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 전무(全無).
89.
하늘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화살이나 투창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니치 전사들을 뒤덮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모니치 전사가 밀집한 곳을 향해 화망을 형성해 화살을 날렸으니 모니치 전사들은 화살과 투창에 의해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다. 활을 잘 쏘고 못 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날리기만 해도 맞출 수 있는 외통수에 몰아넣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퉁 투퉁
쐐에에에엑 쐐에에엑
“크아아아악!”
“아아악!”
테세우스와 50명의 전사들은 그저 커다란 방패 안에 몸을 숨기고 모니치족의 비명이 전장을 가득 메우길 기다렸다.
휘이이익 휘이익
전장에 두세 차례의 화살 폭풍이 지나간 후 솔리치족의 화살은 완전히 동이 나버렸다. 고작 이백여 명이 두어 번 날리고 동이 날 정도로 화살이 부족했다는 소리다. 나머지 인원들은 모니치족을 압박하기 위해 둘러싼 것에 불과했다. 물론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대부분의 모니치 전사는 그 광경에 크게 당황한 나머지 막을 수 있는 화살조차 막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솔리치 전사 삼백에 루시타니아 전사 백 명, 거기에 테세우스라면 전면전을 펼쳐도 이겼을 것이다. 홀로 4백여 명의 메투리치 전사를 쳐죽인 테세우스가 아닌가?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를 얻었을 것이다. 솔리치 전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크게 약해져 있는 상황이다. 에고르의 전사들 역시 뛰어난 전사들이지만 지쳐있긴 매한가지. 이런 상황에 무작정 전면전을 치르면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테세우스가 저들을 상대할만한 능력과 힘이 충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테세우스로 하여금 전투를 쉽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지는 않는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검과 검을 맞대며 메투리치 전사들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후에야 저들을 죽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살의를 가진 전사들이었다. 이뤄진 결과를 떠나 그 과정이 험난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면전밖에 방법이 없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하책에 불과했다. 그래서 모니치족을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전장으로 유인했다.
늙은 전사들을 주축으로 전투의 일선에 설 수 없는 자들로 이뤄진 이백여 명의 궁수대가 마지막 화살을 날렸을 때 준비하고 있던 솔리치 전사들과 에고르의 루시타니아 전사들이 일제히 모니치족을 향해 쇄도했다. 입구에 해당하는 부분을 차단하고 몰려왔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많은 수가 죽기는 했지만 아직 백 명도 족히 넘는 모니치 전사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에 맞고 땅에 쓰러지긴 했지만 죽지 않은 전사들도 부지기수였다.
“와아아아아!”
모르칸트는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거대한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솔리치 전사를 바라봤다. 특히 오연하게 서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테세우스가 그에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으드드득.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들은 죽이고 말리라.
모르칸트는 자신의 도끼를 쥐고 함성을 지르며 저들을 향해 달렸다. 이에 살아남은 모니치족 전사들 역시 테세우스 등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허리춤에 있던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고 쇄도하는 저들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자 오넨구스와 50명의 솔리치 전사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그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두 다리가 쉴새 없이 움직이며 수북하니 길게 자란 수풀을 헤집고 지나갔다.
쐐에에엑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투창을 빗겨 피하며 빙글 돌며 그 투창을 잡아채 자신에게 투창을 던진 모니치 전사에게 되돌려줬다.
모니치 전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왼눈에 투창이 꽂혀 절명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광경은 시리도록 뾰족한 투창의 창첨(槍尖)이었다.
“우아아아!”
이에 주변의 모니치 전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테세우스를 공격했지만 테세우스는 너무나 간단하게 저들의 목을 쳐버리고 모르칸트를 향해 달렸다. 적장을 죽일 요량이었다. 모르칸트 역시 그런 테세우스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야!”
모르칸트는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테세우스에게 양손의 도끼를 휘둘렀다. 어찌나 재빠른지 그 도끼에 테세우스의 몸이 당장에라도 갈가리 찢겨나갈 것처럼 보였다. 양팔에 곤두선 힘줄은 그가 얼마나 강한 힘으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챙 채챙
하지만 테세우스의 힘과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테세우스는 모르칸트의 도끼를 양손의 검으로 모조리 걷어낸 다음 곧바로 모르칸트의 허리와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베어냈다.
사아악
차아악
“크허헉!”
허리와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모르칸트는 저도 모르게 균형이 무너져 내렸다. 테세우스는 모르칸트의 주변을 빠르고 돌아 역수로 잡은 검을 그의 뒷목에 사정없이 박아넣었다.
푸우욱
피륙을 가르는 섬뜩한 감각이 테세우스의 손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박아넣은 검을 옆으로 갈라버렸다. 모르칸트의 목은 반 이상이나 끊어졌고 잘려나간 상처에선 피가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촤아아악
모르칸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머리가 옆으로 기괴하게 꺾이더니 줄 끊어진 인형마냥 뒤로 넘어갔다.
