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7화 (77/298)

# 77

77. 금과 은.

77.

“그래야 한다면! 하지만 일단은 솔리치족의 영토로 이동한다.”

바닥에 떨어진 투르둘리 연맹의 증표를 발견한다면 의견이 분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것도 카르페타니 연맹의 영토에서 카르페타니 연맹에 속한 전사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투르둘리 연맹의 증표가 발견됐다.

카르페타니 연맹은 반드시 투르둘리 연맹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전사들을 이끌고 카르페타니 연맹에 다다른 아라인에게 묻겠지. 성급한 자들이라면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해 두 연맹 가운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오히려 더욱 복잡한 상황에 직면한다.

카르페타니는 왜 병력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냐고 추궁할 것이고 이에 아라인은 켈티시 연맹의 전사들을 추격해왔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도리어 삼자 간 극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정황을 감안하면 바로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일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아라인이, 그러니까 투르둘리 연맹이 습격당한 일은 사실이다. 바로 켈티시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 그러니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투르둘리 연맹만 습격을 당한 것이라면 카르페타니 연맹이 협조하는 모양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전사가 습격당한 마당에 습격자로 여겨지는 투르둘리인에게 협조할 리가 없다. 동시에 켈티시 연맹도 의심하겠지.

‘투르둘리로서도 의아해할 것이다. 켈티시 연맹에 속한 자들이 왜 카르페타니에 진입한 것인지? 혹 이들이 켈티시와 투르둘리 사이를 이간질하고자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지까지도 의심할 것이다.’

루시타니아를 압박하는 일에 세 연맹이 협조하는 분위기였기에 당장 전쟁으로 심화 될 리는 없다. 베토네스 연맹의 일도 있고 자신들끼리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강력한 의심의 씨앗을 저들 깊숙한 곳에 심은 셈이니까. 그렇게 심은 씨앗에 거름과 물을 주면 언제고 자라서 이들의 결속을 완전히 갈라버릴 것이다. 단 백 명만으로 수만에 이르는 세 연맹을 농락한 셈이다.

서후의 곁에서 얼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에고르는 서후의 계략에 기가 질려버렸다. 이런 자를 적으로 돌리면 잔뿌리 한 터럭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멸절당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심기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 자처럼 용맹한 전사는 지금껏 본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자가 손을 쓰기 시작하면 그때는 너무 늦는다.

“당신을 노린 자들을 제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서후는 눈매를 좁히며 에고르를 바라봤다. 에고르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모르지 않았다. 세르토리우스에게 반역의 기미가 보일 만한 족속은 그 뿌리마저 말려버릴 생각이었다. 그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에고르는 급히 부복하며 외쳤다.

“목숨은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 목숨을 당신께 바칠 것입니다. 이를 어긴다면 에수스(Esus)께서 나를 도끼로 반으로 쪼개고 그의 세 마리 학으로 하여금 내 내장을 갉아 먹기를 자처하겠나이다.”

에수스는 싸움의 광란신으로 오딘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았다. 싸움에 광란을 가지고 와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며 그 피를 취하는 신으로 그의 신자는 전장에서 죽인 적의 피를 바치거나 제물의 피를 바치곤 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루시타니아인 전부가 그에게 부복했다. 이들은 에고르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에고르의 충성맹세는 곧 이들 전부의 충성맹세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을 하는군. 하지만 적을 죽이는 일보다 아군을 얻는 일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지.”

서후는 그리 말한 뒤 에고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 일은 네 뜻대로 하라. 관여치 않겠고 관련자들을 묻지도 않겠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서후는 이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물론 공식적으로도 이들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것도 목숨으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용맹한 전사 백 명을 말이다. 수천의 적을 죽여도 충성을 다할 전사 백 명은 얻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기사계급이다. 루시타니아 내의 고귀한 가문 출신이라는 소리다. 이들의 충성을 확보했다는 건 결국 루시타니아 내에 막대한 지지기반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유화책을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자들은 맹세한 대로 에고르가 처리할 것이니.

에고르는 그 자신과 따르는 자들은 물론 서후에게도 최선의 타협안을 내놓은 셈이다.

하지만 이를 서후가 의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피를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되도록 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모를 서후가 아니었기에 이들을 얻고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연히 이뤄지는 일이 어디 있을까? 헤엄치지 않는 물고기는 가라앉거나 물 위에 둥둥 뜨고 날개짓 하지 않는 새는 바닥으로 쏜살같이 추락한다.

