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82화 (82/298)

# 82

82. 오그미우스.

82. 오그미우스.

“뭐? 뭐라?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놈이!”

“전쟁선포라? 하하하하. 당장 네놈 부족을 쓸어버리겠다.”

니니안과 드러스트가 분노하며 소리치자 나머지 부족장들도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이곳에 모인 카르페타니 연맹 소속의 부족은 베타니우스, 유로크, 티르타리크, 솔리치, 필로니코리, 오비소디크, 모니치, 메투리치, 메시치, 마우레이치, 마누치케스, 말루게니케스, 마가니케스, 롱게이도치, 란지오치, 엘구이스미크, 두니크, 듀이티케, 도빌리크, 다젠치, 콘투키안치, 칸바리치, 보코르키에, 아에투리크, 아쿠아리크, 아르쿠이오치, 아에라리크 이렇게 27개 부족으로 카르페타니를 27 지역으로 분할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니니안의 모니치족은 솔리치 부족과 더불어 베토네스 연맹을 접경하고 있는 지역의 부족이었고 메투리치족은 투르둘리를 솔리치 부족과 더불어 접경하고 있었다. 지리적 특성상 여러모로 전략적 거점이 되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솔리치족이 주전파가 아닌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피 보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솔리치족은 대대로 주화파의 계보를 이어왔다. 간혹 호전적인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전쟁을 꺼리고 연맹에 중재를 요청해왔다. 당연히 토우토릭스는 물론 새로운 족장 역시 그럴 것이라 여겼거늘, 대뜸 선전포고를 해버리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잠깐!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같은 연맹끼리 전쟁을 하겠다는 거요?”

“맞는 말이오. 같은 연맹끼리 전쟁은 아니 되오.”

“베토네스 연맹의 일도 그렇고 켈티시나 투르둘리 연맹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소. 이런 상황에서 같은 연맹의 부족끼리 전쟁이라니!”

“어허! 말도 안 되는 소리! 전쟁은 연맹 차원에서 금해야 하오.”

전쟁을 금하자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퍼져 나오자 드러스트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4백에 달하는 전사들을 무찌를 수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애송에 불과하다.

이런 자리에서 먼저 선전포고를 해버리면 제재를 당하는 건 선전포고를 한 부족이다. 이런 일은 정정당당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스리슬쩍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소리다. 명예를 숭상한다는 놈치고 오래 사는 꼴을 못 봤다. 죄다 그렇게 뒤통수 쳐맞고 사라지니까.

드러스트는 놈이 선전포고를 함으로 자신들이 공격한 일에 대한 관심은 이미 멀찌감치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테세우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부족장들의 반응을 살폈다. 애초에 테세우스는 드러스트 등과 다르게 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다.

‘이유야 어쨌든 패배한 전투다. 패배한 전투를 물고 늘어져 봐야 혼내 달라고 징징대는 어린아이 취급이나 당할 것이 뻔하고, 무엇보다 벌을 내려야 할 이들이 작당한 일이다. 그러니 일단 놈들의 혼을 빼놓는다.’

카르페타니 내부의 세력만 고려한다면 이는 악수에 가깝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카르페타니 내부 부족만 고려할 이유가 있을까? 루시타니아, 베토네스 연맹은 물론 필요하다면 자신이 분탕질한 켈티시와 투르둘리 연맹까지도 이용할 생각이 있었다.

‘흔들어야 그 안의 내용물이 부상한다. 어디 카르페타니의 본심을 확인해볼까?’

냉정한 말이지만 솔리치족이야 어찌 되든 테세우스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초에 카르페타니까지 온 건 이들을 흔들어 이들을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목적과 그 배후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살과 뼈를 바르고 그 내장까지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테세우스가 이들을 흔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솔리치족을 버리는 패로 사용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솔리치족은 솔리치족 대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솔리치족의 선전포고는 정당하다. 저들은 오백의 전사를 잃었다. 확인되지도 않은 오해로 인해! 그 부분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메투리치족의 드러스트가 말했듯이 그 일은 연맹을 위해서 한 일이다! 연맹 차원에서 적당한 보상을 하면 될 일이지 그게 선전포고를 할 일까지는 아니야.”

