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3화 (73/298)

# 73

73. 어둠조차.

73. 어둠조차.

강가로 울창한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수목은 저들끼리 얽히고설켜 달빛조차 통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빛이 없다면 지나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으슥한 밤이었다. 횃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을 항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두려운 일이다.

물밑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이런 야밤에 물에 빠진다면 어디가 육지인지 분간이라도 할 수 있으랴? 간혹 물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조차 일렁이는 형체를 가진 괴물로 보일 지경이다.

촤아악 촤악

노 젓는 소리와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 적막 가운데 울려 퍼졌다.

그런 적막을 산산이 깨뜨리는 고함이 있었다.

“배를 멈춰라! 네놈들은 어디 부족이길래 켈티시 연맹의 강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냐?”

적막이 주는 기이한 한기에 둘러싸여 있던 자들은 적대감 어린 고함이 도리어 안도를 주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에고르는 급히 서후를 바라봤다.

그러자 서후는 말없이 횃불을 가리키더니 끄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에고르는 그 즉시 서후가 지시한 대로 횃불을 들고 있는 모든 자에게 불을 끄게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긴박한 상황이니 일단 따르고 볼 일이었다.

서후와 에고르와 함께하는 자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눠타고 있었다. 앞서 이동하던 에고르의 배가 불을 끄자 뒤따르던 자들도 급히 횃불의 불을 껐다.

그나마 주변을 밝히던 횃불마저 사라지자 이 일대는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어디로 갈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자연히 노를 젓는 손길도 멈췄다.

강 저편을 환하게 밝히며 서후가 있던 곳으로 이동하던 자들 가운데 누군가 다시 소리쳤다.

“배를 멈추고 정체를 음?”

갑자기 이쪽의 위치를 알려주던 불이 모두 사라지자 당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야음을 사납게 가르는 기이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피이잉

“커허억!”

풍덩

고함을 치던 자는 화살에 목을 얻어맞은 채 그대로 물속에 빠졌다. 날카로운 활촉에 목이 꿰뚫렸으니 즉사나 다름없었다.

“스.. 습격이다! 습격이야!”

“이놈들이!”

저편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에고르는 놀란 눈으로 서후에게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들을 피해 가도 시원찮을 판에 켈티시의 영역에서 저들을 건드리면? 잠깐. 설마??”

“무슨 의미인지 알았으면 서둘러 화살이나 창이나 날려!”

서후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화살을 활에 잰 다음 가차없이 저들을 향해 날렸다.

쐐에에엑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서후가 쏘아낸 화살은 다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그 모습에 에고르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의 루시타니아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들 역시 배에 마련된 활을 꺼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재 쓰고 있는 활은 가장 기초적인 활 형태인 직궁이었다. 직궁은 활의 형태가 반원형을 이루는 활의 발전사 중 가장 초기형태의 활이다. 당연히 다른 활에 비해서 파괴력이나 사거리가 떨어지기에 활을 잘 다루는 국가에서는 사장된 활의 형태다. 다만 이런 직궁에 예외가 있다면 영국의 롱보우인데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니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서후는 이들과 다르게 팅기스의 상인에게 구한 파르티아의 복궁을 사용하고 있었다. 복궁은 활 두 개를 이어붙인, 즉 낙타의 몸에 달린 두 개의 혹처럼 생긴 활이었다. 당연히 직궁보다 사거리나 파괴력이 강했다.

전장에서 승리하려면 근거리도 근거리지만 원거리에서부터 적을 제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서후는 1년 동안 활쏘기도 틈틈이 병행했다. 수사자의 공격도 피할 정도로 엄청난 반사신경을 가지고 있는 서후인지라 활쏘기 역시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신기에 이를 정도의 궁술을 배양한 것은 아니었다.

저들을 향해 화살을 쏘던 서후는 전부터 하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각궁. 그러니까 복합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서후 자신이 대장장이 일을 배웠다지만 그가 주로 다룬 건 철이다. 가죽이나 나무를 비롯한 다른 재료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럴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서후가 무기를 제련하는 것에 있어서는 파이살마저도 앞질렀지만 파이살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대장장이였다. 만약 복합궁을 제작할 마음이 있다면 그의 협력을 얻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참고로 각궁과 같은 대부분의 복합궁은 활줄을 풀어놓았을 때 역으로 휘어버리는 활대를 가진 만궁인 경우가 태반이다. 복합궁은 모든 활 중에 가장 강력한 활의 형태다. 그러니 활을 계속적으로 사용할 생각이 있다면 복합궁을 개발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볼 일이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파르티아산 복궁처럼 로마군의 활을 개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서후는 파이살에게 파르티아산 복궁을 건네주며 이걸 개량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건네준 적이 있었다.

‘등자와 복합궁으로 무장된 궁기병이 탄생하면 칭기스칸의 역사를 내 손으로 이룰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일단 보류다. 영토 따위는 별 관심도 없고.’

말 위에서 갑옷마저 뚫어버리는 강력한 화살을 자유자재로 날릴 수 있는 궁기병을 양성한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군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칭기스칸이 어떤 식으로 병력을 운용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었다. 병력을 통솔하고 운용하는 건 항우와 리처드의 경험으로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우려가 되는 점이 없잖아 있었기에 그 계획은 훗날로 미뤄뒀다. 어쨌든 최강 병종을 만들어 낼 방법이 자신에게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필승의 방책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서후는 다시 활대에 화살을 대고 당겼던 활줄을 그대로 놓았다.

피이잉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공격을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던 켈티시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서후군의 화살공격에 노출됐다. 그 결과는 당연히 죽음이었다.

