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2화 (72/298)

# 72

72. 벨리키.

72.

철컥

서후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다음 에고르를 가만히 주시했다.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다. 그것도 솔리치족으로 보이는 벨리키라는 켈타이인 한 명이. 그런데 그 일로 루시타니아가 처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밝혀질 줄이야.

벨리키가 죽은 건 우연이라 볼 수도 있다. 그걸 누가 알 수 있었으랴?

하지만 눈앞에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세우스는 어쩌다 우연히 이런 결과를 얻은 게 아니다. 따라서 에고르는 서후가 처음부터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의심을 뒷받침할 증거마저 얻은 서후에게 더 이상 어떤 사실도 숨길 수 없음을 인지한 에고르는 루시타니아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아닌 말이 아니라 다시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면 이번에 뽑힐 검의 궤적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낸 뒤에야 멈추리라.

“말씀드렸다시피 거짓을 말하진 않았습니다. 바에티카가 저희 땅을 노리는 것도, 다른 연맹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다만 상황이 훨씬 더 좋지 않습니다. 바에티카의 로마인도 위협이지만 그보다는 다른 부족연맹이 더 위협적인 상황입니다. 이는 저희와 인근하고 있던 베토네스 연맹의 영향이 큽니다.”

서후는 에고르의 말에 상황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현재 베토네스 연맹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부적으로 분란이 일어나 연맹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상황입니다. 저희 루시타니아와 베토네스는 켈타이 내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고 따라서 베토네스 연맹은 이번 내란에 대한 중재를 저희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극심한 내란이 일어날 상황이었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저희에게도 좋을 것이 없기에 저들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시타니아와 베토네스가 켈타이인만으로 이뤄진 연맹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 서후는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으흠. 카르페타니 연맹이 그 일에 끼어들었군.”

에고르는 놀란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카르페타니 연맹이 베토네스 연맹의 일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베토네스 연맹에서 분란이 된 원인은 베토네스 내의 순수 켈타이 부족들이 그렇지 않은 부족들을 멸시하고 괄시했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켈타이족으로만 이뤄진 다른 연맹들 특히 베토네스와 근접하고 있는 카르페타니의 개입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서후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카르페타니는 단순히 개입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다른 연맹들의 개입까지 부추겼군.”

“허어. 어떻게 그것까지?”

에고르는 서후의 통찰력에 말문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음. 이제 조금 아귀가 맞아들어가는군. 주변 연맹의 압박을 동시에 받으니 루시타니아 내의 순수 켈타이 부족들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어. 이대로 시일이 지나면 베토네스는 물론 루시타니아 연맹도 공중 분해될 것이 분명하고 비 켈타이인들은 발붙일 곳조차 없어지겠지. 어쩌면 모조리 도살당할지도. 그래서였군. 그래서 아버지께 전권을 이양하고자 한 것이었어. 루시타니아 내의 순수 켈타이 부족이 흔들리긴 하지만 입장이 정리된 건 아니겠지. 이런 상황에서 켈타이인이든 비 켈타이인이든 통치자의 자리에 서게 되면 그 분란을 가속화 하는 일이 발생할 테니 아예 근방에 명성이 높은 로마장군을 데려올 생각을 품었군. 확실히 묘수야. 그 로마장군이 켈타이인의 땅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로마에 목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단 말이야. 바에티카의 로마인들이 루시타니아의 땅을 노리는 이유 말이다. 단순히 루시타니아 지역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 기회를 노린다? 곡창지대도 아니고 문명이 발전한 곳도 아니며 같은 문화권도 아니니 반란의 위협이 수시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대규모 정벌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득보다 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지. 이득에 민감한 로마인들이 그것을 계산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바로 그래서 에고르 당신은 그 이유를 금광과 은광이라고 밝혔다. 근데 이게 또 미묘해. 미묘하지.”

서후는 입을 굳게 다물고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고르에게 다시 말했다.

“사실 로마인들이 루시타니아 지역을 노리기에 이보다 확실한 이유도 없는 셈이야. 금광과 은광을 얻는다면 많은 것을 잃어도 단번에 그 모든 손실을 회복하고도 남는 장사라 여길 테니 동기가 되기에 충분해.”

“말씀드렸지만 루시타니아에는.”

“알아. 금광과 은광이 없다는 것쯤은. 루시타니아 지역에 금광과 은광이 존재한다면 애초에 당신이 그것을 언급했을 리가 없어.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여러모로 어리석은 일이지. 그러니 루시타니아는 금광과 은광으로 향하는 통로일 뿐이야. 그것을 알고도 얼버무린 건 루시타니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일 테고. 금광과 은광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라면 아군 역시 피해를 감수할 만한다고 여길 테니까.”

“······.”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 없습니다.”

‘시간이 관건이군.’

모든 정황을 파악한 이상, 정탐하고 말 것도 없다. 물론 그래도 미리 살펴보기는 해야겠지만 루시타니아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루시타니아 지역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사실을 낱낱이 알려준 이유도 알겠나? 내가 지금까지 헛수고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충..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너 하나의 충성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리고 언제 내게 충성하라고 했나?”

서후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자 에고르가 다시 말했다.

“책임지고 세르토리우스님께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겠습니다.”

“좋아. 반드시 그래야 할 거야. 다시 검을 뽑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나무토막이나 베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에고르는 굳은 표정으로 서후에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서후는 에고르에게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이 온 자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인가?”

“물론입니다. 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자 루시타니아에 충성을 다하는.. 음?”

에고르는 대답을 하다말고 자신의 말에 모순이 있음을 깨달았다. 비밀리에 움직였다. 그런데 카르페타니 연맹이 어떻게 자신들이 팅기스로 향하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벨리키의 죽음은 내부에 밀고자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허어. 정말 당신은?”

