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04화 (104/298)

# 104

104. 악독(惡毒).

104.

무슨 질문을 던질지 몰라 크게 긴장하고 있던 세넬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하기로 그는 성실하고 뛰어난 전사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저어되오나 사냥 중 왼쪽 다리를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치스몬타니 지역을 대표한 전사로 이우리아 해변에 섰을 겁니다.”

세넬의 대답에 테세우스가 주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 자의 말이 틀림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루이게치는 뛰어난 전사가 맞았습니다.”

“다시 묻겠다. 과부 루기의 며느리, 네우스는 어떤 사람이었나?”

세넬은 그 질문에 잠시 멈칫거리다가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지혜로워 루이게치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지혜롭다라. 묻겠다. 이 역시 틀림이 없는가?”

테세우스는 다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맞습니다.”

“지혜로운 것은 물론 용모도 아름다워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내가 없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세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다는군. 대답 잘 들었다.”

세넬은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대답했지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 예.”

테세우스는 세넬에게서 시선을 떼고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잘 들어보라. 과부의 품에서 자랐지만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난 전사가 마을의 으뜸가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에 이르렀다. 모두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들은 가정을 잘 꾸려 아이들을 낳고 홀몸인 어머니도 잘 모시며 살아갔다.”

루이게치와 네우스에 말하는 것임을 어찌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지만 모두가 입도 벙긋하지 않고 테세우스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하늘이 시기라도 한 것인지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자는 사냥 중 왼쪽 다리에 중한 상처를 입었다. 안타깝지만 한쪽 다리를 끊어내야 하는 심각한 상처였다. 그래서 과부의 품에서 강건하게 자라난 사내가 실의에 잠겨 생각했다. 아 이제 내가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해야겠다고. 어머니는 지금껏 강건하게 잘 살아오셨으니 앞으로도 잘 사실 것이라고. 그리고 으슥한 곳으로 가족을 불러들여 저들을 살해하고 결국 자살했다.”

테세우스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주변에서는 흔한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좌중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다시 묻겠다. 루이게치 그가 정말 성실하고 뛰어난 전사가 맞았나? 치스몬타니를 대표할 정도로 뛰어난 전사가 맞긴 했나? 치스몬타니의 뛰어난 전사들은 역경을 이기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택하는 나약한 자들밖에 존재하지 않는가?”

대답이 없는 저들을 향해 테세우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또 묻겠다. 네우스 그녀는 정녕 지혜로운 여인이 맞는가? 남편된 자가 어리석고 나약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막기는커녕 동조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숲으로 데리고 간 여인이 정녕 지혜로운 여인이 맞는가? 그게 아니라면 치스몬타니는 이 같은 여인들을 지혜로운 여인이라 칭하는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 하나 테세우스에게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테세우스는 냉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아무도 대답할 자가 없다면 너희의 이야기 말고 이제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권세 높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잘 배우고 잘 자란 청년이다. 그는 생각했다. 마음에서 으뜸가는 여인은 자신의 배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잠시 멈춘 테세우스는 주변을 오시하며 조소했다.

“그런데 웬걸? 시답지도 않은 과부의 아들 따위가 자신의 취해야 할 전리품을 앗아갔다. 도로 빼앗고 싶었지만 과부의 아들이 생각보다 대단했기 때문에 계략을 꾸몄다. 사냥 중에 일부러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서 죽여버리자.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는 청년은 그 계획을 그대로 시행했지만 안타깝게도 죽을 위기에서도 과부의 아들은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계획이 아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다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중한 상처를 입었으니까.”

테세우스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자 장로들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세넬은 당황하다 못해 사색이 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년은 상황을 살폈다. 어차피 적에게 간 전리품은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내 욕망이나 충족시켜야겠다. 청년에게 있어 최고의 상황은 전리품 스스로 자신의 품에 안기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다시 계책을 부렸다. 놈의 가정이 생필품을 조달받는 것이 어렵게끔 보이지 않게 손을 썼다. 놈의 아내가 생필품을 구걸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놈의 아내는 자력으로 생필품을 조달했다. 마치 놈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놈의 아내 역시 강인하고 현명했다.”