털썩
모르칸트가 일 합조차 제대로 겨루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모습에 살아남은 모니치족은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여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누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와아아아아!”
*
전장 정리가 한창이었다. 살해당한 모니치 전사들의 시체가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전사자는?”
오넨구스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중상을 입은 자가 더러 있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전무... 전무합니다.”
“확실하게 처리해라. 혹여라도 살아남는 자가 있어선 곤란하다. 그 후에 칼루리족이 한 것처럼 그 증거를 은밀하게 남겨두도록.”
“알겠습니다.”
“에고르!”
“하명하십시오.”
“즉시 전사들을 이끌고 모니치족 진형으로 이동하라. 남은 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전리품을 챙겨와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누아란.”
장로들 중 한 사람인 누아란은 극도의 존경심을 보이며 몸을 낮췄다.
“예. 부족장님.”
“이제 나는 루시타니아 지역으로 향할 것이다.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부족을 키우는 것도 이제 너희 솔리치족이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 루시타니아 지방으로 갈 것인지 아닌지도 너희 스스로 결정해라.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물론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지킬 것이다. 메투리치족과 모니치족은 앞으로 그 이름을 완전히 지워버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너희의 족장을 다시 뽑아라.”
“혹. 저희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급히 엎드리며 말하는 누아란의 모습에 다른 장로들 역시 엎드리며 외쳤다.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려고 하십니까?”
“목숨으로 따를 것이니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테세우스는 그들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장로 카오므가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루시타니아인과 내가 어떤 관계냐고 물었던 것을 말이다.”
그 말에 누아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그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금 해주겠다.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바로 세르토리우스 장군의 아들이다.”
당시에 밝히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에 밝혔다면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둘 사이에 거짓이 있어선 곤란하다. 그 거짓은 언젠가 관계에 파탄을 가져올 테니까.
물론 거짓을 말한 건 아니지만 관계를 새로이 정립할 시점이라 여긴 테세우스는 이들과의 관계를 끊거나 보다 명확하게 하고자 그 사실을 알려줬다.
누아란은 순간 당황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내용이 떠올랐다. 루시타니아인들이 세르토리우스에게 종신하고자 사람을 보냈다는 소문 말이다. 낭설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세르토리우스? 세르토리우스라면 바에티카를 다스렸던 로마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 로마군을 해전으로 크게 무찌른 그 세르토리우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누아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군이 히스파니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정말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면, 또한 루시타니아인들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루시타니아인과의 관계가 얼추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군은 히스파니아에 상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인 자가 히스파니아에 혈혈단신으로 상륙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에 대해 내가 당신들을 납득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군.”
냉정한 테세우스의 발언에 누아란은 급히 그에게 말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를 가든 저희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누아란 장로의 말대로 족장께서 어떤 이름이고 어떤 신분이고 어떤 민족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숨으로 따를 것이니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 부족 역시 받아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나는 너희에게 영토를 준다 약속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를 따르겠다는 말인가?”
누아란이 다시 말을 꺼냈다.
“먼저는 보아디케아와의 인연을 위해, 둘째는 토우토릭스와의 약속을 위해 싸우신 것이 아니신지요?”
테세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란이 말을 이었다.
“족장께서 무슨 의도로 이곳까지 오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족장님께서 신의가 있으신 분이라는 건 저 누아란도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목숨으로 따르면 저희 부족을 절망 가운데 죽게 내버려 두실 분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족장께서 카오므 장로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누군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족장께서 누구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족장께서 저희 부족을 살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만이 저희에게 중요할 뿐입니다. 목숨으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거둬주십시오.”
“거둬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족장 외에 감히 누가 족장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저들의 간청에 벨리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우토릭스의 간절한 부탁이 다시금 떠올랐다. 삼천 명에 달하는 이들이지만 테세우스에게 큰 힘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떠나고자 한다면 미련 없이 끊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품는다.
“좋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대표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너희의 대표를 다시 세워라. 말했듯이 족장은 다시 새로이 선출하도록 해라.”
“으흠. 그런 것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계획한 일들이 맞아떨어진다면 베토네스 연맹에 대한 카르페타니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될 것이다. 솔리치족을 추격하던 메투리치족과 모니치족이 모두 죽었으니 베토네스 연맹의 개입을 의심할 테고. 이곳에 남은 칼루리족의 흔적과 메투리치족에 대한 공격은 그 불씨를 크게 키울 수 있겠지. 그러니 솔리치족을 더는 신경 쓰지 못할 터, 이만하면 충분하다. 베토네스 연맹을 이용하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니 서둘러 후퇴하는 것이 상책이다. 아버지께서 서둘러 움직이셨다면 오피다니 연맹을 치러 이동 중이시겠지. 아니라고 해도.. 후우.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도록 하고.’
“에고르가 전리품을 가지고 복귀하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루시타니아 지역으로 향한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