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92화 (92/298)

# 92

92. 순리대로.

92.

에고르는 서늘한 눈빛으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는 자를 바라봤다.

“어째서 밀고했지? 루시타니아를 위협하는 주적이 바로 카르페타니 연맹인데 대체 왜?”

중년 사내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죽여라.”

사내의 단호한 태도에 에고르는 그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에고르는 검을 그의 뒷덜미에 깊숙이 박아넣었다가 뽑았다.

푸우욱

털썩

뒷덜미가 꿰뚫린 사내는 흔한 비명 하나 없이 절명했다.

에고르는 무심한 눈으로 그 시신을 바라보다가 그의 이력을 떠올렸다. 부족을 떠나 용병으로 활약했던 자들이다. 아라비, 란시스, 엘보코리에 이어 자신의 손에 죽은 이게디타니 족장까지. 모두 외부에서 활약하고 부족에 정착한 이들이다.

입안이 썼다. 하지만 이 자를 마지막으로 죽일 자들은 대부분 처리한 셈이다. 뿌리를 제거했으니 그 줄기는 자연히 마를 터,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단순히 의심만으로 이들을 암살한 것이 아니다. 함께한 전사들을 동원해 증거를 수집하고 그 가운데 피도 흘리며 저들의 정체를 확정했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이 찝찝함의 정체는 아마 저들이 밀고한 이유를 마지막까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주모자들을 처리했으니 테세우스의 날카로운 칼이 루시타니아를 난도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난도질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테세우스라면 그 원인까지 철저하게 파악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다. 때론 알고도 모른 척 덮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니.. 그래서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리라.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던 에고르는 함께한 전사들에게 짧게 말했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피다니 연맹을 굴복시킨 세르토리우스는 그 기세 그대로 루시타니아 연맹에 들어섰다. 정복전을 펼치고자 들어선 것도 아니고 저들 스스로 신종(臣從)하고자 했기에 루시타니아 연맹은 세르토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했다.

겉으로 환영하는 것과는 별개로 루시타니아의 지도층은 그를 크게 두려워했다. 오피다니 연맹을 굴복시킨 것도 그렇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주동자들만 정확하게 암살한 일은 세르토리우스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자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따르는 자는 목숨과 지위 모든 것을 보장하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냉혹한 죽음만이 따를 뿐이라고 아주 극명하게 보여줬다.

이에 루시타니아 연맹의 아라비, 아라비젠시스, 코엘라니, 인터람니엔시스, 란시스, 트란쿠스다니, 오세렌시스, 메이두브리젠시스, 패수리, 칼론티엔스, 코렌시스, 엘보코리, 이게디타니, 타포리, 패수리, 타루레스, 베아미니코리 17개 부족은 모두 그에게 충성맹세를 바쳤다.

히스파니아에 상륙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루시타니아, 오피다니 지역까지 모두 장악한 셈이다.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무혈입성이었다. 비공식적으로는 루시타니아 족장 4명과 그를 따르던 자들이 죽어 나갔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테세우스의 허락하에 이뤄진 에고르의 작품이었다.

세르토리우스 앞에는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즐비했다. 이곳이 산지라 척박하다고는 말하나 그건 같은 히스파니아를 기준으로 척박한 것이고 기후 자체가 온화하기에 사막과 같은 척박함에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 가득했다.

히스파니아 지역은 만다린이나 오렌지나 레몬 등이 유명한 곳이긴 하나 오렌지와 만다린은 인도가 원산지이고 레몬은 히말라야였기에 이는 후대에 중국 등을 통해 이곳에 전해져 새로운 품종으로 개발된다.

따라서 앞서 거론한 과일은 현재 없었다. 의외로 레몬이 존재하긴 했는데 자세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고 그 수량이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거래를 통해 얻은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그 대신 올리브 열매나 포도를 비롯한 지역 특유의 과일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고 다양한 고기들 역시 상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히스파니아 포도의 주산지는 히베리아족들이 기거하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곳이라고 포도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법 풍성하게 쌓여있었다. 올리브 열매 역시 투르둘리 지역이 주산지였지만 같은 이유였다.

어쨌든 축제의 계절이 아닌가? 모든 물산이 풍부한 시기라 지금의 광경만으로는 루시타니아 지역이 척박한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로마의 화려하고 웅장한 거리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지역 특색에 맞게 목조건물들이 골고루 들어서 있었고 지역 주민들의 안색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 루시타니아를 손에 거머쥔 세르토리우스 앞에는 피로 물든 갑옷을 벗어 던지고 크림색 토가를 걸친 테세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작 2주도 되지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을 해냈단 말입니까?”

역시 토가를 걸친 사비누스가 테세우스의 말을 듣다가 먹고 있던 올리브 열매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반문했다.

테세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비누스가 다시 말했다.

“허어.. 켈티시와 투르둘리 연맹을 반목하게 하고 다시 그들을 카르페타니와 반목하게 만들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분열 위기에 처한 베토네스를 카르페타니의 위협 아래 일시적으로나마 단결시켜 카르페타니에 대항하게 만들었다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테세우스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이걸 누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간 테세우스가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지 않았다면 허풍을 늘어놓고 있다고 일축했을 것이다. 홀로 히스파니아로 훌쩍 떠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거기에 이런 엄청난 성과를 이뤄냈다고? 이곳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아군을 더욱 강맹하게 만들 시간을 벌은 셈이다. 금보다 귀한 시간을 말이다.

세르토리우스는 사비누스의 감탄을 뒤로하고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3천 명의 켈타이족은 그래서 어찌할 셈이더냐?”

