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 증가하는 위협.
105. 증가하는 위협.
눈꺼풀은 계속해서 내려앉았고 온몸에 강철을 매달아 놓은 것마냥 천근만근 무거웠다.
털썩.
테세우스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흙으로 이뤄진 바닥은 딱딱했고 눅눅했다. 검은지 붉은지 알게 뭔가? 밤이라 어차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손바닥에 달라붙은 흙은 오늘따라 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인지. 흙뿐이랴? 축축하고도 서늘한 한기가 모든 것을 뒤덮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후우..”
유일하게 온기를 발하고 있는 모닥불을 바라봤다.
타닥타닥
나무가 불타오르며 내는 소음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다. 지나간 일을 회상한들 과거를 바꿀 수 있던가? 괜한 상념에 젖는 건 무용한 일이다. 비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명령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낼 수 없었다.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붓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기분이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간신히 붙잡고 있는 평정심마저 와르르 무너뜨리게 만들 테니 하등 쓸모없는 행동이다.
이 기분을 뭐라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명령이 과연 현명한 결정이었나? 루기 일가가 저들의 손에 멸절당했으니 똑같이 멸절시키는 것이 공의라 할 수 있다. 흔히 눈에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체주의적인 관점에서 봐도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의 다스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면 철저하게 처벌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지했을 테니까. 말 그대로 일벌백계다.
무엇보다 전장은 어차피 비정한 곳이다.
저들은 스스로 적의 자리에 섰다. 스스로의 약속마저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그 자리에 섰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타인을 압제하고 죽일 때는 하늘이 정한 어떤 법도 따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정하게 속이고 잔혹하고 살인을 즐기던 자들이 마침내 정당한 처벌의 자리에 섰을 때는 인정을 요구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그 인정이라는 것도 어찌 그리도 지극히 이기적이란 말인가? 루기의 손주들은 대체 왜 죽었나?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 그 일을 알고도 외면하고 동조하고 희생자를 매도하기까지 한 이들의 입에서 인정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그들의 말하는 인정은 자신들의 가족에게만 구현되는 어떤 특권인가? 구역질이 날 정도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정해진 법도다. 피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면 애초에 피를 뿌리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마찬가지로 모조리 죽이지 않고 예외를 두었다면 내부를 갉아먹는 암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원한과 예외라는 틈은 반드시 먼 훗날 나와 내 사람들에게 비수를 박을 것이다. 그런 후에 피눈물을 흘리며 내가 그때 모두 죽였어야 했다고 울부짖을 것인가? 비정한 적들의 아이에 의해 내 아이가 상처 입을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둔다면 그건 대체 누굴 위한 인정인가?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아군을 지키는 자이지 적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과연 현명한 명령이었는가?’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다. 수많은 정당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령에 의해 죽은 아이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모닥불의 불길이 나무를 태우고 결국엔 재만 남기듯이 테세우스의 마음엔 나날이 재만 쌓여갔다.
‘언제까지 내가 법이 될 수는 없다. 이건 너무 중하고 또 너무 무겁다. 이런 일이 또다시 쌓인다면 나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정당한 이유로 정당하게 집행하는 지도 판가름하지 못하겠고 설혹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이 무게는 너무 무겁다.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대안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명확하고 체계적인 법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에 불과하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공의라 생각한다. 이를 당연히 틀렸다고 볼 수 없지만 결국 모두 잃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아들을 잃은 이가 원수의 아들을 똑같이 죽게 만든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가? 남은 건 법뿐이고 살육뿐이다. 공의를 지키면서도 희생자를 위로할 수 있는 치밀한 체계의 법이 필요하다.
오늘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였다. 위로받을 희생자 모두가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가장 원초적이고 이 시대, 이 사회에서 가장 공감하기 쉬운 법대로 집행했다. 그 끝은 재 같은 마음만 남았지만..
어쨌든 법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존재해야 그 의의가 있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야 주객전도가 될 뿐이다.
“후우..”
그 어떤 전투보다 길고 사납고 무섭고 두려운 하루였다. 그 어떤 하루보다 무거운 하루였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에고르가 자신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에고르에게 말했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
“송구하지만 없습니다. 암살한 자들의 접점이라곤 외부에 출입했다는 접점 하나뿐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로마와 연관이 있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봤지만 로마와 연관이 있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로마와 연관된 이들이 아니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놓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별다른 증거를 포착하기 어려운지라 뭐라 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의 증거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송구하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이상 조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일단 보고를 드릴 생각으로..”
테세우스는 에고르의 대답에 불현듯 무스타파가 떠올랐다. 테세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무기를 착용하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볼 자가 있다.”
테세우스는 에고르와 함께 목이 잘려 육신만 남은 무스타파를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미 시체 썩는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에고르는 그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무스타파의 시신을 살폈다. 그건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스타파라고 했습니까? 실로 대단한 전사였겠군요.”
