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10화 (110/298)

# 110

110. 새로운 시대.

110.

마메르코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저 멀리 바에티카 앞에 진 치고 있는 군대를 바라봤다. 히스파니아에 상륙한 후 무패행진을 연이어가고 있는 세르토리우스의 군대였다.

“알아봤느냐?”

“예. 현재 군을 이끌고 있는 자는 세르토리우스가 아니라 그의 아들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테세우스?”

마메르코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알지만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더욱이 군을 이끌 정도로 장성한 아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랬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저도 이번에 자세하게 조사하며 알게 되었지만 잘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그 이름을 아는 자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이름입니다.”

“하. 무슨 말이 그렇단 말인가? 그럼 이름도 모르는 자들에게 그 이름이 유명하겠나?”

“그러니까 제 말은..”

“더 설명할 필요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세르토리우스에게 아들이, 그것도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디 양자라도 들인 모양이지. 로마 출신이라면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으니 일단 로마 출신은 아닐 테고 히스파니아 내의 로마인은 전부 바에티카와 그 근방에 거주하고 있으니 로마인도 아닐 테지. 그럼에도 양자로 삼았다는 건 그만큼 뛰어나다는 소리일 테고 말이야.”

마메르코스는 로마인이 아니라면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바에티카에 머무르면서도 항상 로마, 로마를 부르짖고 로마인들과만 교류하는 사람이었다. 세르토리우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 양자의 일인들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건 말해야 한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세르토리우스 본인보다 더 무서운 장군이 현재 바에티카를 둘러싸고 있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마메르코스의 부관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대단한 무용과 지략을 가진 장수로서..”

“더 말할 것 없네. 그 명성이 무엇이든 부풀려진 헛소문에 불과할 테니 더 들을 필요도 없어. 이제야 그 이름을 들었다는 건 지금까지 대규모 전투의 지휘관으로 서본 적이 없다는 소리일 테고 아마도 이번 전투가 지휘관으로서 첫 전투를 치르는 셈이겠지. 소규모 전투에서 제법 공을 세우고 그 소문이 부풀려진 모양인데 국지전과 대회전은 차원이 다르다.”

마메르코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세르토리우스······. 나를 멸시한 대가는 네 아들놈과 네 병사들을 모조리 죽여서 갚아주겠다.”

메메르코스는 세르토리우스가 자신을 얕잡아보고 있다고 여겼고 이를 분하게 여겼다. 고작 1만의 군대로 바에티카를 점령하겠다고?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자는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보지도 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반면 자신은 2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정예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애송이 놈의 군대를 쳐부수기엔 충분하다고 여겼다.

“세르토리우스는 어디서 뭘 하는 거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얼마 전 카르페타니 연맹에서 지원을 요청한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카르페타니를 공략 중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카르페타니를 공략한 후 히베리아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동편 해안선을 모두 점령할 계획이 아닌가 싶습니다.”

“으흠. 이 자가?”

마메르코스는 세르토리우스가 왜 1만의 병력만으로 바에티카를 포위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바에티카를 봉쇄해놓고 자신은 그사이에 다른 주요지역을 모두 점령하겠다? 감히 나 마메르코스를 뭘로 보고!”

물론 그럴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그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에티카를 점령하기엔 이 정도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부관 바렌스는 급히 마메르코스에게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쉬이 판단할 부분은 아니..”

“쉬이 판단할 부분이 아니면? 봐라! 놈들이 바에티카 앞에 진지를 구축한 지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놈들이 무엇을 했지? 자네가 보기엔 저들이 공성 무기라도 준비하던가?”

“으흠.”

바렌스가 침음을 흘리자 마메르코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들은 사흘 동안 진중에서 처먹고 처자고 처싸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고작 1만 명의 군대가 두려워 2만 5천의 병사가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뭐 다 좋다. 그렇게 해서 피해를 줄이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어. 대신 아군이 그러는 사이 세르토리우스군은 아군의 우방이 되어줄 히베리아족들을 유린하고 있겠지. 만약 아군이 도우려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히베리아족은 높은 확률로 세르토리우스 쪽에 가담하게 될 터, 다시 말해 바에티카는 적으로만 둘러싸인다. 일이 그렇게 되면 그다음은 어찌 될 것 같나? 자네가 한번 말해보게.”

“······.”

바렌스는 마메르코스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이어지는 마메르코스의 말은 그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그때는 1만이 아니라 2만, 그 이상도 되는 세르토리우스군을 마주해야겠지. 아니 그런가?”

바렌스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마메르코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각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모두 소집하도록.”

프레펙투스, 바렌스는 마메르코스가 밀리툼(대대장, 대개 각 군단 6명)을 소집하는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지금까지처럼 수성이 목적이 아니라 성 밖으로 군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군을 재정비하기 위함이리라. 바렌스는 여전히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마메르코스의 명령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따라서 바렌스는 군례를 표한 뒤 명을 수행하고자 절도있게 몸을 돌려 세웠다.

*

이해할 수 없었다.

바에티카까지 빠르게 진격한 후, 이렇게 허송세월 시간과 물자만 축내는 이유를 말이다.

하루, 이틀은 병사들의 소진된 체력을 보강하느라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사흘, 나흘까지는 뭔가 새로운 책략을 구상 중이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 애써 넘겼다.

