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69화 (69/298)

# 69

69. 안식처를 위하여.

69.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화끈한 열기가 이제는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의사가 어깨에 깊숙이 박힌 볼트를 제거했으나 상처가 심하게 곪고 있었다.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이대로라면 어깨를 자르거나 목숨을 끊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 리처드는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전공과 무수히 많은 승리를 거둔 자신이 고작 어린 소년이 쏜 화살에 죽게 될지도 모르다니.

사자심왕 리처드는 심유한 눈으로 끌려온 구르돈이라는 소년을 바라봤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사자심왕 리처드. 당신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석궁화살을 맞은 그 날, 나는 갑옷을 입지도 않았고 성벽을 거닐었을 뿐이다. 왕을 죽인 자는 죽는다. 너는 내가 누군지도 알았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죽이려 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구르돈이라는 소년은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아 피멍이 들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표정으로 리처드에게 악에 받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아버지와 내 형제 둘을 죽였다. 이제 나를 고문하고 목을 매달겠지. 당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당신 역시 죽을 거야. 바로 내가 날린 화살에 의해서!”

“이놈이!”

“전하! 이놈의 손발톱을 뽑는 것은 물론 처절하게 고문하도록 허해주십시오!”

주변의 기사들이 소년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며 소리쳤으나 리처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리처드는 작은 화살 따위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원한을 가진 소년이 작정하고 화살을 날렸으니 분명 독을 발라두었을 것이다.

리처드가 손을 들자 다시 주변이 잠잠해졌다.

“구르돈이라고 했느냐? 내 너를 용서하겠다. 평안히 가라. 여봐라! 이 소년에게 100실링을 하사하라.”

“전하! 무슨 말씀을!”

“전하!”

“더는 말하지 말라. 명을 어길 시에는 그자를 참하리라.”

반드시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구르돈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처드를 바라봤다. 리처드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비와 형제의 복수를 했으니 네 행위는 정당하다. 이제 네게 남은 건 나의 진노이나 그 진노를 네게 풀 생각이 없으니 평안히 가라.”

스스로 쌓은 살업이 돌아와 제 목숨을 앗아가겠다는데 소년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랴?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게 해결해야 할 일련의 일들을 얼추 정리한 리처드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지친 몸을 뉘었다.

잠시 뒤 리처드의 시종이 봉인된 서신을 급히 그에게 가져왔다. 리처드는 봉인된 인장을 뜯고 서신을 살폈다.

<평온의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가열하고 황제의 옷 색깔인 자홍색이 나올 때까지 근육이 좋은 노예에게 찔러 넣어 식혀라. 그러면 노예의 힘과 영혼의 힘이 검에게 옮겨붙어 검은 더욱 단단하게 될 것이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그토록 얻고 싶었던 다마스쿠스 검 제조법과 연관된 내용이 분명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걸 확인하려면 확인할 때마다 생목숨이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제조법을 시험하는 것도 미친 짓이고 설혹 제련에 성공한들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으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그토록 얻고자 했던 비밀이건만 리처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 주변에 자리한 등잔불에 서신을 태워버렸다.

화르르르

자신이 이걸 소유한 채로 죽는다면 자신의 이름 때문에 허망하게 죽는 사람이 수없이 나올 것이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사자심왕 리처드가 지니고 있다가 발견된 내용이니까. 바로 그래서였다.

*

‘내 야심을 템플 기사단에게, 내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내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긴다.’

사자심왕 리처드의 유언이었다.

리처드의 죽음을 떠올리는 서후의 앞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철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정확히 몇 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온의 태양은 지금의 이 정도 온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제 적당하게 달아올랐으니 검을 식힐 근육질의 노예가 필요하다. 리처드가 얻은 다마스쿠스 제조법을 시험해보려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카르타고의 토페트에서는 인신공희를 한다고 극도로 분노하던 서후가 도구 따위를 만들기 위해 생사람의 목숨을 잡는다고? 자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 사형수를 데려다가 시험하면 된다?

항우는 잔혹했지만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었다. 위선은 악보다 더 극심한 악을 낳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토페트에서 벌인 자신의 살육이 자신 위에 그대로 쏟아져도 서후는 할 말이 없으리라.

서후는 달아오른 철을 그대로 박아넣었다.

치이이이익

그러자 냉매가 된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오른 철을 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매는 제조법과 달리 근육질 노예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서후는 지금 담금질을 하고 있었다. 담금질이란 재료를 높은 온도까지 올렸다가 급랭시켜 경도나 강도를 높이는 작업을 말한다. 이 시대에 냉매로는 주로 물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간혹 피나 오줌, 리처드가 얻은 제조법처럼 사람을 냉매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비단 잔혹성을 제외하더라도 실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미신적인 요소만 강화할 뿐, 냉매로는 기름이 제일 적당했다.

이것까지는 리처드도 몰랐지만 그건 서후 본인이 알고 있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우연찮게 얻게 되는 얄팍한 지식과 정보 말이다.

따라서 서후는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고 결국 그 살육 때문에 죽게 된 리처드조차 꺼림칙해 하던 관문을 아주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그 용처를 찾지 못했을 뿐, 서후가 가지고 있던 기름이라는 곁다리지식처럼 언젠가 사용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쓸모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서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철의 색상이 비유로 표현된 자홍색이 나올 때까지 변했을 때 기름 밖으로 제련하던 철을 뺐다.

그리곤 진중한 표정으로 철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성공? 성공인가?’

놀랍게도 다마스쿠스의 물결무늬와 소용돌이무늬가 검신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후는 검신을 들고 주변에 만들어져 있던 검에 내리쳤다.

까아앙

그리곤 다시 살폈다.

