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새로운 시대.
109.
폼페이우스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가진 자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있다. 술라 역시 자신보다 그를 더 높이고 더 인정했다. 철부지 애송이에 불과했던 폼페이우스에게 마그누스라는 칭호가 가당키나 한가?
크라수스는 그 점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물론 크라수스가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9년 정도 차이나는 동년배에 가깝다. 어쩌면 그 점이 그에게 더 큰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지지한 것은 어떤 정치적 이상이 카툴루스와 일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지지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술라가 반대했기 때문에 카툴루스를 추대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폼페이우스가 레피두스를 지지했기에 카툴루스를 지지했다. 물론 레피두스나 카툴루스 모두 집정관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두 집정관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콘술 프라이오르(Consul prior)에는 레피두스가 당선됐다. 자신이 지지한 카툴루스는 콘술 포스테리오르(Consul posterior)에 올랐으니 이번 선거마저도 폼페이우스에게 밀린 셈이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크라수스는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다.
“몸이 노곤할 터이니 같이 칼리다리움에서 몸을 더 덥히는 것이 어떻겠소?”
크라수스는 로마의 거물이나 다름없었다. 로마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폼페이우스보다 크라수스를 달가워한다.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를 크라수스, 본인보다 높이 사고 있으니 크라수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어쨌든 그런 크라수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넬 정도라면 일반적으로 그만한 지위와 명성을 갖추고 있는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확실히 그랬다. 지금 크라수스에게 온탕에 함께 하자고 제안한 자는 다름이 아니라 전임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기 때문이다.
크라수스는 말없이 바티아를 바라봤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킬리키아(Cilicia, 현 터키의 아다나 지역)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킬리키아는 로마에서 꽤 먼 지역이다. 당연히 임관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더 생각할 것도 없었지만 크라수스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 프로콘술 바티아님이 아니십니까? 자. 가시죠!”
폼페이우스보다 크라수스를 달가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크라수스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오만하고 무뚝뚝하며 군중을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폼페이우스와 달리 크라수스는 어떤 사람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을 곧잘 도왔다. 틀에 박히지 않은 그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간단히 폼페이우스가 전형적인 장군의 풍모를 지녔다면 크라수스는 전형적인 정치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전장에서 빛을 발하는 사내라면 크라수스는 로마에 있을 때 그 영향력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있으면 있을수록 도리어 자신의 명성을 깎아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고 영웅을 바란다. 그 영웅의 모습에 더 부합되는 사람은 크라수스가 아니라 폼페이우스였다.
다시 말해 크라수스를 더 선호하는 것과 별개로 지도자의 자리에 더 어울리는 자는 폼페이우스라고 은연중 낙점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촤아악
크라수스와 함께 온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던 바티아가 물을 끼얹어 얼굴의 땀을 씻어낸 후 입을 열었다.
“오지로 떠나는 저를 이리도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오지라니요. 킬리키아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번영을 위해서도 중요한 곳이니 그런 곳을 어떻게 오지로 폄훼할 수 있겠습니까? 허락하신다면 미약하게나마 저도 한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이를 말씀이십니까?”
“허허. 이거 여러모로 도움만 받는구려. 그나저나 레피두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얼마 전에도 프로프라에토로,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거세게 비판했소.”
“아 저도 들었습니다. 평민출신이 술라를 지지했다는 논조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크라수스는 레피두스가 전임법무관 브루투스를 연일 강하게 비판하는 원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술라께서 살아계셨다면 감히 그런 소리 따위는! 폼페이우스 그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피두스 같은 자를 지지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소이다. 생전에 술라께서 그토록 말렸거늘!”
“글쎄요. 저라고 폼페이우스의 내심을 알겠습니까? 다만 두 사람의 연계를 우려하는 것이라면 크게 심려치 않아도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시다시피 레피두스는 반 술라파의 우두머리입니다. 한데 술라의 국장(國葬)을 강력하게 주장한 자는 폼페이우스지요.”
“으흠..”
“레피두스는 공식 석상 이전에 술라의 국장에 반대하자고 제안했을 것이고 폼페이우스는 칼같이 끊었을 겁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저들의 관계는 그 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시작은 같을지 모르나 바라보는 곳이 다른데 어찌 계속 같이 걸을 수 있겠습니까?”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유수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 한미한 지방 출신이라 확실히 자신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레피두스를 지지한 것도 술라의 원로원 중심의 정책에 대한 반발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말인즉 유수한 가문 출신 위주로 정책을 집행하겠다는 뜻이었으니 술라가 갈가리 찢어놓다시피 한 평민의회의 힘을 다시 결집시키려는 레피두스와 뜻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와 레피두스 둘 사이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다르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크라수스는 언제고 둘 사이가 틀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이번에 술라의 장례식을 통해 빠르게 드러난 것이고.
“그렇다 할지라도 레피두스가 주요 지지자인 폼페이우스를 저버릴 것이라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거야 더 두고 보면 알 일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아나톨리아 남부 지역에 해적이 들끓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날이 그 세가 강성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원로원에서 바티아님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 토벌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토벌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오.”