그러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바에티카 앞에 진지를 구축한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들의 레가투스는 어떤 움직임도 어떤 공격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푸테오라늄(고대로마 시멘트)을 사용해 건축한 바에티카의 성벽은 어지간한 바위보다도 훨씬 견고하다. 그런 성을 함락시키려면 공성 무기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레가투스는 심지어 공성 무기조차 조립하지 않았다. 재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레가투스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밀리툼, 프레펙투스, 센튜리온 등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병사들마저 레가투스의 지휘력에 대해 점차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무용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력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레가투스. 의중을 묻고 싶습니다.”

단단하고 육중한 체구를 지녔지만 이제는 테세우스보다 그 체구가 작아진 호라티우스가 입을 열었다.

작았던 소년이 이렇게 장대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테세우스의 달라진 모습에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센튜리온에 불과했던 자신의 지위도 상당히 많이 변하지 않았던가?

호라티우스는 프리무스 필루스(수석 백부장)에서 다시 진급하여 프레펙투스 카스트룸(기지 지휘관)에 올랐다. 프레펙투스 카스트룸은 로마 군단 내 보급, 훈련, 경계 등 기지 내 실무를 총괄하는 보직으로 막중한 책임이 부과되었고 주로 수석 백부장 출신이 임명되었다.

군단장에게 실무 측면에서 조언하는 참모장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군단 내에서 군단장, 대대장에 이은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중한 보직이었다.

호라티우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바에티카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고 적들이 밖으로 나올 것도 아니고 이렇게 봉쇄한다고 바에티카 내부의 물자가 고갈될 리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호라티우스는 테세우스의 신출귀몰한 귀계를 여러 번 겪었다.

따라서 이번 역시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을 추측하고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질문을 던지기만 해도 진중의 분위기가 어떠하다는 것을 눈치챌 위인이 테세우스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왜 의심이 되는가?”

“다른 자들은 그렇겠지요. 저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직접 겪은 것이 있는지라······. 저들도 이번에 알게 되겠지요.”

테세우스의 무용(武勇)도 대단하지만 그 계략은 그 무용조차 빛을 잃게 만든다. 저들도 알게 되리라.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훗날 착착 맞아떨어지는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을.

“이대로 몰아쳐도 바에티카를 얻을 수는 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더 유리한 전장에 설 기회가 있는데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 아진이 술렁거린다면 적진은 더할 터, 슬슬 때가 되었어.”

역시나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테세우스와 함께한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슬며시 치밀어오르는 전율을 뒤로 하고 호라티우스가 급히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저들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올 때가 말이야.”

“예?”

바에티카에서 공성하는 것이 저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 저들이 유리한 전장을 버리고 보다 불리한 전장으로 향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자세한 것은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말하도록 하지. 포룸 카스트룸에 모이라 이르도록!”

포름 카스트룸은 지휘관 막사 옆에 있는 지휙관 전략 회의실을 뜻한다.

“알겠습니다.”

호라티우스는 긴말하지 않고 군례를 취하며 막사를 떠났다.

*

푸르르륵 푸륵

테세우스는 흑마 위에서 보아디케아를 손에 들고 눈앞의 적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흑마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모양인지 연신 투레질하며 발을 서성거렸다.

다그닥 다그닥 히이이잉

그때 적진에서 달려온 전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애송이 테세우스는 들어라! 네놈들의 계략은 이제 완벽하게 간파되었으니 이대로 도망치면 목숨은 보전시켜주시겠다는 마메르코스님의 전언이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외쳤다.

“가서 전해라. 이대로 항복한다면 네놈들의 목숨은 내가 친히 보장해주겠다고.”

“흥!”

전령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다시 돌렸다. 그 모습에 몇몇 지휘관들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다. 총사령관 테세우스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령이 사라지자 테세우스는 잠시 말머리를 돌려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간 잘 쉬었느냐?”

“예!”

“물론입니다!”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오자 테세우스가 말했다.

“자. 이제 놈들의 목을 치러 가야 할 시간이다. 따르라!”

그 말에 호라티우스는 얼굴색이 변하며 테세우스를 만류하려고 들었다. 무용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총사령관이 전장의 일선에 서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테세우스의 명령에 반박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없었던 호라티우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

적진의 진형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는 것을 확인한 마메르코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 머저리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지에서 아군을 맞닥뜨려? 놈이 제법 뛰어난 전사인 것은 같으나 전략에는 무지한 멍청이나 다름없으니 오늘 이곳은 놈들의 피와 시체로 들끓겠구나.”

마메르코스는 테세우스의 진형을 보고 얼추 그 노림수를 알아차렸다. 한니발을 전설로 만들었던 칸나에 전투를 모르는 로마인도 있던가?

로마군 보병 65,000명과 기병 7,000명과 한니발 군 보병 35,000명과 기병 10,000명이 싸워서 로마군 5만 명이 몰살당하고 한니발군은 5,700명만 전사했다. 심지어 그 5,700명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용병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참혹한 결과를 자아낸 칸나에 전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찌 로마인이라 할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군. 어처구니없어. 나는 테렌티우스 바로가 아니고 네놈 역시 한니발 바르카가 아니다. 네 무지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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