서후는 활을 날리며 에고르에게 손짓했다. 배를 가까이 움직이라는 서후의 제스처에 에고르는 그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했다.

배 위에는 이미 모든 자들이 화살의 과녁이 되어 배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백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두 세발씩만 쏴도 수 백발이다. 50 명도 되지 않는 정찰대에 불과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습격을 당한 셈이니 전멸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간간이 꿈틀대는 자들이 있었지만 죽은 자들까지도 확인사살하라는 서후의 냉정한 명령에 이내 곧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

푹 푸욱

확인사살을 행하는 루시타니아인들을 바라보던 서후는 에고르에게 말했다.

“켈티시연맹을 특정할 수 있는 증표는 모조리 챙겨라. 연맹을 특정할 수 있는 방어구, 무기, 장식 등이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

에고르는 서후의 보다 명료한 명령에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켈티시와 투르둘리 두 연맹을 이간질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에고르는 가만히 서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밤사이 다시 두세 차례의 정찰대와 마주쳤지만 비슷한 방법으로 모두 처리한 서후의 별동대는 켈티시와 투르둘리 연맹의 증표를 두루 챙긴 다음 동이 트기 전에 강가에 상륙했다.

“여기서부턴 도보로 이동한다.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아침이 되면 강 위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풀어 조사하기 시작할 거다.”

서후의 발언에 에고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침에 대대적으로 출병한 두 연맹은 감정이 격화되어 싸울 확률이 매우 높았다. 운이 매우 좋으면 감정이 상한 정도로 대치하는 수준에 끝날 수도 있겠지. 어쨌든 바로 그것을 위해 사라지려는 것이다.

“타고 온 배는 구멍을 뚫어 깊은 곳으로 밀어버려라.”

“······. 알겠습니다.”

이렇듯 강 위에 병력이 몰리면 상대적으로 육지의 경계에 틈이 생긴다. 테세우스 이 자는 그 틈을 파고들 생각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고르는 더 이상 서후가 하는 행동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황 자체가 자신의 계산을 훌쩍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이것을 주도한 서후는 그래도 뭔가 계산하고 있는 것이 있을 테니 에고르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이 험난한 전장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고르.”

“예.”

“이 지역이 어디쯤 되는 지역이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지만 아직 배로 이틀 거리는 더 가야 합니다. 도보로 이동한다면 오 일, 상황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을 겁니다. 위치를 가늠하자면 켈티시와 투르둘리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무단침입한 자들이 켈티시와 투르둘리 양 연맹의 부족을 모조리 건드렸으니 벌집 안에서 벌집을 들쑤신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일까?

그 모습에 에고르의 뒤편에 있던 자가 켈타이언어로 에고르에게 말했다.

“카르페타니로 향하려면 강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최선 아니었습니까? 저들이 강으로 몰려도 도보로 이동하는 건 한계가 명확할 텐데요?”

그러나 그 말에 대답을 하는 건 에고르가 아니라 서후였다. 서후는 켈타이언어로 그에게 말했다.

“카르페타니 지역까지 통과하게끔 우리를 내버려 둔다면 그게 최선이었겠지.”

서후의 발언에 에고르는 물론 다른 루시타니아인들도 흠칫 놀라며 서후를 바라봤다. 에고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후에게 말했다.

“저희 말도 할 줄 아셨습니까?”

“간단한 정도는.”

아마도 벨리키라는 켈타이인에게 배운 것이리라. 에고르는 서후의 대답에 그가 괜히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분명 로마인이건만 켈타이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준비가 잘 되어있었다.

“어쨌든 이 주변에 몸을 누이고 쉴만한 곳을 찾아봐라. 다시 움직이게 될 때는 아마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을 테니.”

서후는 다시 켈타이 언어로 저들에게 말했다. 서후가 허튼소리를 뱉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인지 저들의 표정이 진중하게 굳으며 급히 주변을 살피러 이동했다.

*

스르릉

수풀 속에 위장한 채로 잠이 들었던 서후는 인기척 소리에 번쩍 눈을 뜨며 검을 검집에서 반쯤 빼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을 확인한 서후는 다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에고르는 정말 맹수 같은 자라고 느꼈다. 그를 깨우려고 가까이 다가선 것은 맞지만 아직 손이 닿을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검을 뽑는다고 해도 닿을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섣불리 더 가까이 다가갔다면 그의 검이 자신의 몸을 토막 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한 생각에 에고르는 절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서후를 깨우러 이동하기 전부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다.

“테세우스. 투르둘리 놈들입니다.”

서후를 깨우려던 이유가 바로 근방에서 투르둘리 놈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켈티시와 투르둘리 중 투르둘리 영토에 상륙했으니 투르둘리인을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중 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면 켈티시 방향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켈티시 지역으로 이동하면 베토네스 영토를 거쳐서 카르페타니로 들어가기에 투르둘리 지역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루시타니아와 맞닿아 있는 곳은 켈티시 연맹이고 따라서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투르둘리인보다 켈티시인들과 치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서후는 에고르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투르둘리인을 확인하러 이동했다. 그곳에는 무려 2백에 달하는 투르둘리인이 모여 있었다.

수풀 사이에 숨어 저들을 확인하던 서후는 낮은 목소리로 에고르에게 말했다. 이미 서후는 물론 에고르 등은 켈티시 연맹 소속임을 나타내는 물건들로 몸을 도배하고 있었다.

“전투 준비.”

에고르는 진중한 표정으로 서후에게 반문했다. 반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테세우스. 저들은 우리의 두 배입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전투준비.”

“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