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직접보고 판단해라.
58. 직접보고 판단해라.
서후의 폭풍처럼 몰아친 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한 해적들이 서둘러 항복을 청해왔기에 생각보다 많은 해적들이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못해도 수백은 죽거나 다쳤고 그렇게 수백의 사상자들이 에부수스의 해안 이곳저곳에 처참한 몰골로 너부러져 있는 모습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서후는 몸과 얼굴에 튄 피를 닦지도 않은 채 곧바로 후사인과 해적들이 지내던 도시로 향했다. 그 뒤로는 기세등등한 마사에실리족과 두려움에 찬 해적들이 포박된 채로 줄줄이 끌려오고 있었다.
도시에는 해적 외에도 이곳의 거주민들과 상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서후와 그 세력을 힐끔거렸다. 해적이 거주민이고 거주민이 해적인 시대니 어떤 면에서는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긴 했다.
서후가 후사인이 지내던 거처로 들어서자 소우판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약조는..”
“재물은 너희 마음대로 해라. 단 해적의 것들만 건들고 상인들은 일단 내버려 둬.”
“하지만!”
“해적들의 재물만 약속했었다. 잊었나?”
서후의 서늘한 눈빛에 소우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서후가 그를 불러세웠다.
“생각보다 마사에실리족의 숫자가 많지 않더군.”
서후의 말에 소우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거야 나를 따르는 자들만 함께 했으니까. 네 미친 소리에 천 명이 넘는 부족전사들이 함께 했는데 뭘 더 기대하는 거지? 어쨌든 결과는 좋았지만 말이야.”
“재물을 챙긴 다음 아비라로 돌아갈 생각인가?”
“돌아가야지. 이 척박한 섬에서 해적들과 계속해서 드잡이질할 생각은 없다.”
“돌아가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라. 피티우사 제도를 같이 점령하자는 이딴 개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미리 거부하지. 배와 재물을 얻었으니 더는 네게 휘둘릴 생각이 없다. 네 신분이 얼마나 대단하던 간에 현재 네 수하는 고작 둘뿐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단호한 소우판의 태도에 서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수틀리면 내 목을 치겠다? 쯔쯔.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느린 것 아닌가? 치려면 진작 쳤어야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치던가. 네 목숨보다 내 목숨을 중하게 여기는지는 미처 몰랐군. 용케도 참았어.”
소우판은 서후의 말에 아차 싶었다. 눈앞의 소년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 자리에는 후사인의 목을 가져온 나디르라는 자도 함께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 목숨이 네 목숨보다 중하기에 여기서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도록.”
그를 죽이면 천 명의 마사에실리족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소우판의 가치가 그 정도로 중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기엔 서후 자신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했다. 그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소우판이 검자루에 손은 가져간 채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후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그래. 제안.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네 갈 길을 가면 된다. 네 말대로 단 세 명이 천 명이 넘는 마사에실리족을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서후의 말에 소우판은 슬그머니 검자루에 올렸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우리가 받아들일 걸 확신하는 모양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가 사라지면? 포로로 잡은 해적 놈들은 감당할 수는 있고?”
그것만 봐도 애초에 제안을 거부할 거란 생각이 네 머릿속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겠지. 영리하군.”
“뭐?”
소우판은 누가 할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서후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됐고. 네 제안이나 말해봐.”
“여기서 얻은 재물이 소진되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지? 아비라에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생각이 없는 자들 같지는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결국은 마우레타니아 왕을 손을 피해 이리저리 갈라져 그 명맥을 찾아보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군. 아 이미 그런 절차를 밟고 있었던가?”
소우판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서후에게 말했다.
“네놈. 나를 조롱하려고 불러세운 것이냐?”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까?”
“그럼 네가 지껄인 말의 의도가 뭐지?”
“너희가 밟게 될 미래를 말해준 것에 불과하다. 나를 죽일 것처럼 바라봐도 정작 내 말에 반박하나 하지 못하는 네 태도가 그 증거가 되겠군.”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고 있는 소우판을 차분한 시선을 바라보던 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제안이 미친 소리라고 여김에도 나를 따라 이곳 에부수스까지 왔다. 단지 배를 얻고 재물을 얻을 수 있어서? 아니. 아니야.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이니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따라나섰을 테지. 어쨌든 배와 재물은 보장된 셈이니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아니 그런가? 단순히 배와 재물이 목적이었다면 네 눈에 거슬리는 나를 두고 애써 참을 필요도 없었을 거야. 네 말대로 고작 세 명이 아닌가? 어쨌든 너를 따라나선 자들은 그런 네게서 희망을 봤던지도 모르겠어. 근데 말이야. 네게 그들에게 제시할 길이 있긴 한가? 아니면 그대로 다시 돌아가면 없던 희망이 생기기라도 하나?”
“······.”
정곡을 찔렸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기 때문인지 소우판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알아보니 에부수스는 염료, 소금, 양모, 가룸(Garum, 로마인의 젓갈) 등이 특산물로 유명한 곳이더군.”
갑자기 특산물은 왜 거론한단 말인가? 소우판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규모 해상무역을 계획하고 있다. 아마 소우판 너라면 그 기회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너희에겐 배가 있고 재물도 있고 이 지역 특산품을 거래할 우선권도 있다. 뭘 하면 되겠나? 많지는 않지만 마침 상선도 여러 척 존재하는군.”
