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 엄중한 무게.
85. 엄중한 무게.
둥둥둥
끼이익 끼익
북소리에 맞춰 노잡이들이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가 부대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뱃전을 때리는 파도가 갑판까지 넘어왔다.
쏴아아아
파도가 부서지며 몸을 적셨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굳건하게 전방을 바라봤다. 그의 주변으로 족히 150척도 넘어 보이는 갤리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최소 1만, 거의 2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보였다.
현재 세르토리우스가 군을 운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숫자가 1만 정도였다. 병력이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한 번의 전투에 나설 수 있는 병력의 숫자는 한계가 있고 사정상 더 늘려봐야 유지할 수도 없었다.
“혹 사신을 보내 저들을 먼저 회유하실 생각이십니까?”
투르둘리 오피다니, 사비누스는 바로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투르둘리에서 파생된 연맹이나 현재 그들과 교류가 거의 없는 연맹이라 간단히 오피다니 연맹이라 불러도 무방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옆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예속되고자 먼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무력으로 진압한다.”
“음. 본보기를 보이실 생각이시군요. 하면 루시타니아인의 합공을 유도할 생각이십니까?”
“마찬가지로 따로 사람을 보낼 생각은 없다. 다만 저들의 대응에 따라 향후 나의 통치도 달라지겠지.”
압도적인 힘을 보이고 그 후에 회유책을 쓴다. 그래야만 저들이 나중에 행여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 혹 다른 마음을 품고자 해도 저들에게 심은 두려움이 저들 내부에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을 테니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계획한 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게 세르토리우스가 그리는 밑그림이었다.
말을 잠시 멈춘 세르토리우스가 사비누스를 바라봤다.
“병사들의 훈련은?”
“아시지 않습니까? 레가투스의 휘하에 남아있는 레기온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들 한 명 한 명이 센튜리온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저들이 병사들을 선별하여 철저하게 훈련시켰으니 시민이 아니라 비록 정식으로 인가받지는 못하겠지만 레기온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트리아리와 프린키페스만 남은 군단에 하스타티와 벨리테스가 더해져 보다 완벽해진 셈입니다. 특히 벨리테스 같은 경우는 따로 투창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많았던지라 거의 바로 전술 훈련에 돌입했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충분하진 않아도 문제될 여지는 없습니다.”
벨리테스(투창병), 하스타티(주로 신병, 경보병), 프린키페스(주력병, 중보병), 트리아리(고참병, 중창병), 에퀴티(기병)로 이뤄진 로마의 군단 체계는 삼니움 전쟁 때 확립된 것으로 마니풀라르(manipular)라 부른다.
이 독특한 구성은 로마군이 유기적이고 다양한 전술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물론 정규 레기온에서는 기병이나 궁병의 활용도가 비교적 낮다. 하지만 부족한 병과는 보조군을 통해 보강했기에 로마군은 실로 다양한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사비누스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마우레타니아와 누미디아가 자랑하는 투창 기병들도 다수 합류했으니 아군이 패배할 리는 없습니다.”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심은 패배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사비누스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자는 아니었기에 세르토리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수평선 저편을 바라봤다.
사비누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테세우스님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일신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기기묘묘한 계책을 품고 계신 분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세르토리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비누스에게 질문했다.
“그게 자네 눈에 보이던가?”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이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세르토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네. 죽고 사는 문제도 그러하네. 그러니 그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야. 여기서 염려한다고 달라지지 않으니까.”
“하면?”
“테세우스는 대체로 냉철하고 철두철미하게 계산하려고 하지. 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타오르는 불을 품고 있어. 불이 타오를 때 그 불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
근방의 메투리치족을 말살한 테세우스는 다행히 솔리치족과 만날 수 있었다. 서른 명의 전사들이 저들과 기쁨을 해후를 나누는 동안 테세우스 역시 익숙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그랬군.”
테세우스는 에고르에게 말을 건넸다.
“자의대로 판단하여 일단 저들을 구했습니다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메투리치족은 물론 모니치족 역시 솔리치족을 공격하던데?”
테세우스가 솔리치족과 함께 이동했기에 저들을 주시하던 에고르는 솔리치족이 무차별적인 습격을 당하자 결국 전사들을 이끌고 솔리치족을 구원했다.
“다 이야기하긴 어렵고 간단히 말해서 카르페타니가 솔리치족을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어째서?”
그러나 솔리치족의 장로들로 보이는 자들이 급히 테세우스에게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기에 에고르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토우토릭스 부족장께서는 정말로 사망하신 겁니까?”
장로의 대표로 보이는 노인과 함께 다가온 마에도크를 슬쩍 바라본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누차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들은 그대로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마에도크에게 일어난 상황을 요약해 들었던 카오므는 몸을 숙이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에드 부족장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불필요한 건 모조리 넘어갑시다. 현 상황은?”
“현재 총인원은 3천 명가량입니다. 하지만 그중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사는 사백도 채 되지 않고 그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싸울 수 있는 전사가 사백인데 그마저도 분분히 나누어져 있다면.. 후우.’
