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 악의.
80.
시산혈해(屍山血海). 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가 강처럼 흘렀다.
후웅
촤아아악
테세우스는 양손의 검을 허공에 휘둘러 검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피를 털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깔끔하게 될 리가 없었다.
“후우.”
테세우스는 한숨을 뱉으며 구릉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메투리치 전사들의 시신을 바라봤다. 족히 얼추 4백은 되어 보였다. 그 말인즉 홀로 4백에 달하는 전사를 베어 넘겼다는 소리였다. 놀라운 일이지만 테세우스에겐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항우나 리처드에겐 일상에 가까운 전공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찌이익
테세우스는 산야에 너부러진 시체의 옷을 찢어낸 뒤 그 천으로 검에 남은 피를 좀 더 말끔하게 닦아냈다. 부족했기에 옷을 더 찢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기름으로 닦아내는 것이 제일 좋긴 하지만 이곳 어디서 기름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라도 검을 관리해두는 수밖에.
“얕았다.”
테세우스는 전사들을 이끌고 물러서는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주변 메투리치 전사들의 방해로 화살을 쏘는 마지막 순간, 자세가 뒤틀렸다. 그 결과 테세우스가 쏜 화살은 그의 뺨을 가르고 지나갔다.
본래는 갑옷이 보호하고 있지 않은 그의 뒷목을 노렸었다. 메투리치 전사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날카로운 활촉은 정확하게 그의 살가죽을 뚫고 들어가 그 숨통을 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게 의미가 있다면 모든 패배자는 패배한 순간, 다시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를 놓친 아쉬움은 바로 털어버렸다.
‘6월에 열리는 제전은 가장 큰 제전이자 축제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이 시기에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담이 크거나 자신의 계획을 과신하거나 그냥 욕망에 미친 놈이거나.. 뭐 전부일 수도 있겠군.’
메투리치 부족장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 이토록 지체될지는 몰랐으리라. 자신을 죽이려고 솔리치족의 토우토릭스 등을 놓치게 되면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되는 셈이니 일단 자신을 내버려 두고 저들을 쫓기 위해 병력을 나눈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것을 위해 보아디케아라는 이름으로 저들을 도발하며 위험을 무릅썼다.
저들의 부족장 드러스트는 주제넘게 도발 행위를 벌인 자신을 죽이고 그 피로 전사들의 인망을 얻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벨리키가 저들의 부족장과 그 아들까지 죽였다면 메투리치족은 그 치욕을 잊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설욕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든 설욕하려고 들 것이라 여겼다. 고작 한 놈을 죽이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 한 놈이 전사 수백을 상대하고도 남을 줄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이에 다급해진 드러스트는 솔리치족을 추격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고 테세우스는 그렇게 뒤를 보인 드러스트를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인데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얕게 들어갔다.
다만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솔리치 부족이 메투리치족에게 몰살당한다면 그야말로 개고생한 것에 불과하다. 회합장에서 카르페타니 연맹을 염탐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벨리키의 본명과 보아디케아의 이름을 들며 메투리치족의 불법행위를 성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변수가 너무 많고 너무 위험한 일이다. 일단 자격을 증명하는 일부터 너무 위험하다. 득보다 실이 많으니 얻을 것이 있어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이목을 사면 먼 훗날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적어도 토우토릭스는 살아 있어야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진다. 회합장으로 향하는 길이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길 바라는 수밖에. 일단은 그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움직인다.’
테세우스는 필요한 물품을 챙긴 뒤 바로 길을 나섰다. 필요한 물품이 제법 많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방향은 당연히 회합장이었다.
*
매우 거대한 오크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오크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매우 조용한 숲이자 누구의 침입도 받지 않았을 숲이건만 오늘만큼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1300명에 달했다. 카르페타니 연맹에 속한 부족 대표들의 숫자였다. 하지만 이곳에 솔리치 부족은 보이지 않았다.
“으흠. 시간이 되었소. 제전에 참여하지 않은 부족은 오늘의 제전이 끝난 후 우리의 굳은 약속을 파기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권한을 회수할 것이오.”
