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 엄중한 무게.
87.
오백여 명의 전사를 이끌고 카르페타니와 베토네스 접경에 주둔하고 있던 모니치족 전사장, 모르칸트는 몸을 바닥에 엎드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솔리치족 장로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야밤에 자신을 은밀하게 찾아와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메투리치족은 저희 부족을 학살하는 데 여념이 없으니 모니치족에게 귀속되길 바랍니다.”
모르칸트도 메투리치 놈들의 잔혹한 행위를 들었다. 그냥 죽이면 될 것을 별 희한한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했던 모르칸트는 놈들의 행동이 솔리치족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도리어 자신이 얻었다는 생각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크크 참으로 멍청한 놈들이 아닌가? 욕은 저들이 처먹고 그 과실은 자신이 취한다니 심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르칸트는 그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사나운 어조로 솔리치 장로들에게 일갈했다.
“헛소리! 그딴 헛소리를 나보고 믿으란 소린가? 너희 솔리치족은 죽으면 죽었지 이렇듯 고개를 조아리는 자들이 아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지만 그 솔리치족이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고? 그걸 어찌 믿는단 말인가?
“베토네스 연맹은 저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형제처럼 지내던 칼루리족은 도움은커녕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서는 것조차 거부했고 그로 인해 메투리치족에게 많은 솔리치인들이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으드드득. 저희도 저들을 죽이고 싶습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힘이 없습니다. 저희 전사는 고작해야 4백 명에 불과합니다. 왜 저희를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페타니 연맹이 저희 부족을 쳐내기로 결의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항해봤자 그 끝은 멸족밖에 남지 않습니다.”
“크크크. 그러니 노예로도 남을 것이다?”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부족의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들은 더 살아남을 권리가 있습니다. 저희도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이렇듯 노예가 되길 자처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크크크크. 그런 상황에 굴복했기에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사로서 죽음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그건 너희 노인들의 생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너희 전사들은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노예가 되는 것은 거부할 것이다.”
“물론.. 물론입니다. 저들은 이대로 고사하느니 부족의 원수라도 갚겠다며 메투리치족을 향해 출정했습니다. 부족을 지키고 있는 전사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모니치족의 전사장, 모르칸트가 솔깃한 심정이 되어 되물었다.
“그게 정녕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저희 부족의 전사를 죽인 당신에게 이 사실을 고하는 것은 부디 아량을 베풀어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입니다. 적어도 메투리치족처럼 모두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크크크.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어리석은 놈들이지. 아무렴 나는 모든 솔리치족을 죽이지 않을 것이야.”
왜 모두를 죽이겠는가? 싸울 수 있는 사내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노리갯감으로 삼고 아이는 노예를 팔아치우면 그 이득이 얼마인데? 하지만 노회한 장로들이 이것을 모를까? 고작 이 같은 미래를 얻기 위해 항복을 청한다고?
“저희는 보다 큰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결코 카르페타니 연맹에 대항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희가 항복하는 대신 부디 그 점을 연맹에 전해 부족의 이름을 보존할 수 있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리한다면 저희 솔리치 부족은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모르칸트는 피식 웃으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부족의 이름이라. 좋아. 그런 의도라면 내 믿을 수 있지. 그래서 너희 전사들이 메투리치를 치러 언제 이동하는가?”
“그전에 약속부터 해주십시오.”
“모르칸트, 내 이름을 걸고 이 점을 약조하겠다. 그러니 어서 말하라!”
허공에 흩어질 말 따위 무시하면 그뿐 아닌가? 멸족할 부족에게 지킬 신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킬 생각이 없는데 약속을 한 개 아니라 수백 개인들 못할까?
“오늘 새벽녘에 출정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부족을 지키는 전사는 50명의 전사들. 그마저도 상처를 입은 전사들이 대부분입니다.”
“너희가 숨은 위치가 어디냐?”
“저희가 부족으로 돌아가면서 표식을 남겨두겠습니다.”