생전에 무시무시한 전사였다는 건 보는 즉시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전에 제아무리 대단했더라도 무스타파라는 전사는 현재 테세우스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머리도 없이 발가벗겨진 채로 말이다. 따라서 에고르는 물끄러미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만나본 자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전사였다. 나를 습격했고 회유되지 않을 자로 보여 죽이긴 했지만 어쨌든 도무지 그의 정체를 파악할 방도가 없어서 혹 그의 육체에 증거가 있지 않을까 싶어 보관 중이었다. 일이 여러 개 겹쳐 지금껏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에고르는 다시 무스타파의 시신에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문신도 없고 이렇다 할 특이점도 없습니다.”
에고르의 말대로 눈여겨 볼만한 특이점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방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신을 제게 보여주셨다는 건 이 자가 제가 암살한 자들과 연관이 있을 거라 보시는 겁니까?”
테세우스는 다시 한번 무스타파의 시신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세밀하게 살펴봐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다만 배의 검상을 발견한 에고르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내장도 이미 확인해보셨군요.”
“배를 갈라서 먹은 음식을 조사해봤지만 치스몬타니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건 치스몬타니 장로들에게 물자를 조달받았다는 증거가 되었지만 그들과 무스타파의 관계는 더 언급해봐야 무의미하고 어차피 치스몬타니와의 접점은 족장 루페뿐이라 할 수 있다. 한데 그는 내 손에 죽은 지 오래이니 이들과의 접점도 사라진 셈이다. 다만 족장 루페가 살아있었어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을 테니 치스몬타니와 무스타파의 관계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남은 건 결국 이름뿐이군요. 하지만 무스타파라는 이름조차 가명으로 썼을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자는 나를 죽일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걸 고려하면 무스타파라는 이름이 진명일지도 모르지. 가명이라 할지라도 가명으로 활동한 지점을 특정하고 파악해낼 수 있다면 이자에 대해 지금보다는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무스타파라.. 이집트식 이름인데. 혹 알아내신 사실이 있습니까?”
“없다.”
에고르는 침음을 흘리다가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흐음.. 그럼 제가 이집트로 가겠습니다.”
“글쎄다. 에고르 네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집트와 이곳의 기후나 환경은 천양지차다. 네가 아니라 누가 가더라도 조사를 바로 실행하지 못할뿐더러 이집트 내에 켈타이인이 돌아다닌다면 이집트의 심기를, 최악의 경우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과한 관심을 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켈타이인의 복색으로 이집트를 활보하지 않겠지만 이집트인이 그것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어리숙한 족속이라 보기는 어렵군. 확실하다면 모를까?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럼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모든 증거가 그러하지만 이러한 무형의 증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그 흔적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테세우스는 턱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켈타이 지역에서 왜 이집트식 이름으로 활동했는지가 중요하겠지. 진명이라면 별 이유가 없겠지만 가명이라면 굳이 이집트식 이름을 켈타이 지역에서 쓸 필요가 있었을까?”
“확실히.. 이집트인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이 켈타이 지역에서 이집트식 가명을 썼다면 뭔가 의도가 숨어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에고르.”
“예. 말씀하십시오.”
“그가 어떤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를 살해하려고 했지만 나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 최종목적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로마와의 연관성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지라도 그조차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런 것에 집중해봐야 이 자의 본래 목적에서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무스타파 이자가 치스몬타니 주변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나아가 켈타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조사해보라는 말씀이십니까?”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무스타파의 지시를 받던 전사들을 이미 심문해봤지만 치스몬타니와의 접점과 이 지역을 일을 파악하는 것이 전부였다.”
“음. 제가 한 번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다만 그들 외로 오피다니 연맹 각 부족의 장로들을 만나보도록. 무스타파의 이름이나 얼굴을 아는 자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름으로 말할 것을 요청한다면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대로 흥미로운 일이 발생하겠지.”
“알겠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어쩌면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할 수 있겠지도 모른다. 하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현재 시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에고르는 그제야 테세우스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무스타파도 무스타파지만 그의 시선은 오피다니 연맹을 향하고 있었다.
“으흠. 이해했습니다. 우선적으로 오피다니 연맹의 장로들이 스스로 물러날 수 있게끔 상황을 조장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무스타파의 정체에 대해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피를 원하신다면..”
“그럴 필요까진 없다.”
“그럼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 전에 식사나 같이하지.”
테세우스는 병사들에게 무스타파의 시신을 땅에 묻으라 명한 뒤 에고르와 함께 악취가 나는 이곳을 떠났다.
*
시간은 쏘아진 화살과 같고 유수와 같이 흐른다. 테세우스는 새로운 무역도시 이우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곳이 테세우스의 통치 아래 고작 1년 동안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수준까지 발전했다. 물론 규모 면에서 그러할 뿐, 여타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놀라운 발전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