“이자들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이유야 어쨌든 솔리치족이 결백하다는 증거는 아직 안 나온 것 아닌가? 연맹에 분란을 일으키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는 것이야!”

간간이 이성적인 말을 뱉는 부족장들도 나타났지만 본래 카르페타니 내부에 주화파는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과격분자들의 외침에 그 외침은 금세 묻혀버렸다.

테세우스가 듣기에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들을 주장했지만 어차피 세상일이라는 게 그런 거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무슨 수를 써서든 얻고 난 후에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이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들이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침략 의지가 굳건하다. 심지어 켈티시와 투르둘리 연맹의 침입을 의심하는 와중에도 그 점에 대해선 전혀 흔들림이 없다.’

쿵쿵쿵.

“신성한 곳이오! 모두 존경을 표하시오!”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드루이드 수장인 페들미드가 오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땅에 두들기며 소란을 진정시킨 뒤 테세우스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신임부족장이니 다시 내 언급하는 것이네만 이곳에서는 신중히 말해야 할 것이오.”

테세우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선전포고의 뜻조차 모르는 애송이는 아니오. 또한 그런 자에게 토우토릭스가 부족장의 자리를 맡겼을까? 말해보시오. 솔리치족이 당한 일을 당신들이 당했다면 당신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전사들을 이끌고 보복을 가할 것인가?”

대답이 나오지 않자 테세우스는 다시 일갈했다.

“부족의 정당한 권한조차 집행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부족장인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집행할 것이다.”

그런 뒤 테세우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켈타이인들을 밀치고 회합장을 떠났다.

‘더 볼 것도, 더 들을 것도 없다. 토우토릭스의 명령으로 솔리치족이 이동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니.. 서둘러 베토네스 연맹으로 빠져야 한다. 그런 뒤 베토네스 연맹에 가담한다.’

이곳으로 이동하며 토우토릭스와 상의한 내용이기도 했다. 토우토릭스는 이우디케아를 호위했던 자들 중 날쌔고 용맹한 자에게 자신의 증표를 건네며 지금 즉시 부족으로 돌아가 이동할 모든 준비를 마치라고 일렀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부족이 멸족당할 수 있다고 언급했기에 솔리치족은 반드시 그 명령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것을 예상하고도 토우토릭스가 이곳까지 이동한 것은 그럴만한 여유를 얻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솔리치족은 연맹에 항상 충성된 친구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치다니 토우토릭스는 그 사실에 크게 분노하면서도 슬퍼했다.

베토네스 연맹이 혼란한 상황이라지만 연맹 차원에서는 함부로 영토를 넘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베토네스 연맹을 단합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카르페타니 연맹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베토네스 지역으로 후퇴하면 솔리치족은 일단 당분간은 무사하다.

사실 테세우스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의 바에티카와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과감한 행보를 보일 수 없어. 그러니 차근하게 그 밑바닥부터 부숴주마.’

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아군이 이길 수 있는 상황으로 유도하는 모든 것이 전쟁이다. 이 일은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싸워야 승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솔리치족을 등에 업고 베토네스 연맹을 흔든다. 저들이 결의하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군. 제길 도망치는 게 일상이로군.’

*

“저.. 저런 무례한 놈을 봤나?”

“신성한 회합장을 제멋대로 빠져나가?”

“보십시오. 우리가 괜히 솔리치족을 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들은 외부 연맹과 결탁하여 언제든 카르페타니를 배신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페들미드는 부족장들의 외침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 이곳에서 카르페타니 연맹을 이끌 대부족장을 선출할 생각이었소. 앞으로의 명운을 생각하면 대부족장을 선출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말이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소.”

부족장 모두가 페들미드의 입을 주시했다.

“전사를 파견해 솔리치 부족장 에드를 죽이시오. 마찬가지로 저들은 외부 연맹과 결탁한 족속이니 전사들을 파견해 저들의 부족을 치시오!”