“같이 온 자들은 모두 몇 명이지?”

“100명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닙니다. 그건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보군. 그게 아니면 함부로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에고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입니다.”

“그 말은 내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다는 말로 간주해도 되나?”

“그.. 그건? 하지만 저희는 그럴 의도가.”

“의도? 물론 의도도 중요하지. 하지만 내가 너를 배신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배신했다고 배신한 사실이 배신한 것이 아닌 게 되나? 마찬가지로 너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죽였다고 살인한 사실이 없던 사실이 되고? 그처럼 허망한 핑계가 어디 있나? 그러니 의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만 중요할 뿐이다. 언제 내가 너희의 의도 따위를 물어보던가?”

“죄송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벨리키가 죽었기에 서후가 이런 정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는 말도 된다. 따라서 서후는 자연스레 벨리키가 떠올라 그가 만든 두 자루의 검을 슬쩍 바라봤다. 입고 있는 갑옷 역시 그의 양아들, 파이살이 만든 갑옷이었다.

‘안타깝지만 이 갑옷은 쓸 수 없겠군.’

로마군의 특색이 너무 드러난 갑옷이라 별수 없었다.

“준비해라. 너희는 바로 나와 히스파니아로 간다.”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히스파니아로 간단 말인가? 에고르는 다시 당황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서후를 만나보고 그의 식견을 확인한 에고르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죽는다면 세르토리우스가 반드시 격노할 것이다. 이건 자신들이 바라는 상황이 아니다. 따라서 에고르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서후에게 말했다.

“루시타니아로 저희와 함께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홀로 말입니까?”

“루시타니아가 아니라 카르페타니다. 그곳으로 갈 것이다.”

“예? 카르페타니는 히스파니아 중앙 지역에 위치한 부족입니다.”

“강을 타고 이동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왜 자신 없나?”

“······.”

살면서 말문이 막혀본 적이 별로 없었건만 에고르는 오늘 여러 번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에고르는 고개를 흔들며 서후에게 말했다.

“최단거리로 이동하길 원하시는 것이라면 켈티시와 투르둘리를 가르고 있는 강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저들에게 어떤 연락도 없이 통과하는 일이니 매우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뭘 어쩌려고 하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길을 지나쳐 카르페타니족의 영토에 들어선다고 한들, 홀로 아니 백 명의 전사들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용맹한 전사들이지만 카르페타니에도 용맹한 전사들이 많이 있다.

“켈티시와 투르둘리 두 연맹의 사이가 나쁘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럼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이는군. 준비해. 우리로서는 너희 연맹이 산산이 박살난 후에 움직여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르도록.”

말없이 눈매를 좁히던 에고르는 서후의 담담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쿵쿵쿵

그때 밖에서 노크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파이살이었다.

“테세우스.”

“음?”

서후는 파이살이 들고 온 갑옷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벨리키. 벨리키의 갑옷을 본떠 만든 것으로 가죽을 기반으로 중요한 부위에만 철을 덧댄 갑옷이다. 언젠가 내가 입으려고 만든 것이지만 네가 입을 수 있게 수치를 조정해봤다. 물론 지금 입고 있는 갑옷처럼 딱 들어맞지도 않고 방어력도 떨어지겠지만 혹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후는 파이살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마침. 때마침 켈타이인의 갑옷이 필요했다.”

서후는 그 자리에서 로리카 하마타 형식으로 만든 갑옷을 벗고 파이살이 가져온 갑옷을 착용했다. 파이살이 그것을 거들어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 끈을 조인 파이살이 뒤로 물러나자 서후는 몇 번 움직여본 후 파이살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이살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후를 바라보며 그의 팔뚝을 마주 잡았다.

파이살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서후 역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이뤄질 것은 이뤄질 것이고 이뤄지지 않을 것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에.

*

서후는 에고르가 타고 온 2단 갤리선을 타고 카르페타니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나디르와 호라티우스도 없이 혼자 이동했다. 나디르는 해군을 통솔하고 있었고 호라티우스는 전형적인 로마인이라 이번 임무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무엇보다 저들이 감당해야 할 임무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께 서신을 남겨 두었으니..’

서후는 파이살에게 세르토리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을 남겨두었다. 대략 일주일 뒤쯤 그 서신이 세르토리우스에게 전달될 것이다.

‘일주일 후 아버지가 바로 군을 움직여도 한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전에 정탐을 마친다.’

세르토리우스가 군을 움직인다는 것은 팅기스의 기반을 버리고 루시타니아을 기반으로 삼겠다는 소리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한달의 시간은 소요될 것이다. 마우레타니아 왕국과의 협상도 협상이지만 보다 확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까지 감안한 시간이었다.

‘그보다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어쨌든 이들이 아버지의 움직임을 눈치챌 때는 이미 나는 저들의 품 안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에고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홀로 적진으로 향한단 말인가? 물론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자신들이 배반이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하지만 에고르는 알지 못했다. 100명 정도는 되는 자들로 서후를 사로잡을 수 없음을 말이다. 지난 일 년간 몸만 커진 것이 아니다. 서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를 결코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역시나 무기였다. 서후는 전장에서 칼보다 창이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창과 도끼가 결합된 형태의 할버드라던지 여포가 사용했다는 방천화극을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 그걸 다마스쿠스강으로 만든다면.. 어쨌거나 그건 나중 일이고 최악의 경우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한 몸 건사할 수는 있을 테니..’

서후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생각을 지워버렸다. 구태여 일이 잘못될 상황을 계속해서 떠올릴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배를 멈춰라! 네놈들은 어디 부족이길래 켈티시 연맹의 강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