실로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은 전사를 모두 규합한다고 해도 적을 습격하러 이동할 수도 없었다. 그리되면 몸을 숨긴 2천 6백여 명의 비전투 인원은 누가 보호해 준단 말인가? 비전투 인원을 데리고 전투를 수행하면 되지 않냐고? 최후의 순간에는 그래야 할지도. 하지만 대부분 도살당하고 말 것이다. 저들의 죽음은 도리어 전투에 집중해야 할 전사들의 사기까지 뒤흔들 것이니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 말에 에고르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 베토네스 연맹의 땅이라 카르페타니 측에서 함부로 침범하기 어려운 것 때문에 아직 버틸 수 있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부족민을 구하기 위해 많은 솔리치 전사들이 목숨을 던졌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일단 모니치족 전사 육백과 메투리치 전사 이백 명가량이 솔리치족을 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메투리치족보다도 모니치족에게 당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물론 저들도 솔리치 전사의 손에 꽤 죽었지만 그 때문인지 메투리치족은 음..”
에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자의대로 판단한 연유가 메투리치족의 잔혹한 행위를 참지 못해서였으니까. 심지어 메투리치족은 사로잡은 자들을..
“옳은 판단이었다. 참았다면 너희들의 긍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에고르와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카오므는 에고르와 테세우스의 관계를 얼추 짐작했다. 따라서 테세우스의 신분이 의심스러웠던 카오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부족장과 저들의 관계는 대체? 그전에 부족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를 믿지 못하겠고 따르지 않겠다면 어차피 임시로 수락한 부족장, 얼마든지 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냉정한 발언에 마에도크가 급히 나섰다.
“카오므 장로께서는 결코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 이 부분을 집고 가야겠다.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나는 떠날 것이다. 불타오르는 집 아래서 이 집이 내 집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드잡이질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러자 카오므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심기를 상하게 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또한 오해를 거두어 주십시오. 토우토릭스 족장은 물론 그와 함께한 용맹한 전사들 오백이 몰살당했습니다. 거기에 카르페타니는 물론 접경하고 있던 베토네스의 칼루리 부족마저 저희를 배신했습니다. 사방에서 저희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카오므의 말에 그와 함께한 장로들의 안색이 크게 어두워졌다. 현재 처한 부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보다도 못하다는 걸 다시금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토우토릭스. 나는 믿지 못해도 토우토릭스는 믿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그를 구한 장본인이고 그가 내게 부족장의 직위를 회합장에서 확정했소.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솔리치족을 돕겠다 약속했지. 그러니 이것 외에 당신들에게 더 말할 것이 없다.”
테세우스의 담담한 발언에 카오므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 부족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와 함께 돌아온 전사들은 에드, 이 자를 오그미우스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투를 치르며 살아남은 전사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실로 대단한 전사라는 뜻이다.
솔리치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그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는 사실 이 시점에서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카오므도 모르지 않았다.
카오므가 그 말과 함께 엎드리자 장로들도 그를 따라 엎드렸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이곳의 솔리치족 전원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테세우스는 주변을 주시하다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솔리치족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테세우스의 마음을 가득 메웠다.
지금껏 자신이 죽인 켈타이 전사들 역시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다가온 엄중한 무게감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존하려면 별수 없다고 애써 외면하던 진실이 그렇게 예고도 없이 다가온 순간, 테세우스는 그 먹먹함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회오리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 테세우스는 눈을 감았다.
‘어떤 이유를 붙여도 전쟁은 악이다. 그게 나로 인한 것이든 아니든 결국 전쟁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나 역시 악인이다. 그러니 이 망할 전쟁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버리겠다.’
테세우스는 그간 이곳저곳에서 들은 정보를 조합하다가 눈을 번쩍 뜨며 자신을 주시하는 솔리치족에게 일갈했다.
“일어나라! 고개를 바로 세워라! 왜 패잔병처럼 수그리고 있는 것이냐?”
그의 우렁찬 외침에 솔리치족이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는 장로들의 대표인 카오므를 바라봤다.
“카오므! 내 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따른다고 하였나?”
“물론입니다. 그 증거로 필요하다면 제 목숨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테세우스는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카오므에게 말했다.
“베토네스 연맹으로 가라. 가서 솔리치 부족이 베토네스에 가맹하겠다고 전하라.”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저들이 이런 상황에 저희를..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만들면 될 일이다. 그러니 가서 전해라. 솔리치족은 카르페타니의 침략전쟁을 막으려 했고 그 결과 멸족의 위기에 처했다고. 너희 베토네스 연맹은 이를 묵과하는 자들이냐고 목숨을 걸고 선동하란 말이다! 축제 기간이고 내부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베토네스 부족장들이 모여 있을 테니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베토네스의 칼루리족이라고 했나? 회합장에 들어서기 전에 그를 만나거든 전해라. 배신한 자는 다시 배신당하기 마련이라고.”
“그게 무슨?”
‘저들이 솔리치족을 받아주든 아니든 카르페타니에 손을 잡은 부족들이 함부로 날뛸 수 없을 거다.’
테세우스는 카오므에 말에 대답하지 않고 냉정한 시선으로 이번에는 마에도크를 바라봤다.
“마에도크!”
“예! 말씀하십시오.”
“이곳에 남은 솔리치 전사는 그래서 몇 명인가?”
“이백 명 정도입니다!”
천 명도 넘었던 자랑스런 솔리치의 전사들이 이제는 그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에도크는 마음이 심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기보다는 테세우스라면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전사 100명을 데리고 카오므를 호위하라. 회합장에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그를 지켜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를 일별하고 테세우스는 이번에 에고르를 바라봤다.
“에고르!”
에고르는 그간의 경험으로 테세우스가 무슨 명령을 내릴지 파악하고 바로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