“좋아. 믿어보도록 하지. 돌아가 봐.”
“저희에게 약조한 것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지 않으면 너희에게 다른 방도라도 있나?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돌아가라. 너희의 도움이 없어도 4백에 불과한 그것도 부족민을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는 너희 전사를 치는 건 우리 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대신 그렇게 될 경우에는 너희가 원하는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선택은 당신들이 하는 것이야.”
“······. 믿겠습니다.”
모르칸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봐! 그럼.”
솔리치 장로들이 물러나자 그 대화를 들은 휘하 전사들이 입을 열었다.
“저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긍지 높은 솔리치족인데 이런 굴욕적인 항복을 청해오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뭐 믿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이 메투리치족에 극심한 원한을 품은 것은 사실이고 저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완연한 저들이 우리를 먼저 상대하려고 들 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메투리치족보다 우리의 숫자가 더 많으니 전술적으로도 메투리치족을 상대하려고 들겠지요.”
전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던 모르칸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생각도 동일하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다른 부족이 이 전공을 가져갈 수 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해도 대부족장 선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공이니 이 공을 빼앗긴다면 니니안 부족장께서 크게 화를 내실 것이야. 만에 하나라고 할지라도 어차피 4백에 불과한 놈들! 들이쳐서 모조리 죽인다.”
“약조는?”
“크크크크. 죽은 자와 어찌 약속을 맺을 수 있을까?”
“하하하하.”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모르칸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쓸모없는 자는 모조리 죽이리라. 특히 솔리치족의 장로들부터. 죽은 자라고 말한 것은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솔리치의 또 다른 장로 누아란은 테세우스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칼루리 마을에 들어섰다. 상쾌한 공기와 함께 햇살이 찬란했지만 마을 곳곳에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진득한 살의를 가진 전사들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아란은 지난 밤 테세우스의 광기 어린 무예를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왜 그와 함께 살아남은 전사들이 그를 오그미우스의 화신이라고까지 칭했는지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듯 성공적으로 저들을 치고 저들의 식량을 빼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토우토릭스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비록 그는 전사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부족장을 솔리치 부족에게 선사했다.
누아란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칼루리 전사들을 향해 조소하며 말했다.
“뭐. 어디 습격이라도 당한 모양이오? 축제를 즐길 식량마저 모조리 빼앗기다니 솔직히 나는 시원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으드득!”
“감히!!”
그러자 칼루리 전사들이 그를 에워싸며 당장에라도 쳐죽일 것처럼 쳐다봤다.
“왜? 분노하는가? 형제처럼 지냈던 작자들이 형제의 위기 앞에서 나 몰라라 하고 도리어 형제를 위기 가운데 밀어 넣었으니.. 그래. 너희는 고작 식량과 전사를 조금 잃었는지 모르지만.. 으드드득.”
이를 갈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충혈된 눈으로 일갈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주변의 건장한 전사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허수아비 아래 여자와 아이와 저항할 수 없는 부족민이 처절하게 타죽었다. 누가 그들을 허수아비 아래 밀어 넣었는가? 말해보라! 너희 칼루리족이 이일에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아란의 기세에 눌린 전사들이 그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피하자 누아란이 다시 일갈했다.
“길을 비켜라!”
칼루리 전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자 뒤편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을 비켜서거라.”
칼루리 전사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뒤 그제야 비켜설 명분을 얻었다는 듯 바로 누아란의 앞길을 열었다.
“에오간.”
누아란이 모습을 드러낸 노인을 바라봤다. 그는 칼루리족의 장로를 대표하는 이였다.
“누아란.”
“메투리치족인가?”
“부끄럽게도 그러하네.”
과연 그 주체가 누군지 몰라서 질문했을까? 재차 확인코자 질문한 누아란은 사나운 기세로 에오간을 바라봤다.
“칼루리족은 더 이상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적에 가깝겠지. 하지만 메투리치족을 멸하기 위해서라면 안쿠와도 거래할 수도 있다.”