테세우스는 담담한 어조에서 다소 성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의 계략이 모두 뒤틀리자 화가 난 그는 그날도 숲으로 아이들과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간 여인을 간살하고 아이들까지 죽였다.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자 염려하여 그들을 찾으러 온 과부의 아들도 죽였다. 그런 뒤 시신을 불태우고 과부의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소문을 부추겼다. 과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울부짖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과부는 과부일 뿐이고 권력자는 권력자일 뿐이니까.”

테세우스는 두려움에 덜덜 떠는 세넬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세넬? 실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야. 더 들어볼 텐가?”

세넬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행한 행위를 아버지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식이라고 감싸고 돌았다. 도리어 아들과 며느리와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과부를 매도하고 미친년으로 만들었다.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기까진 또 너무 양심에 찔렸을 것이고. 크크크. 그런데 말이야. 황당하게도 자신보다 더한 권세와 힘을 가진 권력자가 마을로 찾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어리숙한 아들은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아버지는 벌어질 상황이 머릿속에 뻔히 그려졌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알만한 나이였으니까.”

테세우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엔 과부를 죽이려고 했다. 의심은 사겠지만 그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렇게 죽이려고 했는데 죽은 족장과 연관된 강대한 전사가 때마침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과부를 내버려 두면 그것을 이용해 내가 그 권력자 놈도 처리해줄 것이라고. 그럴 리는 없지만 혹 일이 잘못되어도 죽은 족장들과 연관된 것이라 잡아떼면 될 일 아니냐고 제안했다. 생각해보니 실로 괜찮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죽이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잠시 눈을 감으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맹세를 어길 것도, 그 후에 일어날 일들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잠시 눈만 감으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권력자가 언제고 자신들을 내칠 것이 분명했으니 그 전에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나은 제안도 드물었다. 실패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족장과 연관이 있던 전사는 실로 강대한 능력을 지닌 전사였으니까. 그런데 그 권력자 놈이 살아 돌아왔다.”

말을 마친 테세우스가 병사들에게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끌어내라!”

그러자 병사들이 사람들을 포박해서 끌고 광장으로 끌고 왔다.

“이..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아.. 아버지.”

세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과부는 죽었다. 증거는 사라진 지 오래고 증인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감춰지지 않았다.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진 자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봤다. 통찰력이 뛰어난 것인지 정보력이 뛰어난 것인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과 일말의 후회를 느꼈다. 아들이라고 감쌀 것이 아니라 쳐냈어야 했다. 팔이 썩었으면 잘라내야 했다. 팔이 중요하지 않은 자도 있던가? 하지만 썩은 팔을 잘라내지 않으면 온몸이 썩어들어가 결국 목숨을 잃게 만든다.

“세넬의 친족이란 친족은 모조리 끌어내라!”

추상같은 테세우스의 명령에 세넬은 눈을 번쩍 뜨고 애원했다.

“부.. 부디 저..저와 제 아들의 목숨으로만.. 부디..”

“불가. 악한 욕망과 계략에 억울한 한 가정이 그 대가 영원히 끊어졌다. 과부의 처절한 삶은 결국 비극으로 그 끝을 맞이했다. 희생당한 자들의 대는 영원히 끊어지고 그것을 계획하고 조장한 대는 이어진다? 내가 그것을 안 이상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너희 친족을 끊고 끊어도 저들의 대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모조리 끌어내라!”

병사들이 끌어낸 자들 가운데는 여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살려주세요!”

“흐흐흑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나요?”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루이게치와 네우스의 아이들을 살려내라.”

“부디! 저희를 벌하시되 아이만은!!”

테세우스는 세넬을 바라봤다.

