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67화 (67/298)

# 67

67. 안식처를 위하여.

67. 안식처를 위하여.

그 말에 벨리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겨우 쓸만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서후는 형형한 눈빛으로 벨리키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내 당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도록 해주겠습니다.”

“그 검으로 말입니까? 마음은 감사하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바꾸십시오. 영웅의 앞길을 막은 대장장이의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벨리키, 당신의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없다면 직접 만든다. 지식적인 부분은 충분하다. 실무적인 경험이 없을 뿐이다. 이 시대에 맞춘 실무능력을 갖추면 누군가를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자신이 직접 만들면 된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면 되니까. 정 필요하다면 시제품으로 하나 만들어 내고 따라 만들라고 하면 되니 여러모로 괜찮은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벨리키는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보다가 전에 없이 흉흉한 표정으로 서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노인장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대장장이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면!!”

서후는 벨리키가 분노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장장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이 시대는 더더욱 그렇다. 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철의 성질을 오로지 본인의 경험으로 체득해야 한다.

그게 쉬울 것 같은가? 쉽지 않다. 결단코 쉽지 않다. 수십 년간 철을 두들겨도 그것을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장장이 일을 오랫동안 해온 벨리키가 자신의 말에 분노를 터트리는 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장장이를 얕본다고 여긴 것이리라.

하지만 자신은 대장장이 일을 업신여겨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서후는 단호하게 벨리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배우려 하는 것입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도 이런 검을 단조했다면 본래는 훨씬 더 뛰어난 기술을 지닌 대장장이라는 것을 방증하니까. 나는 그런 당신에게 대장장이의 기본을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

“왜?”

“전사라면 믿을 수 있는 무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노인장은 무기를 제조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또 어디서 믿을만한 대장장이를 만날지, 혹 그런 자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마음에 드는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 하하하하하.”

잠시 침묵을 지키던 벨리키는 그야말로 천둥 같은 웃음을 터트리다가 매서운 눈으로 파이살을 바라봤다.

“이 어리숙한 놈아. 보았느냐? 믿을만한 대장장이가 없어서 이미 전사로 이름이 드높은 자가 망치를 잡겠다고 한다. 보았느냔 말이다.”

“큭.”

파이살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좋소. 좋소이다. 당신이 어떤 신분이고 누구든 간에 내게 기술을 배우겠다면 내가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소이다.”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부족한 근력과 육체를 단련할 수도 있고 대장장이 일을 배울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견제로부터 자신의 완벽하게 괴리시킬 수 있었다.

서후는 바로 그날부터 벨리키, 파이살과 함께 지내며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

벨리키 그가 서후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것은 적당한 기술로 자신의 재능을 축내고 있는 자신의 제자 파이살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도 있었다.

검을 만드는 사람은 대장장이다. 따라서 대장장이보다 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검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전사다. 그것도 목숨을 건 전장에서 검의 이모저모를 시험하고 그 장단점을 몸으로 체득한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전사가 대장장이보다 검의 성능과 부족한 점에 대해 더 박식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게 지식적인 측면이든 어떤 본능적인 측면이든 말이다. 물론 전사가 검을 단조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그런 경험적인 부분이 검을 완성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지만 벨리키는 전사가 검을 단조하게 될 때, 또 그 전사가 숙련된 대장장이기술을 지니게 될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 알고 있었다.

켈타이족의 뛰어난 장인들은 동시에 뛰어난 전사인 경우가 많았다.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경험했고 그 경험을 녹여서 검을 제조했다.

물론 검의 품질과 성능을 높이는 건 대장장이 본연의 기술에 달려있다. 전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경험을 검에 녹여낼 수 있는 기술이 없다면 그건 결국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대장장이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일부러 전장에 설 이유는 없다.

먼저 대장장이로서 충분한 기술을 쌓고 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람의 세월은 한계가 있다. 둘 다 경지에 오르는 건 극도로 지난(至難)한 일일뿐더러 전장의 경험은 결코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다.

전사로서의 경험이 대장장이 일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명장이 되기 위해서 꼭 전장의 치열한 경험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자신을 보라. 전사로서의 악연이 망치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신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파이살은 섬세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보다 대장장이로서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그에게 있었다. 이건 자신이 친아들처럼 그를 키우고 가르쳤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전장에 서면 안 된다. 전장에서는 그 섬세한 성품이 도리어 그를 무너뜨릴 것이고 종국엔 망치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사와 대장장이의 삶 둘 중 하나로 고르라면 벨리키는 주저없이 대장장이의 삶을 고를 것이다. 자신에겐 그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지만 자신의 제자에게는 선택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니 대장장이 일에 도움이 된다고 전장을 권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서후가 나타났다. 익티다르와 파드와를 죽인 전사로서 놀라운 재능을 가진 소년, 그 소년이 자신에게 망치질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궁금했다. 당장은 뛰어난 기술을 지니기 어렵겠지만 훗날 전사로서의 재능을 검에 녹여낼 수 있다면 어떤 물건이 탄생할지 말이다.

물론 어린아이의 변덕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상관없다. 제 성품도 모르고 전장으로 향하고자 적당한 물품이나 뽑아내며 전사의 삶이나 동경하는 저 어리석은 놈에게 경각심을 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테세우스라는 소년의 재능이 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또한 이 나이 때 지닐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강한 체력과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토르의 아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탕 탕 탕

검을 내리치는 망치질 소리만 들어도 정확한 박자와 균등한 힘으로 단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철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넓적하게 펴지자 서후는 그 철을 다시 접어서 두들겼다.

