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5화 (75/298)

# 75

75. 어둠조차.

75.

이미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 들어섰건만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후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를 품은 시냇물을 손으로 훔쳤다.

촤아악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손에 있던 핏물을 얼마간 씻어냈다.

철벅 철벅

서후의 뒤를 따라 루시타니아인들이 냇가를 건너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후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참나무과인 낙엽활엽수인 오크나무 사이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참고로 오크나무는 떡갈나무에 가까운 나무였다.

“드루가 많이 자라고 있는 신성한 지역입니다.”

에고르가 착 가라앉은 어조로 서후에게 말했다.

드루는 켈타이어로 오크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켈타이인들은 오크나무로 신목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이것을 담당하는 제관을 드루이드라고 불렀다.

켈타이 사회는 크게 두 종류의 계급으로 분류된다. 드루이드와 전사 계급이다. 대부족장과 같이 왕에 해당하는 자가 있기는 하나 이는 제관인 드루이드가 신의 의지를 물음으로 고귀한 가문 가운데서 왕이 선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 권한은 대개 드루이드가 쥐고 있었다. 나머지 켈타이인들은 그들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노예계급에 가까웠다.

신을 숭배하기는 하나 실질적인 정치는 모두 인간에 의해 이뤄진 로마인들과 달리 켈타이 사회는 미신적인 요소가 훨씬 더 강했다. 때문에 서후는 에고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서후는 벨리키에게 들었던 켈타이 사회의 특성을 떠올리며 말없이 자신을 따르는 루시타니아인들을 훑어봤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서후는 다시 에고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성하다라. 신목으로 삼는 건 드루에 파나케아가 달라붙어 있는 나무가 아니었던가? 모든 드루가 신성하진 않을 텐데?”

히스파니아 지역 어디서도 오크나무를 발견할 수 있기에 모든 오크나무가 신목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오크나무를 베어 사용하거나 그 나무의 열매를 함부로 따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파나케아는 겨우살이과의 상록 기생 관목으로 대개 팽나무나 너도밤나무에 달라붙어 기생한다. 오크나무에 기생하는 경우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드루이드들은 파나케아가 휘감은 오크나무는 신의 의지가 깃든 나무라고 여겨 이를 신목으로 삼았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주변을 보십시오. 지나온 곳과 달리 드루만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주변 부족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 분명합니다.”

히스파니아 지역은 어디를 가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다. 오크나무뿐만 아니라 전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등 수많은 나무들이 제 모습을 우람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대서양에 가까운 지역의 나무들은 이러한 나무들이 주를 이루지만 지중해 지역으로 근접하게 되면 버드나무, 포풀러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라임나무, 참나무 등이 주로 자생하고 있었다.

나무의 분포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과 달리 오크나무로만 이루어진 지역이라는 건 주변 켈타이인들이 그렇게 되도록 관리를 해왔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서후는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에고르에게 말했다.

“잘 됐군,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동한다.”

“하지만 신성한 지역에 무기를! 그것도 피 묻은 무기를 들고 들어서는 건!”

“그러니 잘 되었다는 소리다. 주변 켈타이인들이 행여라도 이곳을 잘못 찾아올 리는 없을 것 아닌가?”

“전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전투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저주받을 것을 두려워 한다라? 우습군.”

“그런 것이 아니오라!”

서후는 가만히 손을 들어 에고르의 말을 막고 루시타니아인들을 향해 켈타이어로 말했다.

“여자와 아이까지 모조리 죽이러 이동하겠느냐? 아니면 너희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곳에 몸을 숨겨 덧없이 피 흘리는 일을 피하겠느냐? 말하라!”

그러자 루시타니아인들은 작게 웅성거리며 저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서후에게 말하는 자는 없었다. 서후는 그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피를 보지 않기 숨은 것이니 너희의 신도 양해해주겠지. 약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러니 정 꺼림칙하거든 말해. 강자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것이라고.”

서후는 강렬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서후의 명령에 이 주변을 께름칙해 하던 루시타니아인들이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휴식은 다름이 아니라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적과 싸워 승리하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일단 잘 먹어야 했다.

서후 역시 오크나무에 등을 기대앉으며 에고르에게 입을 열었다.

“왜 그를 살리려고 했지?”

에고르에게 질문을 던진 서후는 품에서 육포를 꺼내 물어뜯었다.

으드득

질겅질겅

고기는 씹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고 무엇보다 맛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고르 역시 서후의 주변에 풀썩 앉더니 품에서 역시 먹을 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송구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코쿨 아인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중년의 노련한 전사였던 그가 제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죠.”

“친한가?”

“그 뒤로 교류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코쿨 아인의 아들 아라인’이라는 이름이 최근 들어 여러 번 언급되었기에 그에게 그런 아들이 있구나 라고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에고르 역시 먹을 것을 입에 털어 넣고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서후는 가죽에 담긴 포도주를 마신 다음 에고르에게 건넸다. 에고르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목을 적신 후 서후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질문해도 됩니까?”

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고르가 말을 이었다.

“카르페타니에 들어서면 어쩔 계획입니까?”