“너는 이 비극이 닥치지 않게 만들 능력과 힘이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을 뒤늦게라도 수습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 때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넌 네 아들의 악행에 동조했다. 네 아들만 아들인가? 네 가족만 가족인가? 어찌 이리도 어리석고 악한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하아..’

테세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흘린 핏값이 이들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없이 고민하고 수없이 고뇌했다. 모두 베어야 하는가? 정녕 모두 베어야 하는가? 과연 자신의 판결이 옳은가?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인정 때문에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세넬은 자신의 아들의 잘못을 밝히 드러내고 죽였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세넬 일가의 죄는 그 일가에만 묻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이 일에 동참했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이들뿐이랴. 결국엔 치스몬타니 모두가 이 일에 동조한 셈이다.’

끝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모르겠다라고만 귀결되었다.

‘하아. 비정하다 말하고 잔혹하다고 말해도 별수 없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물론 맹세를 우회해서 이들은 또다시 나를 죽이려고 들었다. 이 일을 내 마음 가는 대로 넘어간다면 스스로 썩은 뿌리를 남겨두는 것과 같으리라. 단호해야 한다. 단호해야 하는데.. 하아’

테세우스는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서늘한 검처럼 빛나고 있었다.

‘······. 치스몬타니는 그 이름을 지우겠다.’

테세우스는 눈을 질끈 감고 담담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베어라!”

촤아아악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즉시 끌려 나온 모든 자들을 검으로 베었다. 당연히 그 가운데는 여자와 아이도 섞여 있었다. 광장에 또다시 피가 흩뿌려졌다.

“으아아아악!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세넬의 아들 야히갈이 원한에 찬 목소리로 테세우스에게 울부짖었다. 테세우스는 서늘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볼 것을 보았고 들을 것을 다 들었으니 다시는 보지 못하게 두 눈을 뽑고 다시는 듣지 못하게 귀를 자르고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그 혀를 뽑아라. 그런 후에 나무에 매달아 해골이 될 때까지 그 후에라도 저자의 악행을 알 수 있게끔 하라.”

끔찍한 처형을 조금의 망설임도 내뱉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병사들은 자신들 역시 저런 행위에 가담할 경우 어떤 벌을 받을지 뼛속까지 느낄 수 있었다. 상벌에 있어 인정은 그에게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아.. 알겠습니다.”

야히갈은 무시무시한 처형 방법에 계속해서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지만 병사들의 처형에 곧 처절한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세넬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루기가 세상을 떠날 때 느꼈던 심정이다. 너희는 너희 악행으로 그런 대가를 치른다지만 그녀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고통을 너희에게 느껴야 했는가?”

“으드득! 저주받을 놈! 나와 나의 아들만 죽이면 될 일 아닌가? 굳이 꼭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세넬은 테세우스의 말에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런가? 그럴지도.. 내 행동이 과했다면 그 핏값이 내 머리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제아무리 핑계를 대도 너희 스스로는 잘 알 것이 아닌가? 또다시 맹세를 어겼음을! 결국 너희는 맹세를 두 번이나 어긴 셈이니 오늘 나의 손속이 비정하다 말할 자격이 없다. 그건 너희가 판단할 부분이 아니다.”

테세우스는 담담하게 그렇게 응수한 다음 병사들에게 말했다.

“세넬과 모든 장로들의 목을 베어라!”

“알겠습니다!”

이윽고 그들의 목마저 모조리 베어지자 테세우스가 다소 지친 표정으로 일갈했다.

“앞으로 치스몬타니 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 지역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다른 부족으로 향하라. 치스몬타니 부족은 앞으로 없다. 모두 떠나라. 이를 어기는 자는 모두 노예로 삼아버리거나 죽일 것이다. 나의 인내를 더 이상 시험하지 말도록!”

무시무시한 것을 보았기에 누구도 감히 테세우스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테세우스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그런 그를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