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1화 (71/298)

# 71

71. 벨리키.

71.

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란 말인가? 벨리키가 왜? 왜 벨리키가 쓰러져 있단 말인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벨리키를 발견한 파이살은 서후를 급히 바라보며 외쳤다.

“테세우스!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나 그 대답은 벨리키에게 흘러나왔다.

“피를 처음 본 계집처럼 호들갑 떨지 마라. 소소한 전투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왜요?”

파이살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그러자 서후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파이살을 불렀다.

“파이살! 진정해.”

그리곤 파리한 안색의 벨리키에게 슬쩍 눈짓을 주었다. 파이살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보다 울분이 터져 나왔다. 왜? 대체 왜? 벨리키가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대체 왜? 파이살은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억지로 억눌렀다. 벨리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켜주기 위해 자신을 제지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파이살이 이를 악물고 입을 다물자 서후가 벨리키에게 말했다.

“벨리키. 누굽니까? 누군지 짐작할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복수 같은 건 필요 없다. 나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다.”

“벨리키!”

파이살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벨리키를 바라보자 벨리키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쯔쯔쯔. 그래서 네놈은 검을 잡지 말라는 거다. 분노는 강한 원동력이지만 그것에 휩쓸려서는 제 목숨만 잃게 만들 뿐이다. 전장에서 수많은 자들을 만났다. 당연히 개중에는 나보다 뛰어난 전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전사는 결국 죽는다. 어떤 식으로든. 너를 다스려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당부다.”

주먹을 꽉 쥔 채로 어떤 말도 못하고 서있는 파이살을 일별한 벨리키는 다시 서후를 바라봤다.

“다시 말하지만 복수는 필요없다. 저 모지리같은 놈을 전장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러자 파이살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복수할 겁니다. 당신을 이 지경을 만든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겁니다.”

“클클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을 모조리 죽여? 이미 모조리 죽었다. 바로 내 손에 의해서. 나 벨리키가 세월의 흔적으로 비루한 지경에 처했으나 내 목숨을 노리는 놈들조차 손 봐주지 못할 것 같으냐? 봐라! 나 외에 살아 있는 놈들이 있느냐? 나는 삶의 마지막을 전투로, 그것도 승리로 장식한 거다. 그러니 네놈이 내 복수따위를 운운하지 마라! 알겠느냐?”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패기가 벨리키에게서 터져 나왔다. 파이살이 대답을 하지 않자 벨리키가 다시 노성을 터트렸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애새끼야. 내가 죽어가는 마당에도 내 말을 거스를 셈이냐?”

“하지만 벨리키!”

“시끄럽. 쿨럭. 쿨럭.”

다시 소리를 치려던 벨리키는 입에서 피를 뿜었다. 그 모습에 서후가 입을 열었다.

“안심하십시오. 제 손으로 파이살을 전장에 세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을 이 지경에 처하게 한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벨리키는 핏발이 서 붉게 물든 두 눈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그리곤 말없이 웃었다.

“클클클. 넌 복수하지 말라고 하면 네 이름을 위해서 하겠다고 할 놈이지. 마음대로 해라. 단 파이살. 파이살.”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지 손을 휘저으며 파이살을 찾았다. 파이살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베.. 벨리키.”

벨리키는 손을 더듬거려 그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너는 네 길을 가거라. 나의 뒤를 따라오지 마라. 쿨럭쿨럭 알겠느냐?”

“벨리키!”

“어서 대답해라.”

“크흑.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클클클. 더는 미련이 없다. 그나저나 테세우스. 네가 만든 검이 제법 쓸만하더구나. 다자 모르께서 나를 받아주시기를.”

그 말과 함께 파이살의 얼굴에 닿아있던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파이살이 크게 울부짖었다.

“벨리키이이이!! 으아아아아아아!!!”

서후는 묵묵히 그 자리를 서 있다가 벨리키의 눈을 감겨주었다.

‘벨리키, 당신의 말대로 무작정 복수를 한다고 날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전후 사정을 철저히 파악한 후 복수할 명분이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그때는!’

아닌 말로 정당한 원한으로 벨리키가 살해당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벨리키의 말대로 더 관여할 것 없이 그의 죽음으로 이 일을 종결시키는 것이 수순이다. 그를 직접 죽이려던 자들은 어쨌든 그의 손에 죽었고 명분 역시 이 일을 주도한 자에게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때는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물으리라.

하지만 벨리키의 반응을 볼 때 벨리키를 살해한 무리에게 명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당한 원한으로 인한 일이었다면 자신이 대가를 거론했을 때 벨리키는 꺼리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덤덤했다. 서후가 구태여 그 일을 거론한 것은 그래서였다.

*

퉁!

화르르르르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배가 불화살 한 발에 순식간에 타올랐다. 배 위에는 서후가 만든 검을 양손으로 잡고 누워있는 벨리키의 시신이 있었다.

바다 위를 항해하던 벨리키의 배는 어느 순간 불에 타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파이살은 실의에 찬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후에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히스파니아로 간다고 들었다.”

서후는 파이살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벨리키에게도 말했지만 내가 너를 대동하는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켈타이인들은 하나같이 용맹한 전사들이다. 네 실력으론 그들 중 하나도 상대하기 어려워. 복수를 해야 한다면 저들과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너를 데려간다면 복수가 아니라 네 보모역할이나 감당해야겠지.”