“제게 대장장이일을 알려줬던 켈타이인을 기억하십니까?”

자신의 아들과 연관된 사람이다. 그것도 1년간 계속해서 만남을 가졌던 사람을 어찌 모르겠는가?

“벨리키. 그자를 말하는 것이냐?”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들 솔리치족은 그의 부족이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거두고 싶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네 뜻대로 하라. 단 하나만 묻겠다.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것이 정 때문이냐? 아니면 약조 때문이냐?”

세르토리우스는 벨리키와의 정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솔리치족과 어떤 약조를 했기 때문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둘 다 아닙니다. 이제 벨리키에게나 저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빚진 것이 없습니다. 모두 갚았습니다.”

“그럼 왜?”

“저에게는 물론 아버지께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으흠..”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미한 미소를 짓다가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네게 중임을 맡기는 것이 아직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고심했다만 방금 네 대답으로 확실히 알았다. 이곳이 로마는 아니나 어디서건 네 지지세력을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다. 무력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수단이지만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끝은 검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검은 언제고 네 가슴을 찌르겠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검은 검집에 보호되고 있을 때 가장 날카롭다. 뼈와 살을 끊어내고 나면 무뎌지기 마련이지. 그러니 내치지 말고 품을 수 있다면 품어라. 그러면 저들은 네 날카로운 검을 보호하는 검집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언젠가 네게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관계를 로마에서 클리엔테스라고 부른다. 클리엔테스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니 네게 오피다니 연맹을 맡겨도 되겠어.”

로마 공화정 사회는 파트로누스(patrónus, 보호자) 클리엔스(clĭens, 피호민)로 구성되었다. 천한 일을 하는 자들은 그 체계에서 제외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계는 로마 사회에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피호민은 보호자에게 각종 보호를 받았으며 특히 법정에서 변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보호자가 수년 동안 어떤 도움도 요구하지 않다가 투표, 로비활동, 특별임무를 맡기기도 했는데 피호민은 이러한 요구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했다. 이러한 관계를 클리엔테스(clientes)라고 부른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는 체계는 아니나 강력한 명예와 원칙으로 기반으로 했기에 죽도록 증오하던 관계라도 클리엔테스를 맺으면 클리엔스는 파트로누스에게 모든 충성을 바쳐야 했다. 명예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디그니타스를 지키기 위해 처자식도 죽이기까지 하는 로마인에게 클리엔테스는 결코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로마인도 아닌 솔리치족에게 이 같은 충성을 바라고 클리엔테스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보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 테세우스는 이미 완성된 전사다. 지금보다 더 강력해지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검을 잘 다루는 자는 결국 전사로서 생을 마감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로마는 혼자 검을 잘 다룬다고 득세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켈타이 사회라면 또 모르겠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로마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지세력을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건 단순히 잘 싸운다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무조건 싸울 생각만 하고 있는 전사의 사고관으로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타협해야 하고 무조건적인 손해를 무한히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한계가 명확하다. 검으로 로마를 친다고?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로마인들 누구도 그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그리하고자 한다면 홀로 로마를 다시 세워야 하리라.

세르토리우스 자신이 로마의 집정관인 술라와 싸우고 있다고 해서 로마를 검으로 치려는 것이 아니다. 언제고 자신은. 아니 반드시 로마로 돌아간다.

그때가 된다면 검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집에 집어넣어야 할 시기가 말이다. 심지어 그 검집조차 로마 내에선 함부로 착용할 수 없게 되어있지 않던가?

세르토리우스는 그때를 바라보고 테세우스에게 조언한 것이었다. 로마인의 명예를 갖지 않은 저들에게서도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클리엔테스의 이점을 한껏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테세우스는 갑작스런 제안에 침묵을 지키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오피다니 지역을 말입니까?”

“그렇다. 계획과 다르게 오피다니 연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너를 믿고 내버려 두었다.”

테세우스는 그 말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세르토리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르토리우스가 한참 전에 이 지역을 자신에게 맡기려고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혹 그래서 오피다니 연맹을 쓸어버리려고 하셨던 겁니까?”

“그건 작은 이유일 뿐이다. 왜 저들을 쓸어버리려고 했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니 그 점은 네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노회한 켈타이족에게 이리저리 휩쓸릴 걱정도 하긴 했다는 뜻이리라. 이 또한 불신이라면 불신이지만 염려에 가까웠고 그 염려를 다시 신뢰로 바꾸었으니 테세우스는 강렬한 눈빛으로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버지의 믿음에 부응토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세르토리우스가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상관없다. 저들이 너로 하여금 내 믿음을 져버리게 한다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테세우스는 그 말에 세르토리우스가 무엇을 바라보고 오피다니 연맹의 항복을 받아들였는지 깨달았다. 본래 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저들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바로 자신 때문임을 말이다. 자신이 오피다니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면 시킬 수 있는 대로, 그럴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는 대로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이건 뭐.. 스케일이..’

다소 황당한 심정으로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을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테세우스의 단호한 대답에 세르토리우스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가 담긴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이만하면 되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길 시간이다. 마셔라!”

세르토리우스를 오랫동안 따랐던 사비누스는 그가 오늘 크게 기뻐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존경하는 상관이 기뻐하는 날이니 자신도 즐거웠고 이에 세르토리우스의 즐거움인 테세우스를 경탄의 눈으로 재차 바라봤다.

이미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라 아군은 매우 빠르게 출발했다. 따라서 제아무리 테세우스라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거늘 고작 2주 만에 이런 성과라니..

따라서 사비누스는 세르토리우스의 결정이 조금도 과하거나 성급한 결정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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