“지금.. 나보고 무역을 하라는 건가?”
지금까지 유목민으로 살아온 자신보고 해상무역을 하라는 소리인가? 소우판은 황당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설마? 네가 하면 망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왜 너희 부족은 상인도 없나?”
“으음.”
전혀 상상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었다. 유목민이 해상무역이라니? 따라서 소우판은 멍한 표정으로 침음을 뱉을 뿐이었다. 그렇게 온갖 생각이 스쳐가던 소우판의 머릿속에 과거에 융성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사에실리족이 융성할 때는..
“이게 네 제안인가?”
서후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반문했다.
“왜? 거부할 텐가?”
“······. 테세우스. 너는 놀라운 사람이다. 너와는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군. 내가 뭘 하면 되지?”
“열심히 무역해. 열심히 보호하고. 열심히 세력을 불리며 그렇게 너희 부족을 위해 살면 된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마사에실리족이 활발하게 해상에서 활동을 전개하게 되면 자연히 주변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들이 유목민이라지만 해상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다. 노잡이가 없음에도 배를 몰고 이곳까지 다다른 자들이 아닌가? 잘만 된다면 갈등을 일으킬 두 부족을 하나로 엮어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뭐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네가 얻는 건 뭐지?”
“현재로서는 로마군의 정황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건.. 너무 쉬운 일이군. 그게 전부인가?”
무역을 한다면 어차피 이 근방 곳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런 와중에 취합되는 정보를 넌지시 알려주는 일이야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현재로서는 그게 전부다. 너희 세력이 커지고 결국 양자택일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것도 너희의 판단대로 해라.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도록. 말했지만 우리가 로마가 될 것이다.”
“······.”
참신한 헛소리가 분명한데 이번에는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아직은 누구도 에부수스 섬을 떠날 수 없게끔 조치해두도록.”
“알겠다.”
소우판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 길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서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디르에게 말했다.
“나디르.”
“예.”
“둘뿐인데 평소대로 해.”
“그래도 이게 좋을 것 같군요.”
그 말에 서후는 나디르를 힐끗 바라본 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좋을 대로.”
“해적들을 제게 맡길 생각이십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걸 모르겠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제 의견을 묻는 겁니까?”
“맞아. 의견을 묻는 거.”
“해적은 해적입니다. 근본은 잘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토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럴 상황도 아니고.”
나디르는 고개를 주억이며 서후에게 대답했다.
“다만 해전을 염두에 두고 계신 거라면 어차피 노잡이는 필요합니다. 팅기스와 이곳에서 얻은 트라이림을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숙련된 노잡이는 필요하니 일단 제가 그들과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으흠.”
“뭘 염려하시는지는 짐작이 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정된 삶을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해적의 삶은 그럴 수가 없죠. 그래서 테세우스님도 해적의 삶을 멀리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래도 나디르, 당신은 해적의 삶에 만족하며 살지 않았나?”
“만족이라기보다는 체념이었죠. 딱히 이제 와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현재 나를 대하는 태도의 이유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테세우스 당신은 제게도 놀라운 사람입니다. 이대로 해적으로 스러지느니 당신에게 목숨을 걸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뿐입니다. 일단 저 스스로만 돌아봐도 저는 그 나이에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그거야! 흠. 어쨌든 나와 함께한다니 기쁘긴 한데 알다시피 상황이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뭐 언제는 좋은 상황이었습니까? 카르타고의 토페트에서의 살육도 당신에게 좋고 유리한 상황이라 저지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팅기스나 이곳 에부수스의 일 역시 마찬가지였죠. 세르토리우스군에 합류한 일 자체도 저들이 유리하고 좋은 상황에 처했기 때문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암튼 그럼 그 일은 네게 맡기지.”
어차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해치웠다. 메노르카의 샤파트도 처리하면 좋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칫하면 이곳에서의 계획이 그놈 하나 토벌한답시고 모두 일그러질 수도 있었기에 놈은 애초부터 계획 밖의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디르도 밖으로 나가자 서후는 방안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볕과 미적지근한 바람에 노곤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참고로 호라티우스는 마사에실리족과 포로로 잡은 해적들을 통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디르가 해적들의 처우를 해결하러 움직였으니 그나마 그 분주함이 덜해질 것이다.
‘후우. 많은 일이 지나간 것 같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군.’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못해도 1만 이상의 로마군이 팅기스로 몰려올 것이다.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로마군만 1만 명이라니. 가슴이 절로 답답해져 왔다.
자신이 안배한 모든 것들도 결국 이 로마군을 물리친 후에야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다가 자신이 로마의 대척점에 서게 되었던가?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것을 고심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비릿한 혈향이 콧속을 파고들자 서후는 일단 좀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피도 아니고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피인데 그것을 묻히고 아무렇지 않게 다니다니.. 서후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새삼스레 생경함을 느꼈다.
“후우.”
그러고 보니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았다. 그는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밖으로 나서며 문밖을 지키고 있는 마사에실리족 병사에게 물었다.
“상인들은 어디에 모여 있지?”
“주민들과 함께 도시의 광장에 모여 있습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그 쉼이 잠깐 눈을 붙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