“그래. 그렇게 두들겨야 철의 불순물이 사라진다.”

마치 대장장이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능숙하게 검을 단조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철을 쇳물로 녹일 정도로 뛰어난 화력을 보유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검을 만드는 대부분의 방식은 주조가 아니라 단조로 이루어졌고 그건 현재 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화로를 만들어봐야겠어. 그럴만한 여유가 내게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서후는 철광석을 완전히 녹일 수 있는 괴철로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적용하거나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신검을 제련한답시고 벨리키에게 대장장이 일을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지식과 경험의 일체화를 위해 숙련된 장인의 노하우를 배우고 있는 것이었고 그것에 앞서 이 시대 숙련된 장인들이 어떤 식으로 검을 만드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음식도 그러하듯 검도 그러하다. 원재료가 좋지 않으면 나오는 결과물도 좋을 수가 없다. 좋은 철광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대장장이 실력을 보유한 것도 아닌데 무슨 신검을 제련하겠는가? 이대로 기술이 숙련되고 나중에 화로를 갖춘 다음 좋은 철을 구한다면 또 모를까? 지금 서후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대장장이로서의 경험을 습득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 일에 앞서 벨리키가 만든 두 자루의 검을 얻었으니 본래 목적했던 바는 이미 이룬 셈이다.

“다만 그렇게 접쇠를 계속하면 불순물은 빠져나가지만 철의 단단한 성질도 같이 빠져나간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검을 만들 수 없다.”

접쇠단조는 철의 불순물을 제거하지만 동시에 철을 단단하게 만드는 탄소도 같이 제거해버린다. 따라서 접쇠단조만 계속하면 신검이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무른 철을 얻을 뿐이다.

서후는 벨리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숯구덩이에 다시 두들기던 철을 박아넣었다.

그리곤 다시 화로에 풀무질을 가해 더 달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목탄 사이에 검을 박아넣고 열을 가하면 단단한 기운이 다시 철에 스며든다. 다만 표면에만 단단한 기운이 스며드니 다시 단조해서 다시 숯에 집어넣어라. 그런 식으로 반복하면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있는 철이 나온다.”

이렇게 하면 목탄에 있는 탄소가 철과 뒤섞인다. 이걸 케이스 하든이라 부르는 데 다만 겉표면에만 얕게 코팅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뛰어난 검이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코팅해서 내다 판다. 어쨌든 내부는 무른 철이고 외부는 강한 철이니 검의 기능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파이살이 진열해놓은 검들이 대부분으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도 몇 번의 단조과정이 더 들어갔기에 일반 검보다는 튼튼했지만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검과 부딪친다면? 그 결과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나 정성이 들어간 만큼 뛰어난 물품이 나오는 법이다.

그렇게 반복해서 적당하게 검신을 잡아가던 서후는 물에 담가 검을 식혀서 모양을 잡았다.

‘냉매는 물보단 기름이 더 좋긴 하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갈 일이다. 서후는 그제야 검을 만드는 일에서 시선을 돌려 벨리키를 바라봤다.

“어떻게 쓸만한 물건이 나올 것 같습니까?”

“쯔. 멀었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긴 하다만 말 그대로 기초만 잡았을 뿐이야.”

옆에서 벨리키의 잔소리를 같이 듣고 있던 파이살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서후가 단조한 검신을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 가져갔다. 얼마 배우지 않은 것치고는 상당히 뛰어난 실력이었다. 어쨌든 일반 검들보다 여러 번의 제조 과정을 거쳤으니 평범한 검들보다는 좋은 검이 나올 것이다.

“켈타이 방식은 언제 알려줄 생각입니까?”

“지금의 방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켈타이는 두 개의 성질을 가진 철을 꼬아서 단조하지. 나는 기력이 딸려서 어렵고 그건 파이살 저놈이 보여줄 것이다. 만드는 방식이야 특별할 것이 없으니. 결국 중요한 건 감이다. 무른 철과 강한 철의 비율을 잡아낼 수 있는 장인의 감각 말이다. 그건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시행착오가 없이는 찾아내기 어려운 일이야. 쉬운 것만 찾다가는 그 감을 영원히 잃어버리거나 맛볼 수도 없을지 모르지.”

마지막 말은 서후에게 한 말이 아니라 뒤편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려는 파이살에게 던진 말이었다. 파이살은 움찔하다가 말없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한 순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나저나 저번에 카르페타니족 출신이라고 하셨는데 그 부족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검은 핑계였고 켈타이족의 정보를 캐기 위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모양이었군.”

“뭐 둘 다입니다.”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다.”

“이런 욕심은 부려도 탈이 되지 않는 법이죠. 아무튼 왜 그곳에서 나온 것입니까?”

서후의 대답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벨리키가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같이 생활하며 격없이 지내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서후의 질문에 그가 팅기스 이 주변 일대를 들썩이게 하는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건 네게도 내게도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넘어가겠다. 거론하고 싶지도 않고. 네 목적은 카르페타니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렷다? 좋다. 정세를 파악하는 건 현명한 태도지. 말해주마. 카르페타니는 27개의 부족이 모인 부족 연합체다. 히스파니아 중앙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지. 한니발을 도와서 용병으로 활약한 적도 있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강력한 부족연합이로군요.”

그 모습에 벨리키가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연계하려는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생각을 접는 게 좋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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