귓가에 우렁찬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군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그 진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신을 포위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테세우스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저들의 움직임에 맞춰 적을 베고 또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