“솔리치족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페들미드는 서늘한 눈으로 말을 꺼낸 부족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롱게이도치 부족장께선 대부족장에 나설 생각이 없다고 간주해도 되겠소?”

“그.. 그건!”

“과거의 일이 어찌 된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소이다. 솔리치의 새부족장이 보여준 태도가 앞으로 저들의 행보를 보여주지 않소이까? 그러니 전사를 보내 솔리치족을 치시오. 바로 카르페타니를 위한 일이오! 따라서 저들을 치고 그 지역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대부족장을 선출하도록 하겠소! 가장 좋은 것은 새로 선출된 부족장을 죽이고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부족장을 선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을 짓는 부족장들도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연맹의 의지가 그러하다면 따르는 수밖에. 이곳에서 다른 말을 뱉겠다는 건 제 2의 솔리치부족이 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페들미드가 그런 저들의 기색을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본래는 솔리치족을 쓸어버리고 그 핏값을 베토네스 연맹에게 물을 생각이었다. 드러스트가 가져온 소식, 켈티시와 투르둘리 연맹에 대한 의혹은 오히려 일이 잘 풀린다는 징조로 보았다.

일단 그런 식으로 베토네스 지역으로 진입한 뒤 무력과 협상을 통해 한 부족씩 카르페타니로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연후에 한꺼번에 몰아쳐 합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솔리치 부족장이 살아서 회합장에 당도했다. 뭐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냥 죽음을 맞이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일을 무마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토우토릭스는 자신의 유언으로 새부족장을 선출했고 그 새부족장, 에드라는 애송이는 선전포고라는 강수를 들고 나왔다. 명분이 모두 저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허용했다가는 이 일을 주도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들통나고 만다. 카르페타니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으니 힘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다. 그래서야 계획한 모든 것이 일그러진다.

그래서 카르페타니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 아래 솔리치족을 멸족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는 세운 계획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가 작은 암초를 만난 격이었다.

하지만 작은 암초다. 이 정도 암초에 카르페타니는 무너지지 않는다. 더욱이 로마라는 바람을 등에 업은 이상, 목표를 향해 무조건 질주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이 기세를 타서 자신을 거부할 만한 권한을 가진 위협적인 존재를 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로는 입안에 가시 같던 이우디케르가 될 것이다. 함성을 지르며 전쟁을 부르짖는 부족장들을 바라보는 페들미드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

“이곳을 떠난다. 준비해라!”

테세우스가 회합장 밖에 대기 중이던 솔리치족 전사에게 말하자 그는 테세우스의 무기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토우토릭스께서는..”

“사망하셨다. 이우디케아가 시신을 수습하기는 할 테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그도 위험할 수 있다.”

테세우스는 회합장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오는 것을 들었다.

“시간이 없다. 말은?”

“준비는 했지만 아시다시피 회합장 주변에는 말을 가져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서 조금 이동해야 합니다.”

“서둘러!”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전사의 뒤를 따라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멈춰라!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것이냐?”

모니치족의 전사로 보였다.

‘니니안이라고 했던가? 신중한 자로군.’

그가 이미 솔리치족 전사 주변에 병력을 배치해 두었던 모양이다. 앞서 인도하던 전사가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테세우스의 칼이 빨랐다.

촤아아악!

모니치족 전사의 목이 댕강 잘려 허공으로 치솟고 그에 따라 주변의 모니치 전사들이 분노하며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테세우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저들을 향해 달려들며 솔리치 전사들에게 외쳤다.

“지체할 여유가 없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여라!”

“알겠습니다.”

솔리치 전사들은 그리 외치며 서후를 따라 모니치족을 베어냈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가로막는 두 세명의 전사를 순식간에 처리한 다음 외쳤다.

“어느 쪽이냐!”

“이쪽입니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같은 아군이건만 기에 눌린 전사가 급히 대답했다. 테세우스는 대답한 전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바람처럼 그곳을 향해 달렸다. 이에 솔리치 전사들도 급히 그를 따라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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