에고르는 서후가 심중에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서후는 에고르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부족이 연합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 히스파니아의 켈타이족이다. 현재 루시타니아 연맹이 아군을 자처하고 있으나 이들이 완전한 아군도 아니고 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루시타니아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어느 연맹이든 서로 비등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의 행보에 유리하다. 현재 루시타니아 압박을 주도하고 있는 연맹은 바로 카르페타니. 켈타이냐 아니냐 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떠나서 어쨌든 다른 연맹들이 카르페타니에 동조하고 있다는 건 그럴만한 역량을 갖춘 곳이라는 걸 방증한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카르페타니는 남쪽으로는 로마의 바에티카를, 동쪽으로는 켈티브리 연맹을 두고 있다. 둘 모두 쉬이여길 수 없는 곳이다. 특히 로마의 바에티카! 그러니 확인해봐야 한다. 이들이 정치적 압박을 통해 베토네스 연맹을 삼키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등을 말이다. 다른 연맹을 선동한 것을 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후자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을 확인하면 로마의 관계라던지 저들의 약점을, 무엇보다 저들의 동기를 개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더 생각해봐야 어차피 지금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머리를 어지럽힐 뿐이니..’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특정할 수도 없다. 필요 이상의 추측은 무의미한 생각의 나열일 뿐이다. 따라서 보다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다.

카르페타니가 로마에 적대감을 품고 있는 연맹이라고는 하나 모든 이들이 그러할까? 그 강대했던 카르타고마저 로마에 굴복한 마당에? 그건 알 수 없는 거다.

‘화살을 쏘는 일 자체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화살을 날린다면 아군이 그 화살에 맞아 죽는다. 그렇게 무분별하게 화살을 날린다면 결국 주변의 모두가 적이 되어 달려들겠지.’

수많은 부족들이 모인 연맹체다. 그 가운데는 적이 될 자들도 아군이 될 자들도 있겠고 반드시 아군으로 만들어야 할 이들도 반드시 처리해야 할 적도 있을 것이다. 카르페타니에 다다르면 얼추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서후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이뤄진다면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에고르에게 밝힐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서후는 말을 아꼈다.

“카르페타니의 솔리치 부족이 투르둘리 연맹과 접경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나?”

에고르가 루시타니아인이라고 해서 모든 켈타이 부족의 위치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카르페타니 연맹 내의 부족만 해도 27개다. 소규모 부족까지 계수하면 그 수가 훌쩍 넘는다. 히스파니아 전체로 확대하면? 그 모든 걸 꿰고 있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하지만 솔리치 부족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는 에고르도 알고 있었다. 벨리키의 사건을 조사하며 다시 한번 확인한 것도 있었지만 그전에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솔리치라고? 에고르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예. 제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럴 겁니다. 그 주변에 메투리치 부족도 존재합니다. 투르둘리와의 접경면적을 뜻하는 것이라면 메투리치 부족이 오히려 더 넓습니다. 솔리치 부족은 투르둘리보다는 베토네스 연맹과 접경하고 있는 곳에 가깝습니다.”

“카르페타니로 향하는 이유가 벨리키 때문이냐고 묻는 건가? 에고르,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음..”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으나 그 때문은 아니다.”

에고르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육포를 입에 마저 털어 넣는 서후에게 말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라인이 살아남았고 투르둘리 차기연맹대표로 거론되는 이상 대규모 추격병을 보내올 수 있습니다. 전에 만난 200명의 전사들 역시 그 주변에서 당장 가용한 전사들이었을 뿐이니 그 정도 숫자의 추격대가 여럿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들 모두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습격을 지시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를 살려둠으로 생각보다 조직적이고 신속하게 대응하겠지만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서후가 아라인을 살려 보낸 건 그가 투르둘리 차기연맹의 대표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에고르와 얽혀있는 개인적 관계는 지금 들었으니 당시에 서후가 아라인을 살려 보낸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에고르의 호소보다는 차기연맹 대표라는 직함 자체가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살려 보낸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던 에고르는 놀란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켈티시와 투르둘리뿐만 아니라 카르페타니와의 분란도 계획하고 계셨던 겁니까?”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아라인이 전사를 이끌고 카르페타니의 영토를 넘는다면 그건 그대로 꽤 많은 분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서후는 대답하지 않고 어둑한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북두칠성을 바라봤다.

북극성은 밝게 빛나는 별이 아니기에 북극칠성을 찾은 뒤 찾으면 더 수월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북극성은 방향의 지표가 되는 주요한 별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후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본 에고르는 서후가 방향을 가늠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말이 필요하다. 근방에 말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나?”

이대로 북상하여 투르둘리와 마찬가지로 켈티시의 영토를 휘저어놓고 베토네스를 경유해 카르페타니로 들어서고자 했지만 아라인이라는 존재를 만난 서후는 계획을 바꿨다. 처음의 계획도 우회하는 길은 아니었으나 이곳에서 바로 카르페타니로 향하는 것보다는 우회로였다.

따라서 서후는 카르페타니로 바로 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투르둘리인은 숲에 남은 흔적을 따라 열심히 자신들을 쫓아올 것이다. 자신이 만난 아라인이 유명한 자가 맞다면 제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추격해 올 테니까.

에고르는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곳이 신성한 곳이 맞다면 멀지 않은 곳에 준마를 기르는 목장이 있을 겁니다.”

참고로 서후의 아랍 순종 흑마는 팅기스에 두고 왔다. 말을 태우고 항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을 탈취한 뒤 바로 카르페타니로 질주한다. 말을 탈취한 후에는 투르둘리 연맹으로 변장해라.”

대체 어디까지 기만하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조차 그에겐 기만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따라서 에고르는 서후의 생각을 가늠하려는 것을 그만두었다.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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