제사를 주도하는 드루이드, 페들미드가 창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각 부족의 부족장들이 외쳤다.
“우리의 정해진 약속대로!”
“정해진 약속대로!”
“약속을 어긴 부족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페들미드는 모두가 동의하자 거대한 오크나무 뿌리 부분에 기묘하게 생긴 보석을 올려 놓았다. 드루이드석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것을 신목의 뿌리 위에 올려놓음으로 제사의 의식이 시작된다.
고요한 침묵 가운데 페들미드는 자신이 쥐고 있는 파나케아로 만든 황금낫으로 신목을 휘감고 있는 파나케아를 적당히 자른 뒤 흰천 위에 올려놓았다.
“음메에에에”
“음머어어”
그러자 두 명의 드루이드가 두 마리의 흰 소를 끌고 페들미드에게 데려왔다. 두 명 중 한 명의 드루이드는 바로 이우디케아였다. 그는 솔리치족이 이동하기 전에 먼저 이곳으로 이동해 제전을 마저 준비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드루이드는 하에르비우라는 이름을 가진 드루이드였다. 그의 두 눈은 뭐랄까 기묘한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그건 제전을 주도하고 있는 페들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들미드가 양손을 들자 이우디케아와 하에르비우는 뾰족한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페들미드의 손이 내려오는 순간, 두 마리의 소는 긴 울음소리와 함께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제사를 돕는 드루이드들과 바티즈들이 나와 흰소의 목을 가르고 그 피를 그릇에 받은 뒤 페들미드에게 가져왔다.
페들미드는 두 그릇에 담긴 피를 신목의 뿌리에 부었다.
촤아아악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편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누가 신성한 제전 중에 입을 여는 것이냐? 당장 끌어내라!”
페들미드는 수염을 부들거리며 분노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그럴 필요 없소! 내 발로 나갈 것이니!”
그 말과 함께 웅성거리는 저들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자가 있었다. 그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안색이 창백한 것으로 봐선 길게 살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토우토릭스?”
그 모습을 알아본 다른 부족장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신성한 제전에 다른 자의 피를 묻히고 오다니!”
“불경하다!”
“불경한 족속이로다. 제전에 늦은 것으로도 모자라 피를 묻히고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잠시, 모두가 분노한 표정으로 그에게 소리쳤다.
이우디케아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부족장들과 달리 지금 이 자리에서 입을 열 수 있는 드루이드는 페들미드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페들미드는 손을 들어 부족장들의 입을 멈추게 한 뒤 토우토릭스에게 말했다.
“신성한 제사다. 어찌 된 일인지 밝혀라! 마찬가지로 너희 부족은 이번 일에 대한 불경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제전에 참석하고자 이동하다가 습격을 당했거늘, 우리에게 불경함에 대한 대가를 묻는단 말이오? 응당 그 대가는 우릴 습격한 자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습격?”
그 말에 주변의 모두가 웅성거렸다. 단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는 낭패한 표정으로 토우토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놈이 어떻게 살아있단 말인가? 분명 치명상을 입혔거늘 그리고 어떻게 벌써 이곳까지? 얼마 전에 생긴 길게 난 상처가 그의 뺨에서 꿈틀거렸다.
토우토릭스는 드러스트를 살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함쳤다.
“메투리치의 드러스트! 할 말이 없는가?”
토우토릭스의 사나운 말에 모두가 드러스트를 바라봤다. 드러스트는 짧게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카르페타니 영토가 다른 연맹의 부족들에게 침범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에 대한 보고는 제전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말한 바가 있으니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소. 그들은 솔리치 지역으로 향했고 우리는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소. 그뿐이오.”