*

“너무 위험합니다. 테세우스님께서 지금까지 벌인 일만 해도 대단한 성과입니다. 솔리치족을 치는 것도 아니고 홀로 저들의 드루이드를 만난다는 건 너무 위험한 발상입니다. 대체 뭘 위해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테세우스님께선 분명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제게 거짓을 말씀하신 겁니까?”

에고르가 극구 만류하는 어조로 서후에게 말했다. 이들은 현재 솔리치족 영토를 앞에 두고 은신하고 있었다.

서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당시에 내 수하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입에 담은 적은 없다. 카르페타니 연맹 내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선 당연히 카르페타니 연맹에 속한 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벨리키와의 인연은 그것을 도모하기에 충분한 도구가 된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솔리치부족은 결국 벨리키라는 자를 버린 셈입니다. 악연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테세우스님 역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타당한 의견이나 내 예상이 맞다면 저들은 벨리키에게 큰 빚을 졌다. 따라서 벨리키의 증표를 가져온 나를 적어도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말대로 그렇지 않다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겠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위협을 무릅쓸 이유도 없겠지.”

“후우. 정히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

서후는 일련의 소란을 겪었지만 솔리치족의 드루이드와 독대하고 있었다.

드루이드는 오른손엔 오크 지팡이, 왼손엔 파나케아를 잘라 만든 황금 낫, 흰옷에 금 흉패와 기묘한 문양의 버클을 두르고 있었다. 서후를 자신이 기거하는 동굴로 데려온 드루이드는 지팡이와 낫을 주변에 내려놓고 나무그릇으로 통에 담겨있는 물을 뜨면서 말했다.

“자연의 섭리대로 돌고 돌아 그 인연자를 이곳에 다시 불러들였구나.”

드루이드는 각종 교양, 역사, 정치, 천문, 지리, 약학, 음악 등 모든 분야에 두루 정통해야 했기에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선 최소 20년 이상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한 사람에게만 지식을 전수 받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니며 배웠기에 이들은 켈타이 사회의 지식인 계층이었다. 당연히 드루이드는 켈타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 존재이기에 각 부족마다 드루이드가 한 명씩은 꼭 존재했다.

드루이드의 업무는 너무나 광범위했기에 그에 따라 분할된 업무를 지닌 자들이 나타나는데 첫째 입법자로서의 진정한 드루이드, 제사와 정치를 돕고 드루이드의 대변자인 바티즈, 마지막으로 기록자로서의 바드가 존재했다.

흰 수염과 흰 머리칼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피부를 가진 이우디카엘은 켈타이인들의 존경을 두루 받는 인망 높은 드루이드였다. 그가 6월에 대대적으로 행하는 제전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에 기거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서후는 솔리치족과 대화는커녕 혈전을 벌여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이번만큼은 운이 좋았다.

유리알처럼 말간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던 이우디카엘은 은은한 향이 피어나는 미지근한 물을 서후에게 건네줬다.

“마시게나. 버드나무 가지를 우린 물이라네. 상처를 진정시키고 염증을 줄이며 열을 내리는 작용이 있는 약초일세.”

서후는 말없이 그 물을 모두 비웠다. 별로 좋은 맛은 아니었다.

“버드나무는 좋은 약재일세. 보아디케아 역시 솔리치 부족에 그런 존재였지. 하지만 잊혀진 존재라네. 나이가 들어 무기를 잡을 수 없는 자들이나 기억할 뿐이지.”

벨리키를 특정할 수 있는 물품이라곤 그가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던 오래되고 작은 솔리치족의 문양이 전부였다. 당연히 전혀 보지 못한 외부인이 자신들의 문양이긴 하나 본래 누구의 것인지도 특정할 수 없는 문양을 지닌 서후를 강하게 적대했다.

하지만 서후는 벨리키가 부족을 위해 추방될 정도의 인물이었고 드루이드라는 존재가 식견이 있는 존재라면 문양의 주인을 알아볼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다행히 그의 예상대로 이우디카엘은 그 문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벨리키가 만든 두 자루의 검은 증표가 될 수 없었다. 서후가 보유하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은 그가 솔리치족을 떠난 지 한참 후에 만든 검이었으니까.

“벨리키의 본명이 보아디케아인 겁니까?”

이우디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벨리키는 북쪽 칸타브리 연맹에 속한 부족의 이름이네. 벨리키. 벨리키라 그는 남은 평생을 자신을 탓하며 살았군. 쯔쯔.”

