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8화 (78/298)

# 78

78. 금과 은.

78.

이우디카엘은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그의 죽음은 고귀하고 영구적인 것이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죽은 자가 산자를 죽일 수도 없는 일이야. 자네가 그의 죽음을 들고 온 이상 그의 정당한 권리자라 할 수 있으나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네. 그건 보아디케아 그의 죽음에 먹칠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으니 더더욱 그러하네. 게다가 보아디케아는 이미 죽었네. 자네가 들고 온 이의 죽음은 벨리키라는 이방 사내의 것이야.”

서후는 이우디카엘의 눈을 바라보며 차근하게 입을 열었다.

“복수는 벨리키 본인도 원하지 않았고 저 역시 무분별하게 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뒷이야기를 들으니 메투리치족에 복수하는 일은 평화를 위해 죽은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이기도 하니 더더욱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솔리치족이 그에게 빚진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우디카엘은 말없이 서후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명을 뒤트는 자로다. 어찌 이런?”

서후는 영문모를 표정으로 이우디카엘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럴 수가. 설마 황혼이? 신들의 전쟁이?”

홀로 미친놈처럼 한참이나 뭐라 중얼거리던 이우디카엘은 몸을 덜덜 떨며 두려운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격렬하고 극렬하고 과격하고 뜨겁고 사납고 날카롭고 첨예한 운명이 끝없이 얽혀있으니 자네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란 말인가? 사람이 어찌 그 무게와 그 흐름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뭐라도 파악한 건가?’

“뭘.. 뭘 본 겁니까?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겁니까?”

서후의 질문에 조금 진정한 듯 다시 차분한 신색을 찾아가던 이우디카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네.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테세우스. 아니 태서후!”

서후는 나름 절실한 마음으로 ‘태서후’ 자신의 본래 이름을 밝혔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과거의 이름은 자네를 더 이상 규정하지 못하네. 그러니.. 크허헉.”

이우디카엘은 거기까지 말한 뒤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다량의 피가 터져 나온 것으로 봐선 각혈 수준이 아니라 내장까지 상한 토혈인 것으로 보였다.

서후는 놀란 표정으로 급히 쓰러지는 이우디카엘을 부축했다. 이우디카엘은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혼이 멀지 않았구나.”

허망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이우디카엘은 서후를 바라봤다.

“본래 원하던 바를 말해보게나. 나의 죽음은 자네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걸세. 그러니 본래 원하던 바나 말해보게.”

이우디카엘은 드루이드 가운데서도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누군가와 독대하던 중 사망했다면 그 누군가는 결코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서후는 자신이 항우와 리처드의 기억을 가지고 왜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고 불가사의한 일을 고심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덤으로 산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하지만 이우디카엘의 태도에서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미신에 미친 사람이 지껄인 소리라 여기기엔 그의 말과 행동 모두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궁금하다고 뭘 더 질문했다간 그대로 죽어버릴 판이네. 뭔가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든 드러나겠지. 그의 말대로 본래 목적에 집중한다.’

“······. 카르페타니 연맹 회합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혹 솔리치부족의 대표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어렵네.”

“그저 수행원으로 참석할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우디카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후에게 대답했다.

“솔리치 부족장에게 말해놓도록 하지. 태서후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걸세.”

서후는 태서후라는 이름이 더 이상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이우디카엘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랬다. 자신은 서후도 항우도 리처드도 아니다. 태서후가 바탕이 되긴 했지만 오롯한 태서후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부분에서 항우와 리처드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 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으로 말이다.

‘그래. 보아디케아를 죽이고 벨리키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살았듯이..’

심지어 태서후는 실제로 죽지 않았던가? 따라서 서후는 아니 테세우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제 이름은 태서후가 아니라 테세우스. 테세우스입니다.”

그렇게 인정해버리면 태서후라는 과거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라 여겼거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상황을 더욱 확실하게 인지하고 현재의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단순히 이름을 바꾼 것 때문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전과는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이우디카엘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랬구만. 하지만 그 이름은 곤란하군. 당분간 에드라는 이름을 쓰게나. 벨리키라는 이름을 사용할 생각이었겠지만 켈타이 내에선 그 이름은 여러모로 적절한 이름이 아니네. 멸족한 부족의 이름이라 불길하다고 여길 테고 무엇보다 과한 이목을 사게 만들 것이네.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얻은 정보를 토대로 카르페타니 연맹을 와해시킬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벨리키 때문으로 보기엔 과하다고 보는 것인가? 그 이름을 가지고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 품을 의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네만..”

“······.”

테세우스가 침묵을 지키자 이우디카엘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자네에겐 증오심이 보이지 않네. 그뿐이네. 자네가 누구든, 어떤 일을 벌이든 켈타이인을 멸족시키지는 않겠지. 와해할 수 있다면 그리하게나. 그것도 내게는 나쁜 일이 아니라네. 그 또한 자연의 섭리일 것이니..”

“음..”

이우디카엘은 그 자리에서 서신에 자신의 피를 찍어 켈타이언어로 무언가를 기록하더니 그것을 테세우스에게 건네줬다.

“자. 이것을 솔리치족 부족장 토우토릭스에게 가지고 가게나. 그럼 자네 뜻대로 될 걸세. 나는 아무래도 휴식을 취해야겠군.”

*

솔리치족과 함께 움직이게 됨으로 자연히 에고르 등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테세우스는 저들에게 베토네스 지역으로 물러가 있도록 지시했다.

“이우디카엘님의 친필서한이라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보니 본인이 직접 브리타니아 지방에서 온 건 아닐 테고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에서 살았던 분인가?”