준비했던 말을 타고 추격해 토우토릭스와 그를 따르는 수하 대부분을 처리했다. 특히 토우토릭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어 넘겼는데 저놈이 어떻게 살아 있단 말인가? 물론 놈이 강에 빠져 그 시체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살아 있을 정도의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한 가운데서도 드러스트는 차분한 어조로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뻔뻔한 놈! 네가 말한 자들이 솔리치 지역으로 향했는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혹 그들이 우리 지역을 향했다고 하더라도 대회합을 위해 이동하는 우리 부족을 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네놈은 외부 연맹의 침입을 핑계로 우리 부족을 말살하려 한 것이 아니냐? 정녕 그것이 의심되었다면 이곳 회합에서도 정당하게 그 부분을 추궁하였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네놈들은! 크흑!”
토우토릭스는 말을 하다가 상처가 도진 모양인지 고통에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토우토릭스의 말에 동조하는 인원들이 생겨나는 것을 확인한 드러스트는 다시 외쳤다.
“헛소리! 투르둘리의 아라인. 아라인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오. 그가 직접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카르페타니 영토를 넘었소. 이는 명백한 침략이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족을 습격한 켈티시 연맹 놈들을 따라 추격했다고 말했지. 놈들이 켈티시인지 투르둘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솔리치족을 격파하고 저들의 영토를 뒤지면 놈들의 흔적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소. 우리 부족은 카르페타니의 안녕을 위해 나선 것에 불과하오! 저들이 외부 연맹과 결탁했지만 회합기간 동안 그 증거를 빼돌리고자 한다면 그걸 대체 누가 알 수 있겠소?”
“옳은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군.”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음..”
과거 카르페타니는 일방적으로 메투리치족의 편을 든 셈이다. 물론 이해관계가 맞아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지만 솔리치 부족이 카르페타니 연맹에 불만을 가질 만하다고 여긴 부족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드러스트의 말에 동조했다.
주변을 훑어보던 드러스트는 도리어 토우토릭스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습격이라니? 본인은 500명의 전사로 정당한 대결을 펼쳤소. 정당한 결투에서 진 패배자 따위가 무슨 염치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냐?”
그러자 호전적인 부족장들은 멸시하는 표정으로 토우토릭스를 바라봤다. 회합 기간 중에 전쟁을 벌인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어쨌든 정당한 대결에서 패배한 패배자 따위가 이 신성한 장소에서 목소리를 높였단 말인가?
하지만 토우토릭스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우디케아와 눈을 마주치곤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표시를 했다. 자신의 인사에 이우디케아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짓긴 했으나 어쨌든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메투리치족만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치밀한 함정을 계획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이건 켈티시든 투르둘리든 외부 연맹이 침입하기 벌써 전에 계획된 함정이었다. 저들의 침입은 아주 적절한 핑계가 되어줬을 뿐이다.
솔리치 지역은 그리 풍요로운 지역이 아니다. 악연으로 얽힌 메투리치족이 아니라면 무리해서 차지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솔리치 지역에 야심을 보이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베토네스 연맹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네스 연맹과 많은 지역을 접경하고 있는 솔리치 지역은 전략적 거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 더, 솔리치는 주전파가 아니라 주화파에 가깝다. 따라서 이 일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일 수 있었다.
“습격이 아니라? 게다가 정당해? 500명의 전사로 우리를 쳤다고?”
그러자 드러스트는 뻔뻔한 얼굴로 외쳤다.
“패배자 따위가 열심히 짖어대는구나!”
“하하하하하”
“우하하하”
그러자 토우토릭스를 비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는 자들도 꽤 많았다. 토우토릭스는 저들의 멸시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시 외쳤다. 물론 그의 안색은 시시각각 창백해지고 있긴 했다.
“흥! 이걸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겠느냐?”
우루루루
그러자 그의 뒤편에서 나타난 자가 들고 있던 자루를 회합장 중앙에 집어 던졌고 그 안의 내용물이 우루루 쏟아져 흘러나왔다.
“이.. 이건?”
“귀?”
토우토릭스는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봐라! 네놈들 메투리치 놈들의 장식이 걸린 귀다. 이것들마저도 내 전사들의 귀를 잘라다가 허풍을 치는 것이라 지껄일 참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