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62화 (62/298)

# 62

62. 붉은 해전.

62.

콰직 콰직

세르토리우스군의 선단과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선단이 그대로 충돌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거운 충각과 충각이 부딪치며 배가 산산이 부숴졌고 그로 인해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강력한 충격으로 인해 배의 옆구리가 뚫린 배들도 부지기수였다.

화르르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불길이 얼마나 거세졌는지 세르토리우스 배에 붙은 불이 아우렐리우스 코타군의 배에도 빠르게 옮겨붙었다.

“부.. 불을 꺼!”

망망대해에서 배를 잃으면 끝장이다. 숙련된 전투병이라고 해도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코타군은 잠시나마 그 명령체계가 무너졌다.

“이놈. 세르토리우스!”

전장을 살피던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생각보다 피해가 클 것으로 계산되자 큰 분노에 휩싸였다. 이런 식의 전술을 가지고 나올 줄이야. 비어있는 배 따위로 아군의 진격을 막아봐야 그때뿐이다. 배만 잃었을 뿐, 병사들의 손실은 아직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놈을 추격해라! 당장 추격이 어려운 배들은 배를 잃은 병사들을 추스르고 나머지 배들은 세르토리우스를 추격한다. 서둘러라!”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당황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취해야 할 계책을 수립하고 명령을 내렸다.

애초에 코타군의 군선이 세르토리우스보다 많았기에 붉은 화마가 타오르는 아수라장에 휘말리지 않은 배들도 꽤 많았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그것을 알았기에 군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세르토리우스를 사로잡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세르토리우스군을 이끄는 군단의 상징이 저 배에 있었다. 설혹 저 배에 세르토리우스가 타고 있지 않더라도 군단의 상징을 빼앗거나 잃어버리게 만들면 세르토리우스를 잡는 것만큼의 효과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력도 미미한 세르토리우스가 군단의 상징마저 잃는다면 그건 근본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이런 피해를 안고 자신의 해군을 무슨 수로 막을 것이란 말인가?

“근 서른 척이나 되는 트라이림을 불에 태워버리면서 부린 계책이 고작 이거더냐? 어리석은 놈. 차라리 카다스 해협에서 진을 치고 나를 상대했어야 했다. 이대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

서후는 담담한 눈빛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처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이는 기이한 일이었다. 세르토리우스가 극도로 불리한 전장에 출전한 상황이 아닌가? 심지어 세르토리우스가 이번 전투에서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전장이다. 그러나 그에게선 조금의 초조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후가 메마른 심정을 지녀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보기엔 보다 현실적인 부분이 결부되어 있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죽으면 그의 양자 신분도 그 즉시 종결된다. 세르토리우스도 인정하지 않는 저들이 그의 양자인들 인정하겠는가? 따라서 서후의 입장이라면 초조한 기색을 보여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서후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사용한 전술을 기반으로 이곳 카다스 해협에 전략을 수립해두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해상전투로 페르시아군은 1207척의 배를 동원했고 그리스연합은 378척에 불과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이러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살라미스 지역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군을 끌어들였고 결국 대역전승을 거둔다.

당연히 동일한 상황은 아니지만 수적 열세에 처한 것은 그리스나 세르토리우스군이나 동일했기에 세르토리우스는 이때의 전투를 분석하여 카다스 해협의 전략을 수립했다.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규모에 다다르지 않으면 효율적인 결과를 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바로 세르토리우스군의 규모가 그러했다.

물자와 재물을 풀어 마사에실리족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조력을 얻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중과부적이었다.

현대인이라면 식량을 얻기 위해 전장에 나서는 일이 어리석은 일로 보일지 모르나 이 시대는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 병력을 수급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모은 병력의 수마저도 적에 비해 적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질적으로 페르시아군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 해병은 완전무장한 호플리테스였고 페르시아 해병은 일반 보병에 불과했으니 좁은 지역에서 접전이 벌어지면 그리스군이 승리할 확률이 높은 구조였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군은 군단병 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군보다 전투능력이 떨어졌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열세였으니 그리스 연합군의 전략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적의 함선을 노리고 적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 집중했다. 아군의 손실은 최대한 줄이고 적의 병력을 줄인 다음에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이다.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저들의 병력을 분산시켜 상대적으로 아군이 많은 수의 병력을 한꺼번에 맞닥뜨리지 않게 만들려는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로 인해 수십 척의 배를 잃게 될 테지만 어차피 모든 배를 운용할 병력도 없으니 그렇게라도 사용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나쁘지 않은 전술이다. 제법 넉넉한 물자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을 병사로 징집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저들의 수를 줄이고 각개격파를 시도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다.