‘흐음. 확실히 동일한 철로 만든 일반 검보다 강도가 세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걸 다마스쿠스라 부를 순 없겠군. 모양은 다마스쿠스와 매우 흡사한데 실상은 벨리키가 만든 검보다도 좋지 않아. 역시나 다마스쿠스 검의 비밀은 재료에 있었나 보군. 대충 감은 잡았으니 후에 기회가 된다면 뛰어난 탄성과 강도를 뽑아낼 수 있을지도.’

벨리키에게 대장장이 일을 배운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현대도 아닌 이 시대에 이런 수수께끼 같은 건 본인이 직접 경험으로 체득해보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서후가 홀로 대장간에서 스스로 만든 검을 이리저리 평가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테세우스님.”

서후는 사비누스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 무슨 일이십니까?”

“켈타이족이 찾아온 일로 레가투스께서 찾으십니다.”

“켈타이?”

켈타이족이 찾아온 일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후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살펴보던 검신을 내려놓고 사비누스에게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당장 이대로는 어려우니 복장을 갖춰 입고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느새 대장장이가 다 되셨군요.”

“그저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사비누스는 서후가 만들던 검을 힐끗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어쨌든 이따가 뵙겠습니다.”

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대장장이 일을 위해 아예 대장간 뒤편에 마련한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향했다. 사비누스가 직접 왔다는 건 일의 중요도는 물론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되었으니 말이다.

*

1년 전 10살 남짓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서후는 근 1년 동안 급성장을 했다. 지금도 성인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검과 갑옷을 착용하고 전장에 서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성장을 이룩했다. 드문 일이긴 하나 아예 없는 일은 아닌지라 기이하게 여기기보다는 다들 서후의 성장을 크게 기뻐했다.

사적으로 부른 자리라면 그리스어나 전술, 전략 등을 배울 때처럼 튜니카만 입고 가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공적인 자리였기에 서후는 공식적인 복장을 갖출 필요를 느꼈다. 양아버지, 세르토리우스는 거의 항상 갑옷을 걸치고 있었기에 아들된 자가 가벼운 복장으로 공식 석상에 선다면 이는 여러모로 보기 좋지 않았다.

따라서 서후는 체인갑옷의 종류인 로리카 하마타를 걸치고 벨리키가 만든 두 자루의 검을 양 허리춤에 나눠서 착용했다. 하마타는 서후가 군단병 복장을 착용할만한 성장을 이룩하자 파이살이 심혈을 기울여서 그를 위해 제조해줬다.

파이살은 아무래도 무기보다는 방어구를 제작하는데 더 특화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재료의 한계로 인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어쨌든 갑주와 무기를 착용한 서후의 모습은 늠름한 로마의 장수 그 자체였다. 예전의 서후가 미소년이었다면 현재 서후의 외모는 단순히 곱상한 것이 아니라 남자다운 모습이 섞인 야성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대장간의 고된 작업과 그간의 전투훈련 등으로 그의 잘 단련된 육체는 그 야성미의 정점을 찍었다. 다만 로마인들처럼 짧고 단정한 머리를 지닌 것이 아니라 대장장이 스승인 벨리키처럼 치렁치렁한 장발을 지니고 있었다. 은은한 금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은 서후가 상대했던 수사자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스르릉 철컥

두 자루의 검을 양손으로 각기 나눠 쥐고 검집에서 살짝 빼 언제든 발검할 수 있는지 확인해본 서후는 다시 검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벨리키가 만든 두 개의 검은 장검이지만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유려한 곡선을 가진 검이었고 하나는 곧게 뻗은 직도에 가까운 검이었다. 둘 다 한손검이었기에 장검이라고 하지만 바닥에 끌릴 만큼 길지 않았다. 그러니까 1년 전에 착용했어도 말이다. 신장이 훨씬 더 커진 지금은 장검이 더 길었어도 바닥에 닿을 수 없었다.

가볍게 자신의 팔과 옷의 맵시를 확인하던 서후는 1년 전 자신의 육체를 떠올렸다.

‘1년 전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규모만 커졌지 여전히 실속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그 규모도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게 아니었다. 물론 어지간한 자들은 모조리 씹어먹고도 남을 육체능력을 보유한 서후가 품을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대로 육체가 완성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붉은색의 망토 역시 착용한 서후는 더 지체할 것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테세우스! 이건? 음. 그렇게 차려입으니 켈타이족이 아니라 로마인처럼 보이긴 하구나.”

그를 찾아온 건 바로 잠시 외출했던 벨리키였다. 서후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벨리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건 뭔가 다른 방식 같은데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이냐?”

“그거 저번에 실험해보던 그겁니다.”

벨리키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뻔히 보이는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모를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자신이 단조한 후 대장간에 내버려 둔 검신이 들려있었다. 서후의 대답에 벨리키는 의아한 눈으로 검신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음? 그게 이거라고? 다른데?”

“전에는 다 실패했고 이번엔 그나마 성공했으니까요.”

“그저 요상한 짓거리나 한다고 생각했더니 클클클. 일반검보다 강한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단조법이라. 너로 인해 내 이름은 확실히 남겠군.”

“아직 완성된 건 아닙니다.”

“클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쨌든 복장을 보아하니 네 아버지가 중요한 일로 부른 모양인데 어서 가봐라.”

“예. 자세한 건 이따가 대장간에서 말씀드리죠.”

파이살은 양질의 철괴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에 서후가 떠나자 벨리키 홀로 대장간에 덩그러니 남았다. 빈 대장간의 모습에 벨리키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눈물만 많아진다더니 저들이 자신에게 작별을 고한 것도 아니고 대관절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벨리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를 향해 가볍게 혀를 찼다.

“쯔쯔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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