서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딱히 파이살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를 말해준 것에 가까웠다. 서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바위를 깨고 싶다면 바위를 깰만한 무언가를 가져와야지 계란 하나 들고 나는 바위를 깨고 말 것이다라고 백날 외친들 그 바위가 깨지겠나? 혈기와 의지만으로 일이 성사되지는 않아.”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나 가능성이 제로인 것에 도전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천치나 하는 짓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돌이 깨지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런 요행을 바라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다. 파이살의 요구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나보고 이대로 지켜보란 말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맞아. 지켜봐. 벨리키의 유언 역시 네 길을 가라고 했다. 네가 전장에 선다면 네 스스로는 벨리키를 위한답시고 여길지는 모르지만 그건 너를 위한 것일 뿐, 결코 벨리키를 위한 것이 아니다. 네가 진정 벨리키를 위한다면 그의 말에 따라라. 그게 벨리키가 원한 것이니까.”

서후는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이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복수를 거론하기 전에 그 복수가 정당한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상당히 미묘하게 얽혀있을 수도 있지. 그것과 상관없이 무작정 피의 길을 걷겠다면 나도 더는 말리진 않겠다. 대신 너는 반드시 죽을 거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네 복수는 정당하지도 않고 그 정당하지 않은 복수를 이루지도 못할 것이고 벨리키의 유언마저 어기며 다다른 그 죽음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크흑.”

“그러니 기다려라. 내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나는 나의 일을 할 테니 너는 네 일을 해라. 벨리키가 네게 남긴 유산으로써 벨리키를 기려라.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네가 진정한 벨리키의 유산이다.’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테니까.

우두커니 서 있는 파이살을 내버려 두고 서후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긴히 만나볼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서후는 루시타니아인의 대표로 온 에고르를 만나고 있었다. 서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에고르에게 질문했다.

“확인해봤나?”

“확인해봤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내 분노가 너희에게 향할지도 모르겠군.”

그간 별 탈 없이 팅기스에서 살아왔던 벨리키다. 그런 그가 루시타니아인이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살해당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서후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우연은 그저 인과가 밝혀지지 않았고 밝힐 수 없기에 나온 말에 불과하다.

서후의 서늘한 표정에 섬뜩함을 느낀 에고르는 급히 말을 이었다.

“저희. 저희 루시타니아인은 아닙니다. 단순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켈타이족을 불러다가 자문을 구해보셔도 동일한 답변을 드릴 겁니다.”

서후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나도 루시타니아인이 그렇게까지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조력을 구하기 위해 온 자들이 팅기스에서 분탕질을 칠 이유가 없으니까. 다만 너희가 이일에 연관이 없다고 말할 생각은 품지 말도록.”

서후의 치밀한 통찰력에 에고르는 폐부까지 샅샅이 밝혀지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세르토리우스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들에 대한 소문은 거의 듣지 못했다. 간간이 들여오는 소문들은 헛소문이라 치부해도 될 정도로 현실성이 없는 소문들. 하지만 에고르는 불현듯 그 소문이 진짜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심려마십시오. 저희가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그래서 벨리키를 습격한 이들은 누구지?”

“확인해보니 카르페타니 연맹 소속으로 보입니다.”

“카르페타니?”

“예. 보다 정확하게는 카르페타니 메투리치 부족입니다. 외람되오나 벨리키라는 자가 어디에 속한 부족인지 알고 계신지요?”

“솔리치. 솔리치 부족이라고 했다.”

에고르는 서후의 말에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제야 저들이 벨리키를 살해한 연유를 알겠습니다.”

서후는 눈매를 좁히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말해봐.”

“대략 20년 전쯤 카르페타니 연맹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축이 되었던 부족들 가운데 솔리치 부족과 메투리치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툼이 심화되자 카르페타니는 강제로 내분이 일어난 부족을 화해하게 했는데 이때 화해의 대가로 메투리치 부족에서 솔리치 부족 전사의 목숨을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테세우스님이 알고 있는 벨리키라는 켈타이족이 그 전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르릉 서걱

검을 뽑아 그대로 마주하고 있던 탁자를 썰어버린 서후를 보며 에고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단번에 탁자를 갈라버린 실력도 실력이지만 왜 갑자기 위협을 가한단 말인가?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서후는 검을 뽑은 채로 입을 열었다.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바보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정보를 충실하게.”

“벨리키의 장례를 맡은 자들이 너희 루시타니아인이었다. 켈타이족이라 맡긴 점도 있지만 일부러 너희에게 맡겼다. 그런데 카르페타니의 메투리치족이라..”

그 말에 에고르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테세우스님께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말하진 않았지만 전부를 말한 것도 아니지. 어떤 식으로 판별하는지는 알 바 아니나 어쨌든 내게 묻기 전에 벨리키가 솔리치 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저들이 메투리치족이라는 것을 파악했다면 벨리키가 어떤 부족이었는지 못 알아봤을 리가 없지.”

서후의 말에 에고르의 표정이 크게 굳었다.

“내가 이 사건을 정리해 볼까? 저들은 벨리키를 찾으려고 이곳 팅기스까지 온 것이 아니야. 너희를 죽이려고 이곳에 온 것이지. 메투리치라고 했나? 일개 부족이 자의로 거대한 연맹에 대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카르페타니 연맹이 너희를 견제하고자 혹은 우리와의 관계를 경색시키고자 너희를 죽이려고 메투리치족의 사람을 보냈다. 메투리치족의 전사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무기를 점검하러 몇 명의 전사들이 대장간으로 향했겠지. 벨리키의 대장간은 제법 유명하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부족의 원수를 만난 거다. 그리고 칼부림이 일어났지. 자. 이제 다시 말해봐라. 이 일이 누구 책임이지? 벨리키 개인의 원한으로 인한 것이라고 다시 지껄여보지그래.”

에고르는 크게 놀랐다. 극히 제한된 정보만으로 사실에 다다랐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서하십시오.”

“다시 한번 나를 기만하려고 한다면 네 혓바닥이 너희 연맹의 뜻이라 여기고 모조리 잘라버리겠다.”

서후의 서슬퍼런 기세에 에고르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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