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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신의 기억-88화 (88/298)

# 88

88. 전무(全無).

88. 전무(全無).

솔리치족을 치기로 결정했지만 모니치 전사장, 모르칸트는 끝까지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솔리치 장로들이 남긴 표식을 따라 제일 먼저 정찰병을 보내 솔리치족이 숨어있는 지형을 탐색하게 했다. 물론 시간이 지체될 경우엔 불필요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에 오백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은신하고 있었다.

물론 메투리치족을 치러 이동한 솔리치 전사들이 귀환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전투 후 지친 그들이 복귀한들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리치 전사들과 마주하면 크던 작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솔리치 장로들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표식을 따라 이동하니 아나스강 지류의 끝자락 부근에 숨어있었습니다.”

음식은 둘째치고 물은 삼 일만 먹지 못해도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강을 주변에 두고 숨어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다.

하지만 아나스(과디아나)강의 지류는 루시타니아, 베토네스, 카르페타니 지역 곳곳에 마치 사람의 혈관처럼 퍼져 있다. 그러니 이걸 예상했다고 해서 솔리치족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병력이 많다면 일일이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럴만한 병력도 없고 그럴 병력이 있어도 저들이 숨은 지역은 베토네스 연맹에 속한 곳이다.

모르칸트가 더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정찰병을 재촉하자 정찰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은신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보였지만 막다른 곳입니다. 입구에 해당하는 부분을 틀어막는다면 도망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지형입니다.”

“방어태세 수준은?”

“역시 시간을 두고 관찰해본 결과 장로들의 말대로 저들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전사들이 조심스레 허수아비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모르칸트는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뭐 더 들을 것도 없군.”

으슥한 곳에 두어 병력이 많은 것처럼 가장하기 위한 것이리라. 정말로 병력이 많다면 도리어 몸을 숨겨서 적을 습격할 궁리를 하지 저런 짓을 할 까닭이 없다.

“다만 혹 아군이 습격을 당한다면 크게 당할 만한 지형으로 보였습니다.”

“크크크. 실로 영리한 놈들이군. 저들의 실제 병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지형을 확인했다면 나라고 해도 저들을 치는 것을 주저했을 것이다. 그런 저들을 낮에 정면으로 공격하는 건 습격하라고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 될 테니 오히려 으슥한 야밤을 틈타 우회할 생각을 했겠지. 그런데 그 야밤엔 주변에 늘어선 나무조차 사람처럼 보인단 말이야. 참으로 영리한 놈들이 아닌가?”

모든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저들은 병력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습격을 당하면 크게 당할만한 지형이라고? 그게 저들의 속임수다. 그러니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어리석은 늙은이들! 역시 이 늙은이들은 도무지 쓸데가 없어.”

“그렇습니다. 솔리치의 장로들이 나서지 않았어도 당분간은 안전했을 겁니다. 저들 스스로 약점을 가져다 바친 꼴입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방비할 태세까지 완비했으니 왜 저들의 명성이 높았는지 알겠군요. 미리 알지 못했다면 메투리치족을 상대하고 저들이 부족에 합류한 뒤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흥! 그 명성도 오늘 내 손에 의해 모두 아작날 것이다.”

“물론입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모르칸트는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따르는 오백 명의 모니치 전사들에게 말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여라. 특히 하등 쓸모없는 늙은이들부터!”

“알겠습니다!”

“크크크 알겠습니다!”

*

“모니치 정찰병이 본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에고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테세우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모니치 전사장을 만나고 온 장로들을 바라봤다.

“모르칸트, 그자의 성품은 어떠한가?”

“신중하지만 잔혹한 성품입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자이니 저자의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자들은 그자가 자신의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늙고 힘이 없어 일선에서 무기를 들고 싸울 수는 없어도 모진 세파를 넘어온 연륜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연륜이 쌓였다고 모든 인간이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나 간혹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도 가장 현명한 지혜가 나올 수 있다. 하물며 세파를 견딘 노인이랴 더 말해 무엇하랴?

모르칸트를 만나고 온 장로들은 이미 그의 성품과 그의 흉계까지 모두 읽어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일 겁니다.”

모르칸트는 솔리치 장로들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속은 건 솔리치 장로들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 장로들이야말로 모르칸트를 완벽하게 속여넘겼다. 솔리치 장로들이 가르쳐준 이 장소조차 본래 솔리치 족이 머물던 장소가 아니라 적을 습격하기 위한 장소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테세우스의 기만책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왔다는 뜻이다. 바로 노인과 장로라는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서.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고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저마다 투창이나 활을 들고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저희가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러니!”

“위험한 일이니만큼 저희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저희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은 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자 테세우스는 저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곳에 남아서 장렬하게 죽겠다? 누가 마음대로 죽으라고 했지?”

“족장..”

저들은 울컥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그런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의 솔리치족을 바라봤다.

“부족장으로 명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아라. 적의 목을 물어뜯어야 살 수 있다면 물어뜯어라. 그 피를 마시고 그 살을 씹어야 생존할 수 있다면 그 뼈까지 씹어먹어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테세우스는 다시 투창이나 활을 든 노인들을 바라봤다.

“나는 이곳에 모니치족을 장사지낼 생각이지 당신들을 장사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 지정된 위치에서 내린 명령이나 잘 수행해라!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들은 마치 젊은 날의 패기를 되찾은 것마냥 우렁찬 목소리로 테세우스에게 대답했다.

“가라! 숨어야 할 자는 숨을 곳에! 싸워야 할 자는 싸울 곳에 자리해라. 오늘 모니치족을 모조리 죽여서 솔리치족의 핏값을 받아내겠다.”