테세우스는 이우디카엘이 준 이름에서 비롯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토우토릭스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테세우스를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이우디카엘님이 브리타니아 지방에 가셨을 때 맺은 인연이었나 보군. 하지만 명심하도록. 회합장에서 에드 너는 한마디 말도 뱉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이우디카엘님과 인연이 있는 자라고 해도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부족장의 권한으로 너를 죽일 것이다. 이 같은 자리는 너 같은 이방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자리임을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당연히 무리할 생각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테세우스는 혈혈단신에 불과하다. 전보다 능력이 발전하긴 했지만 혼자 미친 척하고 날뛰다간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미 목적했던 바를 이뤘기에 테세우스는 얌전히 수행원으로 저들의 회합을 지켜보다가 베토네스 지역에 몸을 숨기고 있는 에고르와 합류하여 루시타니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것도 없다. 어떻게든 증거가 남는다.

쉬이이익 쐐에에엑

테세우스는 솔리치족이 지급한 방패를 급히 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퉁 투퉁 퉁

솔리치 부족장 토우토릭스가 휘하 500명의 전사들에게 소리쳤다.

“막아라!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막아라!”

그런 뒤 재차 다시 외쳤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사들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격하라!”

와아아아아

전방의 전사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자 토우토릭스가 이미 활을 쏠 준비를 마친 후방의 궁수들에게 소리쳤다.

“화살을 날려!”

쐐에에엑 쐐에엑

행진 중 습격을 받은 셈이거늘 즉각적인 전투전환에 테세우스는 이들의 저력을 확인했다. 몇 번의 화살이 쌍방 간에 오간 후 저 멀리 붉은 머리칼을 지닌 한 전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바로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였다.

“토우토릭스! 네놈이 감히 외부의 세력과 결탁해 메투리치 전사들을 죽여?”

“무슨 개소리냐?”

“메투리치의 전사를 죽인 자들이 너희 영토로 향하는 흔적을 발견했다! 켈티시든. 투르둘리든 혹 또 다른 누군가이든 당장 놈들을 내놔라. 또한 너희 솔리치족 역시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테세우스는 드러스트의 외침에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뿌린 불화이니 네가 감당하라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감히 신성한 제전으로 향하는 길에 습격을 가하다니! 네놈들 메투리치 놈들은 반드시 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으드득. 뭣들 하느냐! 당장 쳐라!”

“흥!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모조리 죽여라!”

그러자 몸을 숨기고 있던 모든 메투리치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솔리치족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숫자였다. 드러스트는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토우토릭스! 오늘 네놈의 목을 베고 솔리치족을 영원히 지워버릴 것이다!”

토우토릭스는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메투리치족 전사가 외곽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자신도 들었다. 일단 여기서 자신들을 죽이고 솔리치족을 죽인 후 회합장에서 가서 자신들은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거짓부렁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하여 회합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하여 자신들을 기다린 것이리라. 회합장에 들어갈 수 있는 전사의 숫자는 각 부족마다 50명, 회합장 외부까지 포함하면 500명이 한계다. 그조차 많은 숫자로 그 이상의 전사들은 불화를 일으킬 수 있기에 이는 굳은 약속으로 정해진 일이다.

마찬가지로 말을 이끌고 오는 것 역시 금했다. 최소 27개 부족의 500명이면 총 13,500명이다. 그 주변에 1만 3천여 마리의 말이 우글거린다고 생각해보라. 켈타이족의 신성한 공간이 말똥 냄새로 뒤덮이고 남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 비열한 메투리치족은 그 사실을 이용해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데리고 매복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메투리치족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 말은 다시 말해 토우토릭스 자신은 물론 부족전사 전부를 이곳에서 죽이겠다는 뜻과 동일했다.

보이는 것이 두 배지, 그 이상 되는 인원이 매복해 있을지도 몰랐다.

‘대가 한 번 제대로 치르는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벨리키의 핏값을 여기서 받아내리라.’

테세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금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받아냈다.

투우웅

날카로우면서 묵직한 충격이 방패를 울렸다. 테세우스는 오른손에 든 검으로 이미 방패에 빼곡하게 꽂힌 화살을 모조리 쓸어냈다.

후두두둑

아예 방패를 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화살이 여기저기서 빗발치고 있었기에 아직은 필요했다. 검으로 쳐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방패가 더 유용했다.

솔리치 부족장, 토우토릭스는 생각을 바꿨다. 이기려는 전투를 하면 안 된다. 크게 대패하더라도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전략을 고수해야 한다. 그렇게 탈출한 뒤 대회합장에서 이 일을 밝힌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토우토릭스는 도리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야 어쨌든 패주한 자신의 말을 오만한 다른 부족장들이 귀나 기울이려고 할까? 드루이드라면 다를 수 있지만 이우디카엘 계보에 속한 몇몇 드루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락한 지 오래. 그들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솔리치 부족으로 회군한다면 제때 회합장에 도착하지 못하리라. 드러스트는 전사들을 이끌고 회합장으로 향할 것이고 그가 남긴 메투리치 전사들은 토우토릭스가 회합장에 도착하려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렇게 회합이 끝나면 솔리치는 고립당하고 만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건 훨씬 더 위험한 사태를 초래한다.

드러스트 저놈은 그것까지 계산하고 습격을 가한 것이리라.

토우토릭스는 끌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족장님! 어떻게 합니까?”

“메투리치 놈들의 숫자가 아군을 압도합니다. 회군하여 부족 전사들을 더 불러 모아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뚫고 가기엔 피해가 너무 클 것이오!”

그야말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 가운데 테세우스는 그저 조용히 토우토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메투리치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회합장으로 향한다. 으드득! 드러스트. 이노옴! 반드시 이 대가를 물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앞길을 가로막는 메투리치 놈들을 모조리 도륙해라!”

우아아아아아아

우아아아

토우토릭스가 그리 외치며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솔리치 전사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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