죽음의 신 안쿠를 거래한다는 것은 제 목숨을 거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형제처럼 지냈던 솔리치족이거늘, 이제 저들에게 칼루리족은 불길한 안쿠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씁쓸한 표정을 짓던 에오간은 누아란에게 말했다.
“그래.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가?”
“신의를 모르는 자들이 너희와의 신의인들 지키겠는가? 메투리치족은 회합장으로 향하는 토우토릭스 족장과 우리 전사들을 습격했다. 신성한 제사를 앞두고 잔혹한 피를 흘린 것이다. 신성한 제사마저도 무시하는 자들이 너희와의 약속인들 지키겠느냐?”
“으흠..”
에오간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지난밤 메투리치족에게 습격을 당해 식량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자신들의 영토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더니 결국 자신들의 식량까지 넘본 것이리라.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인가?”
“억울하게 죽은 부족들이 안쿠의 손에서 풀려날 수만 있다면 영원토록 너희를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에오간은 누아란을 지긋이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제안하려고 하는가?”
“메투리치족을 쳐라.”
에오간은 그럴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건 족장의 권한이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 마을 역시 우리 마을과 마찬가지로 불타오르겠군.”
“그게 무슨 말인가?”
“왜 저들이 너희의 식량을 탈취했다고 여기는가? 왜 너희로 하여금 우리부족을 외면하게 만들었을까? 또한 왜 카르페타니가 우리 부족을 버렸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누아란의 질문에 에오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했다. 그 이유 중에 칼루리족과의 관계 역시 영향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긴 이제 와 과거의 일 따위를 거론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간단히 말하지. 애초에 메투리치족은 너희와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보라. 단순히 예전처럼 제 영역만 지키고 살 생각이라면 굳이 침략전쟁을 행할 이유가 무엇일까? 저들은 너희 부족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 두고 보라. 이제 우리 부족이 무너졌으니 그다음은 너희 차례다. 베토네스 연맹? 내분에 휩싸인 베토네스가 너희 부족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신경이라도 쓸지 의문이군. 아. 신경을 쓸 때쯤이면 이미 부족 자체가 사라진 이후일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스스로 살길을 찾아라. 우리의 전철을 밟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연맹을 믿은 우리 부족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마저도 버린 채 이곳저곳을 유리하며 멸족의 위협에 시달리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물론 너희 부족이 그런 운명에 처한다면 나는 아주 호탕하게 비웃어주리라. 하지만 너희가 그런 지경에 처한들 멸족한 우리 솔리치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당하기 전에 먼저 쳐라. 우리를 향한 일말의 도의?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너희가 저들을 치지 않고 수수방관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피를 가져와 너희 머리 위에 부을 것이다. 바로 너희의 피를!”
좌중이 무덤 같은 침묵에 휩싸인 가운데 누아란이 일갈했다.
“우리는 너희에게 동맹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메투리치족을 쳐야 우리가 살길이 열리니 그렇게 제안할 뿐이다. 하하하. 그런데 아주 꼴좋게도 메투리치족이 너희를 먼저 쳤구나. 너희가 따르든 안 따르든 이 사실만으로 심히 호쾌하다. 심히 호쾌해.”
누아란이 대놓고 칼루리족을 비웃었지만 전과 같이 그에게 살의를 발하는 자가 없었다. 도리어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메투리치족의 위치는 말하지 않아도 파악하고 있겠지. 그나마 너희에게 전사의 긍지라도 남아있는지는 이번 기회에 알 수 있겠지. 흥. 돌아가자!”
누아란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솔리치 전사들에게 소리치며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솔리치 전사들은 오연한 표정으로 저들을 오시하다가 누아란을 따랐다. 참고로 이들 열 명의 전사들은 테세우스와 함께 사투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서른 명의 전사들에 속한 이들이었다.
칼루리족은 떠나는 솔리치족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불같은 눈빛으로 에오간을 바라봤다.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에오간 역시 눈을 사납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리라.
“족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부족회의를 소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