“알겠습니다.”

*

오백 명의 모니치 전사들은 거침없이 솔리치족이 숨어있던 지역으로 돌진했다. 모르칸트는 저들과 함께 숲길을 달리면서 기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봐도 이 지형은 천 명이 넘는 부족들이 은신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지형이 아니었다. 따라서 모르칸트는 뭔가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가라는 생각에 잠시 병력을 멈추려고 했다.

피이잉

쐐에에엑!

피이이잉

“크아아악!”

“으아악!”

“전방에 적이다!”

그 순간, 숲의 저편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방패를 들고 막아라! 마찬가지로 응사해라!”

모르칸트는 급히 명령을 내린 다음 화살의 날아온 방향과 습격을 가한 숫자를 가늠해봤다.

“흥! 기껏해야 50명이로군. 똥줄이 타는 모양이야. 크크”

지금의 지형도 습격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의 습격을 끝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모습에 모르칸트는 모든 의심을 날려버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쳐라! 이대로 몰아쳐서 모조리 죽여버려라!”

*

꾸우우욱

피이잉 피이잉

활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테세우스는 다섯 발의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어찌나 손놀림이 빠른지 그 화살은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테세우스는 다시 활통에서 화살을 한꺼번에 다섯 개를 꺼내 한 발은 활줄에 걸고 나머지 화살은 밑으로 늘어뜨리듯이 잡았다. 이는 화살을 연사하기 위한 파지법에 해당했다.

그리곤 다시 쏘아냈다.

핑 피피핑

그가 쏜 화살은 어김없이 모니치 전사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와 함께하는 오넨구스와 50명의 솔리치 전사들의 활 솜씨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저들도 모니치족을 착실하게 줄여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적당한 지점에 소모된 화살을 비축해놓았다. 모니치족의 정찰병은 단순히 허수아비로만 보았겠지만 그 안에는 화살이 꽤 많이 담겨있었다. 이것을 이동 경로에 설치해 소모된 화살을 빠르게 채워 넣었다.

소모된 화살을 솔리치 전사에게 건네받아 활통에 채워 넣은 테세우스는 사납게 짓쳐드는 모니치족을 바라봤다. 이번이 마지막 지점이었다.

‘그리고 너희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테세우스는 활을 높이 치켜들고 활통에 있는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연달아 쏘아냈다. 그가 쏘아낸 화살은 역시나 어김없이 적의 목숨을 끊어놓았다. 그 모습에 함께하던 솔리치 전사들은 테세우스에게 자연히 경외심을 품었다. 오그미우스의 환생? 오그미우스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모르칸트는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저들의 화살에 죽은 전사의 숫자만 백여 명에 달했다. 쏘고 빠지고 쏘고 빠지니 죽음이 두려운 전사들의 진격속도는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놈들을 잡을 수도 없었다.

“으드득! 솔리치족이 숨어있는 곳이 저곳이더냐?”

“그렇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 명의 전사를 잃다니.. 오백 명 중 백 명이니 무려 오분의 일을 잃은 셈이다. 날아오는 매서운 화살이 두려워 주춤거리긴 했지만 모니치족 역시 분노하긴 마찬가지였다.

습격 가운데 적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 공격이 격차를 두고 이뤄진 것은 아니다. 모니치족은 놈들을 잡기 위해 계속 달렸고 놈들은 도망치면서 연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무작정 밀어붙였는데 어디서 화살을 공급받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로 인해 100명이 넘는 전사가 죽음을 맞이했다.

모르칸트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놈들도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다. 솔리치족이 거주하는 곳이니만큼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갈가리 찢어 죽여야겠어.”

모르칸트는 헛짓거리라 생각하던 메투리치족의 잔혹한 행위가 공감되었다. 허수아비에 넣고 태워죽이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 으드득 태워 죽여야겠어.”

*

테세우스는 오넨구스의 솔리치 전사 50명과 방진을 형성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모니치족이 몰려오는 모습은 마치 밀물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모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물론 오넨구스 등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세우스를 둘러싼 모르칸트가 소리쳤다.

“으드득! 너희들을 죽이고 주변으로 도망친 네 부족들을 모조리 태워 죽여주마.”

모르칸트는 이들이 자신들을 막는 사이, 솔리치 부족이 도망쳤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니 50 명에 불과한 저놈들을 일단 모조리 쳐죽이고 병력을 나눠서 솔리치족을 사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고작 50명 때문에 수월히 끝날 전투가 이리 지지부진해지다니..

“네놈들은 우리를 막아선 대가를 온몸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반면 테세우스는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그저 저들이 흉흉한 시선을 자신을 바라보는 4백여명의 모니치족을 주시할 뿐이다.

“흥! 죽여라!”

잠시 멈춰있던 저들이 모르칸트의 명령에 의해 다시 쇄도하자 그제야 테세우스가 외쳤다.

“방패를 들어! 방진을 구성해라!”

테세우스의 명령에 50명의 솔리치 전사들은 몸을 가릴만한 커다란 방패를 빈틈없이 겹겹이 붙여서 거북의 등딱지 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란 말인가? 저렇게 하면 4백 전사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한단 말인가? 분노한 가운데서도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등을 바라보던 모르칸트의 이곳 주변을 둘러싼 능선을 따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했다.

모르칸트는 그 모습에 오싹함을 느꼈다. 어.. 어째서 솔리치 전사들이? 심지어 솔리치족마저 가세하여 그 수가 물경 천에 달해 보였다.

함정. 함정이다! 이 모든 것이 함정이라는 생각이 모르칸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뒤늦은 깨달음이고 뒤늦은 후회였다.

이미 저들이 쏜 화살과 투창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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