“사연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전에 말해보게. 보아디케아는 죽은 건가?”

“예. 메투리치족에 의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메투리치족은 모두 죽였지만 그 역시 치명상을 입은지라 결국 죽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메투리치족이 벨리키를 추방하길 원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렇게 되었구만. 혹 차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은 보아디케아의 작품인가?”

“그렇습니다.”

“볼 수 있겠나?”

이우디카엘의 요청에 서후는 말없이 두 자루의 검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살펴보던 이우디카엘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보아디케아 그는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나?”

“그를 마우레타니아의 팅기스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루시타니아를 거쳐서 마우레타니아로 향했군. 이 검은 루시타니아인들이 주로 쓰는 형태의 검이야. 그 영향을 받은 것 같군.”

직선으로 곧게 뻗은 검 말고 유려한 곡선이 들어가 날렵하게 빠진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우디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검을 서후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북부지역은 혼란하기 그지없지. 테우타테스(Teutates), 타라니스(Taranis) 에수스(Esus) 신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네.”

이우디카엘이 언급한 세 신은 모두 피와 전투와 광기를 즐겨하는 모두 호전적이고 잔인한 신들이었다.

“수십 년 전 칸타브리 연맹의 벨리키족은 부족의 존폐가 달린 위기 앞에 자신들을 위해 싸울 전사를 모집했네. 혈기와 힘이 대단했던 보아디케아는 그것에 응했지. 그는 대장장이로서도 전사로서도 뛰어났다네. 그와 함께 솔리치족의 젊은 전사들이 그와 함께 벨리키족을 위해 싸우러 북쪽으로 향했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네. 보아디케아 그가 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이상, 그때 일을 알 수 있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

서후는 말하지 않고 이우디케아의 말을 기다렸다.

“수년 뒤 보아디케아는 돌아왔네. 그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그의 마음엔 어둠이 가득했지. 그는 내게 그곳에서 만난 사랑하던 여인도, 함께 싸우던 전우도, 벨리키족마저 모두 죽었다고 했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이야기에선 메투리치족과 원한을 맺은 일은 없는 것 같군요.”

“벨리키족은 아바리진족과 전투중이었네. 아바리진족 역시 용병을 모집했고 공교롭게도 메투리치족과 부족장 아들이 그 진형에 속해 있었지. 간단히 말하겠네. 지금은 벨리키족도 아바리진족도 존재하지 않네. 모두 전쟁의 참화 속에 멸족했네. 그 일은 함부로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네. 어쨌든 그 뒤의 일은 자네가 아는 내용과 비슷하네만 지금도 그렇듯이 메투리치족은 호전적인 부족이네. 저들은 그 일을 빌미 삼아 솔리치족에 쳐들어왔지. 공교롭게도 그 전투는 보아디케아가 부족으로 돌아오기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네. 돌아온 보아디케아는 부족 내에 일어난 참상을 목격하고 그 즉시 전사들을 이끌고 메투리치족을 쳐 그들의 부족장과 메투리치족 전사 대부분을 참살했네. 전쟁이 계속되면 두 부족과 연관된 부족들까지 참전할 테고 그러면 대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지. 그래서 카르페타니 연맹은 그 일을 중재하러 나섰네. 메투리치족은 보아디케아의 목숨을 요구했네. 하지만 솔리치족은 부족의 영웅인 그를 그리 허망하게 죽일 수 없었지.”

“흠. 하지만 솔리치부족장이 그를 경계했군요. 전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니 기회라 여겼을 테고. 벨리키는 그 책임을 지고 죽은 자처럼 영원히 이곳을 등졌군요. 카르페타니 연맹은 그 일로 중재할 수 있으니 강력하게 추진했을 테고 말입니다.”

“그렇네.”

“벨리키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없지만 그 일은 명분이었을 뿐. 침략야욕이 당시 메투리치족에게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벨리키가 분쇄한 셈이니 솔리치족은 벨리키에게 빚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혈전으로 벌어질 일도 그가 무마한 셈이니.. 그렇지 않습니까?”

이우디카엘은 눈매를 좁히며 서후를 바라봤다.

“벨리키. 벨리키라. 그 이름이 더 어울리는 이름이겠구만. 그래서 무엇을 요구할 참인가? 혹 메투리치족과의 전쟁을 원하는 것이라면 나부터 거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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