강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바티아의 모습에 크라수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연회를 열까 고려 중인데 참석해주시겠습니까? 프로콘술의 출정식을 기념한다고 하면 아마도 꽤 유의미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크라수스는 이것을 빌미 삼아 여론을 더 장악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물이야 넘치는 게 재물이다.
“연회를 말이오? 제가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반드시.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크라수스의 연회는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화려했다. 본의야 어쨌든 그런 연회를 자신을 위해 펼친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비단 자신을 위한 연회가 아니더라도 크라수스의 연회에는 로마의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다.
크게 기뻐하는 바티아의 모습에 만면에 미소를 띤 크라수스는 물 밖으로 나가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이따 뵙지요.”
*
햇빛을 받아 거무튀튀한 정강이받이에 빛이 번뜩였다. 그 위로 로마 장군의 갑옷 형식을 완연하게 갖춰 입은 사내가 검은 말을 타고 자신 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병사들을 바라봤다.
푸르륵 푸륵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고요함 가운데 말 투레질 소리만 몇 번 울려 퍼질 뿐이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단련된 병사들의 사나운 시선이 일제히 로마 장군 갑옷을 입은 사내에게 쏠렸다. 강철같이 단단한 팔과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그의 육체는 그 자체로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바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자 바에티카 토벌을 명령받은 총사령관이었다.
테세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기에 저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의 신위를 본 사람보다 보지 못한 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테세우스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 역시 없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전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사나운 눈빛엔 승리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담겨있었다.
이윽고 테세우스는 자신의 창 보아디케아를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적에게는 죽음을! 아군에게는 승리를!”
그러자 병사들이 그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테세우스의 고함을 복명복창했다.
“와아아아아!”
“적에게 죽음을!”
“죽음을!”
“와아아아아!”
테세우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다시 소리쳤다.
“출정한다!”
그의 명령에 1만에 달하는 군단병, 즉 2개 군단에 해당하는 정예병이 일제히 바에티카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
햇살이 완연한 여름날 아침이다. 햇살이 따사롭다 못해 살갗이 뜨거울 정도였지만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 햇볕을 내리쬐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마치 최고급 향을 흠향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우우. 로마. 로마로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의 손을 피해 아시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카이사르가 다시금 로마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
항구 특유의 비린내와 생선 썩는 악취도 카이사르의 감흥을 막을 수 없었다. 로마 외곽 중의 외곽이라 할 수 있는 항구의 눈살찌푸려지는 악취마저 향기로울 줄 누가 알았으랴?
카이사르는 배에서 훌쩍 내려서며 어렴풋이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로마의 정경을 바라봤다.
로마에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포풀라레스(민중파)와 옵티마테스(귀족파)인데 카이사르는 공교롭게도 이 두 개의 파벌 모두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단연 민중파의 거두였다. 그의 처조카인 카이사르 역시 민중파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가장 오래된 파트리키 가문 태생으로 혈통 면에서는 술라도 비빌 수 없었다.
하나 술라의 정적 루키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술라의 지시를 단호하게 거부한 카이사르의 행동은 술라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대담하게 인지시켰다.
이에 술라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비롯해 아내의 지참금을 몰수하고 유피테르의 고위신관 신분인 플라멘 디알레스(Flamen Dialis)의 직위마저 박탈시킨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술라는 카이사르를 숙청하려 하지만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와 아우렐리우스 고타의 탄원, 로마에서 존경받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의 사면 요청, 카이사르의 혈통 배경을 무시하지 못하고 사면해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회만 되면 술라가 자신을 죽일 것을 알았기에 도주 생활을 그치지 않다가 술라가 죽은 지금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다. 유피테르 고위신관 신분을 얻게 한 것이 가이우스 마리우스라는 점이다. 카이사르는 15세에 가장이 되고 16세에 플라멘 디알레스를 얻었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직위이자 특별한 명예를 지닌 직위였지만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로마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항목에 따라 군인에 종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군대에 종사하는 것은 시민의 영예에 가까운 행위였고 정무관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었기에 군인으로 활약할 수 없다는 건 매우 큰 패널티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군인에 종사한다면 신전의 법에 따라 목숨을 잃거나 명예를 완전히 잃을 것이니 카이사르는 완벽한 족쇄를 찬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완벽한 혈통, 탁월한 지능과 야심, 매력적인 외모까지 갖춘 카이사르를 미리 알아보고 그에게 굴레를 씌우기 위해 유피테르 고위신관인 플라멘 디알레스 직위를 얻게 만든 셈이다.
전 시대의 두 거두가 모두 카이사르를 견제했고 한 사람의 굴레가 한 사람의 견제로 깨어졌으니 이 점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누르며 노예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즉시 나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왔음을 나의 친족들에게 알려라. 또한 변호사 개업을 위한 절차를 모두 알아오도록!”
“변호사 말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카이사르는 저 여름날의 태양보다도 뜨거운 눈빛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로마의 흐릿한 정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