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68화 (68/298)

# 68

68. 안식처를 위하여.

68.

서후는 벨리키의 말에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짐작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군요.”

“말하지 않았던가? 카르페타니가 과거 한니발의 용병으로 활약했다고. 로마인들은 자신을 적대한 사실에 대해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지. 마찬가지로 카르페타니 역시 과거의 일들을 쉬이 잊는 자들이 아니야.”

“저희는 그 로마의 반란군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반란군? 그건 아니지. 그래서 로마를 무너뜨릴 건가? 아스칼리스와 마스타네소스의 관계가 너희와 로마의 관계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걸 카르페타니의 부족장들이나 장로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틈은 언제든지 파고들 여지가 있죠. 단일한 부족이 아니라 27개의 부족연합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클클클. 중앙 지역의 27개나 되는 부족 연합체라고 하니 카르페타니가 커 보이기라도 하는 모양인데 켈타이는 정말 수많은 부족연합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다시 말해 뭔가 일관된 통치자가 없어. 그런 이들과 협상? 뒤통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협상을 할 바에는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속 편할 거다.”

“흠.”

그래도 자신의 부족인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도리어 낫다니? 이 무슨 말인가? 서후는 벨리키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관된 통치기구가 없다는 건 시시때때로 말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깨어진 조약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의미가 없다. 약속을 맺은 주체가 아예 달라지는 판국에 그걸 묻는 게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전부 다 무력으로 쓸어버리고 힘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보자. 내가 저들을 떠나온 지도 꽤 되었으니 판세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큼직한 부족연합체만 총 11개는 되겠군.”

“카르페타니 정도 되는 연합체가 말입니까?”

“그보다 강한 곳도 그보다 약한 곳도 있지만 최소 열 부족 이상의 연합체들이니 비슷하다고 봐도 될 거다.”

최소 열 부족으로만 계산해도 히스파니아에 존재하는 켈트 부족이 110개라는 소리다. 따라서 서후는 간단하게 접근할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벨리키에게 다시 물었다.

“보다 자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흐음. 히스파니아 지역을 북쪽, 중앙, 남쪽 이렇게 세 곳으로 나눠서 말하면 되겠군. 북쪽 지역은 칼라이치, 아스투레스, 칸타브리, 바케이 정도다. 그 외에도 여섯 곳의 부족연합체가 더 있지만 북쪽 지역에서 세를 떨치는 건 대략 이 네 연합체 정도가 되겠군. 중앙이나 남쪽보다는 북쪽 지역이 더 혼란한 편이긴 하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갈리아 놈들도 꽤 있고. 아무튼 그런 상황이지.”

“흠. 중앙은 카르페타니가 강세를 떨치고 있는 겁니까?”

“딱히 그렇지도 않아. 중앙은 루시타니아, 베토네스. 카르페타니, 켈티브리인데 중앙 지역에서 가장 세가 강한 건 아무래도 가장 넓은 땅을 차치하고 있는 켈티브리 정도가 되겠군. 다만 전력은 카르페타니랑 비슷했는데 지금은 나 역시 알 수 없다.”

“관계는 어떻습니까?”

“카르페타니와 켈티브리?”

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리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 근접하고 있어서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부족연합의 구성원이란 부족의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흠. 그럼 남쪽은?”

“켈티시, 투르둘리, 투르데타니. 일단 켈타이족만 거론하자면 이 정도고 동쪽 해안선을 근거지로 두고 살아가는 히베리아족까지 거론하면 훨씬 더 복잡해진다. 물론 그들보다야 켈타이족의 세가 강하긴 하지만 들었다시피 켈타이는 단일 연합체가 아니다. 물론 수많은 부족들로 이루어진 연합체이니 네 말대로 그 틈을 파고든다면 파고들 수야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카르페타니는 연계하기에 적합한 부족이 아니라는 소리다. 전혀 어린놈 같지 않은 테세우스 너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겠지.”

‘우호적이지도 않고 설혹 힘들게 그 틈을 파고들어도 비등한 세력이 무려 10곳이나 더 존재하니.. 그럴 바에는 우호적인 세력을 찾는 게 효율적이겠군. 그나저나 히스파니아 상황이 이토록 혼란할 줄이야.’

하지만 서후는 이 사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혼란하지 않다는 건 정돈되었다는 뜻이고 그 말은 다시 말해 히스파니아를 다스리는 일치된 세력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히스파니아 지역 역시 거점으로 삼을 수 없는 곳이 되었을 거다. 미약한 세력을 가진 세르토리우스군이 로마와 동시에 강력한 토착세력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협상은 말 그대로 대등한 관계에서나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조약이 조약으로서 효력을 가지려면 그것을 관철시키거나 어겼을 때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가능하다. 막강한 세력이 히스파니아에 존재한다면? 둘 모두 세르토리우스군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 된다.

따라서 서후는 히스파니아의 혼란한 정세가 아군에게도 이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게 해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좋은 일이었다.

“으흠. 혹 11개 부족 중 가장 세가 약한 자들이 어느 곳인지 알고 있습니까?”

서후가 침음을 삼키다가 말을 뱉자 벨리키가 땅을 짚고 있는 막대기를 바닥에 두어 번 두들기며 다시 말했다.

퉁 퉁

“글쎄다. 그런 곳이 있을 리가. 다만 아무래도 산악지역을 근거로 둔 부족연합체가 세가 더 약하겠지. 중서부지역이 산세가 험하니 굳이 뽑으라고 한다면 루시타니아 정도가 되겠군. 루시타니아와 베토네스 같은 경우는 켈타이족이긴 한데 조금 다른 부류라 다른 부족들과의 관계가 훨씬 더 원만하지 않다는 점도 있으니.”