전쟁이란 변수가 얼마나 많은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우연찮은 한 사건으로 인해 패배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이다. 세르토리우스 역시 그런 식으로 안니우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닌가? 믿고 있던 자신의 장수, 살리나토르가 예상치 못하게 칼푸르니우스에게 암살당함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던가? 하물며 지금은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재화를 잡아먹는 괴물이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군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군단병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조군으로 징집된 자들이 언제까지 아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서후는 보다 효율적인 전략을 원했다.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거나 가능하다면 단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그런 전략 말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가 세운 전략 외에는 그로서도 별다른 방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후는 우연찮게 누미디아 지역에서 온 상인들과 대화하며 그 방안을 찾아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진열한 상품을 목격하면서였다. 그렇게 얼마 전 상인들을 통해 주문한 물품이 대부분 팅기스로 들어왔다. 이걸 세르토리우스가 세운 전략과 잘 엮어서 사용한다면 단번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으리라.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서후는 호라티우스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팅기스로 돌아온 지 한 달가량.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계책이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남은 건 이제 하나. 적이 준비된 전장에 들어서는 일이다.

‘뱃길로 하루 거리나 반나절 거리에서 습격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움직였으니.. 그러니 곧 온다. 곧.’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를 막을 수 없었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죽는다면 전쟁에서 승리해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서후는 애써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가 담담한 이유였다.

*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부관이 앞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다섯 척가량의 트라이림을 바라보고 외쳤다.

“레가투스! 이대로는 저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카다스 해협으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배가 크다고 속력이 더 빠른 건 아니다. 대형 충각을 갖춘 5단 갤리선의 무게는 무려 3000톤에 달했다. 그러니 기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도망치는 세르토리우스군은 배의 무게를 가볍게 했는지 평범한 3단 갤리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부관의 말에 주변의 선단을 바라봤다. 트라이림 10척에 퀸퀴림이 15척 정도로 줄었다. 피해가 상당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세르토리우스의 괴랄한 습격에 트라이림 20척과 퀸퀴림 5척을 잃은 것이다. 모든 배가 완파된 것은 아니지만 더 항해를 지속하거나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배의 숫자가 그만큼이나 되었다. 돛대가 부서지거나 돛이 타버리기만 해도 이번 전투에 당장 합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노는 근접전투에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보조수단이지 주력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발대로 남은 배들이 아쉬운 대로 남은 병력을 멀쩡한 배에 나눠 싣고 이동했지만 그 결과 추격 속도가 더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진형을 유지하는 건 요원한 일에 불과했다.

그것마저 어려운 병력은 항해를 지속하기 힘든 배와 함께 근처의 해안가로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잃은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당장 가용한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과언이 아닌 지경이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스름한 하늘을 보니 곧 동이 틀 것으로 보였다.

“이대로 계속 추격해라!”

“하오나 레가투스. 지금으로선 저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내가 그것을 몰라서 그렇게 명하는 것 같으냐?”

그러자 다른 부하가 코타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레가투스. 어차피 저들을 따라잡는 건 요원한 일이니 진형이라도 추스르고 추격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꽤 많은 거리를 항해했으니 곧 카다스 해협에 다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저들이 그곳에 계책을 펼쳐두었다면 아군이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세르토리우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고사를 따라 아군을 상대하려는 모양인데. 흥! 카다스 해협과 살라미스 지역은 완전히 다른 지역이다. 또한 놈들이 그리스 연합군처럼 강군도 아니다. 아군의 배가 기동성이 떨어지나 그 돌파력은 놈들을 압도한다. 무엇보다 아군의 배가 저들보다 많다고는 하나 페르시아군처럼 대군도 아니니 좁은 해협에 휘말려 아군끼리 충돌할 리도 없다. 그러니 놈들이 무슨 준비를 했든 이대로 쳐부술 것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따르라!”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나 코타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이의를 제기하던 부관들은 더는 그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

“레. 레가투스입니다!”

“세르토리우스님입니다!”

“카다스 해협에 들어섰습니다!”

세르토리우스의 배를 발견한 병사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배 위에서 세르토리우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서후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뒤로 코타군의 선단이 보입니다. 트라이림 10척에 퀸퀴림 15척에 달합니다.”

긴박한 어조로 계속해서 보고가 올라왔다.

“당장 레가투스를 호위해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나 서후는 냉정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내릴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고 대기하라.”

“하오나!”

서후는 말없이 서늘한 눈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바라봤다. 그가 입을 다물자 서후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그런 서후의 눈에 세르토리우스와 함께 한 다섯 척의 배의 진입속도로 빠르게 느려지는 것을 확인했다.

지중해는 대서양보다 바다의 염도가 높다. 이는 지중해의 증발량이 높기 때문인데 이 증발량을 메우기 위해 이곳 카다스 해협의 해류는 대개 대서양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흐른다. 심지어 지금은 바람도 대서양 지중해 방향으로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의 배들은 일제히 돛을 내리고 노를 젓고 있었지만 자연히 그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세르토리우스의 충성된 부하들은 코타군에게 따라잡힐까 조바심을 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카다스 해협에 진입한 코타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배의 무게가 더 무거웠기 때문에 세르토리우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느려지고 있었다. 물론 무게로 인한 추진력이 있어서 얼핏 보기엔 저들의 배가 세르토리우스의 배보다 빠른 것처럼 보이긴 했다.

서후는 카다스 해협에 진입한 배의 속도를 냉철하게 분석하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세르토리우스와 코타의 배 모두 추진력을 거의 잃은 시점이었다.

“진격! 진격하라!”

“와아아아아!”

둥둥둥둥둥

둥둥둥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많은 2단 갤리선이 카다스 해협의 해류와 바람의 기세를 타고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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