서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벨리키가 말했다.

“네가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겠다만 그런다고 한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가서 망치질이나 더 하는 것밖엔 없다. 너도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냐?”

벨리키의 말이 맞았다. 저들과 어떤 접점도 없고 뭘 하려고 해도 근거가 없으니 이 모든 정보가 지금으로선 별 쓸모가 없는 것과 같았다. 지금 얻은 정보 정도야 세르토리우스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한 지역을 다스리던 자가 그 주변 지역의 정세조차 파악하지 못한다면 과연 현명한 통치자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켈타이족이었던 벨리키의 시점과 바에티카 통치자였던 세르토리우스의 시점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일련의 내용들을 세르토리우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서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망치를 잡다가 쓸데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벨리키 당신은 카르페타니의 정확히 어떤 부족 출신인 겁니까?”

“말해도 모를 텐데 그건 들어서 뭐하려고?”

“그냥 호기심이죠.”

“솔리치. 솔리치 부족이었다.”

벨리키는 담담하게 뱉었지만 서후는 그 말속에 숨어있는 깊은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구태여 더 질문하지 않았다.

*

팅기스의 주요특산물은 밀, 보리, 올리브 정도다. 서후가 야스미라에게 괜히 보리와 밀을 예를 들어 자유무역에 대해 설명한 것이 아니었다.

이걸 어찌 알았냐고 묻는다면 후사인에게 죽임을 당한 바라카가 팅기스의 상인이었다. 서후는 당시 군 정보뿐만 아니라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에 대해서도 간간이 물어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기에 그 사실을 개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그건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보가 가지는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 시대 사람보다 아무래도 현대인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

어쨌든 올리브는 기호식품에 가깝지만 밀과 보리는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중요한 작물이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보리와 밀을 키우는 것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참고로 보리와 밀은 벼와는 다르게 기후에 영향을 덜 받고 건조한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또한 겨울에 심는 작물이라 병충해 위협도 적고 다른 풀들이 이제 막 자랄 동안 집중적으로 생장하기에 잡초로 인해 농사를 망칠 위험도 적다.

“레가투스.”

땀을 흘리며 보리와 밀을 수확하는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던 세르토리우스는 다가온 사비누스를 바라봤다.

“히스파니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히스파니아? 바에티카인가?”

세르토리우스는 살짝 반색하며 질문했다.

승전소식과 더불어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후가 계획한 자유무역이 점점 더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팅기스의 항구는 연일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북적거렸고 그로 인해 세르토리우스와 팅기스는 나날이 부유해졌다.

그들만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거래하는 상인들 역시 같이 부유해졌다. 그러니 호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히 그의 이름은 나날이 명성을 얻어갔다.

그뿐 아니라 세르토리우스의 성정 자체가 사치를 부리지 않고 공정했기에 그는 매사에 공정하게 행동했고 그로 인해 팅기스의 토속귀족들조차 그가 이 지역에 계속해서 남아 다스려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상황이었다.

마우레타니아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여전히 싸움질이나 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도움이라곤 아무것도 주지 않으니 자신들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세르토리우스를 따르고 싶은 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부분이기도 했다.

다만 1년 전과 달리 마스타네소스가 아스칼리스에 비해 월등한 세력을 구가하고 있었다. 마스타네소스와 동맹관계로 여겨지는 세르토리우스가 마우레타니아 북서부 지역을 거의 수중에 넣다시피 쥐락펴락하고 있었으니 자연히 승기는 마스타네소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스칼리스의 지원군은 그 세르토리우스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으니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닙니다. 켈타이족입니다.”

“켈타이?”

팅기스를 오가는 상인이라면 그 누구도 가로막지 않았다. 다만 무역협정을 맺은 지역의 상인임을 증명한다면 관세를 완화하거나 때에 따라 받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은 북서부지역에 지나지 않으나 세르토리우스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 권한이 가진 위력이 대단해질 것을 알아본 상인들은 돈과 뇌물을 마다하지 않고 그 자격을 얻고자 했다. 세르토리우스 입장에서도 상인들이 스스로 투자를 해오는 셈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당연히 세르토리우스의 이름은 나날이 그 명성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사람이 왔다고 했을 때 바에티카의 로마인들이 사람을 보내온 것이라 여겼다. 로마인들은 이익에 민감하다. 자신의 통치를 받겠다는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협상안을 가져왔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켈타이라고?

“그렇습니다. 레가투스도 들어보신 적이 있는 이름이실 겁니다. 켈타이족 가운데서도 루시타니아 사람들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루시타니아라는 이름에 대해 상기하곤 그들이 히스파니아 중서부지역에 기거하는 산악민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루시타니아인들이 자신을 찾을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순간 세르토리우스는 불현듯 서후가 떠올랐다. 그동안 자신의 아들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그리스어와 문법을 배웠다. 모두 잊어버려서 알려달라고 했기에 틈틈이 알려줬더니 금세 그것을 터득했다. 거기에 더해 전략과 전술, 로마군의 구조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마치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흡수하는 모습에 세르토리우스는 다시 한번 흡족한 마음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 외에도 벨리키라는 켈타이 밑에서 도검을 제작하는 일을 배우고 있다던가? 재능이 많은 아이니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뒀다.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맡겨놓은 상업 분야도 너무나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었기에 대장장이 일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검을 만지는 자가 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부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충만한 나이가 아닌가? 오히려 그런 부분이 서후의 아이 같지 않은 괴리감을 해소하는데 일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켈타이족이라니? 세르토리우스는 그제야 서후가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알겠다. 다만 테세우스도 불러오게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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