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 미친놈.
56.
길이는 대략 30미터에 폭은 4미터 정도 되는 낡은 2단 갤리선들을 바라보던 호라티우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설마 이게 전부야? 이런 낡아빠진 바이림(bireme, 2단 갤리선)으로 해적들과 싸우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다못해 바이림을 작고 더 빠르게 개조한 헤미올리아(hemiolia)라도 있어야 할 것 아냐? 군선은 그렇다 쳐도 상품도 실려있지 않은 상선은 대체 어디에 쓰라고?”
“트라이림(trireme, 3단 갤리선)을 비롯한 쓸만한 배들은 아스칼리스님이 대부분 이끌고 가신지라 저희도 별수 없습니다. 상선은 저희도 의문이지만 위에서 지시한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전나무와 같은 가벼운 소나무 계열로 건조된 2단 갤리선은 날이 좋고 파도가 잔잔한 날 띄워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대개 전투함의 수명은 잘 관리해야 20년인데 가져온 배들의 상태로 볼 때 몇 년 안에 폐기처분 해야 할 상태의 배들이 태반이었다.
배를 가져온 아비라의 하급관리들에게 호라티우스가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디르는 차분한 어조로 호라티우스에게 말을 꺼냈다.
“좋은 배라면 팅기스에도 제법 남아 있다. 그럼에도 배를 요구했다는 건 테세우스가 이것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일단 출항이 가능한 배부터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다.”
“퉤. 별수 없지.”
호라티우스는 선창의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은 다음 항구 앞에 포진한 수많은 2단 갤리선을 바라봤다.
“숫자만 많았다뿐이지 영 쓸모가 없어. 영. 쯔.”
*
“지금 뭐라고?”
마사에실리족 부족장 중 하나인 소우판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제법 대가 세 보이긴 하다만 소년 따위가 아스칼리스의 명장인 익티다르와 그 휘하의 맹장인 파드와를 베어 넘겼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이라니 아마도 휘하 군인들이 죽이고 눈앞의 소년에게 영예를 씌운 것일 테지.
뭐 어쨌든 그들은 죽었고 소문의 주인공인 테세우스라는 소년은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 소문이야 어떻든 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란 말인가?
“똑똑히 들었을 텐데 에부수스 섬을 너희들이 점령해줘야겠다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이곳 아비라와의 거리가 가깝기나 한가? 에부수스라면 배를 타도 3일 거리에 달한다. 더욱이 드센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곳을 왜 자신들이 점령한단 말인가?
“자세한 내용이야 너희들에게 말해봐야 이해하지도 못할 테고 듣지도 않을 테니 간단하게 말하겠다. 기회를 줄 때 잡아라.”
냉정한 그 말에 소우판은 더 참지 못하고 탁자를 두 손으로 강하게 치더니 서후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탕!
“기회? 씨발. 에부수스의 해적 새끼들을 치는 일이 우리에게 기회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이 애송이 새끼야!”
서후는 그가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소우판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긴 다음 왼손으로 탁자에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터억.
“크흑! 이.. 이 새끼가?”
“이 새끼고 나발이고 죽고 싶나?”
서후의 서늘한 발언에 주변에서 칼 뽑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서후 곁에는 사비누스를 비롯한 로마 군인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며 살벌한 눈빛으로 마사에실리족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감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서후와 소우판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죽여도 나와 대화할 마사에실리족은 많아. 라틴어를 할 수 있는 마사에실리족이 너 하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 기억하도록. 이번 한 번만 봐주지.”
서후는 그 말과 함께 거칠게 소우판의 머리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밀어버렸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소우판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당탕탕탕
“이.. 씨발 놈이!”
쓰러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우판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검을 뽑으려고 하자 서후가 다시 말했다.
“그 검을 뽑으면 죽는다.”
소우판은 싸늘한 서후의 말에 검을 뽑지 못했다.
무슨 소년의 힘이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어지간한 힘을 가진 성인이라고 해도 자신을 그토록 세게 밀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소우판은 자신의 추측과 달리 소문이 어떤 거짓이나 포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서후가 입을 열었다.
“마사에실리족이 보쿠스 왕의 딸 야스미라에게 충성을 바친다지?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 어떻게든 이 틈을 타서 왕권을 차지할 모양인데 한 가지만 말해주지. 헛된 야욕은 빨리 버리는 게 좋아.”
“뭣이?”
“로마. 로마를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로마는 자신을 거슬렀던 적에게 자비심을 보이지 않아. 너희에게 없던 자비심도 생기게 만들 재물이 있다면 또 모를까.”
“크흑.”
“그리고 너희에겐 시간이 없어. 왕권이 정립되면 야욕을 보였던 너희 지배층은 왕의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너희 부족들도 이곳저곳으로 갈가리 찢어지겠지.”
“······.”
소우판이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노려보자 서후는 의자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계속 서 있을 텐가?”
소우판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자리에 앉자 서후가 말을 이었다.
“마우레타니아에서는 마우리족이, 누미디아에서는 마실리족이 견제한다. 그렇다고 내륙으로 가자니 두 부족들보다 드센 게툴리족이 활보하고 있고. 심지어 너희 부족은 나날이 약해지고 다른 부족들은 점점 더 세가 강성해지고 있는 상황인 데다가 설혹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도 로마가 버티고 서 있지. 두 왕족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마우리족의 공주와 결혼을 성사시키면 너희 마사에실리족이 마우레타니아의 왕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천만에. 너희는 결코 왕권을 차지할 수 없어.”
“그래서?”
소우판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그런 소우판에게 서후가 냉정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니 내 제안을 받아들이란 말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해서 지껄이는군. 마우리, 마실리, 로마로도 모자라 에부수스의 해적들까지 적으로 삼으라는 소리인가?”
“아니 로마를 우방으로 삼으라는 소리다. 우리가 곧 로마가 될 테니까.”
“뭐? 하하하하.”
한차례 크게 웃음을 터트리던 소우판은 웃음을 거두고 서후를 바라봤다.
“참신한 헛소리인데 솔깃하긴 하군. 그러니까 너희를 돕기만 하면 우리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이 말인가? 운이 좋으면 권좌를 획득할 수도 있고?”
“그건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좋아. 우리가 에부수스를 점령하면 그 후에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반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다. 어떤 경우엔 수십 년이 걸릴 때도 있고 싹조차 틔우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열매를 취하는 건 한순간에 불과하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에부수스를 점령한다고 당장 달라지는 건 없다. 오늘 씨를 뿌리고 내일 당장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등신도 있나?”
“뭐라?”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그것도 너희 마음이다.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겠지만. 단 너희가 에부수스 토벌에 힘을 보탠다면 포로와 저들의 배를 제외한 재물은 모두 너희 것이다. 거기에 너희가 에부수스로 타고 이동한 배는 모두 너희 소유로 인정해주지.”
소우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서후의 말대로 왕권이 안정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렇다고 아비라를 전복시킨다면 이건 그야말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이들과 손을 잡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더욱이 배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해적을 친다고 했으니 그 배는 어쨌든 전투선일 것이다.
무엇보다 에부수스 해적 놈들이라면 자신들도 과거에 맺힌 게 많았다. 놈들을 토벌하고 그 재물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쁜 일은 아니라 여겨졌다.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린 대가가 불명확했기에 던진 말에 불과했을 뿐, 사실 해적과의 관계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놈들과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차피 저들은 하던 짓을 계속할 것 아닌가?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다. 에부수스를 점령하려는 이유가 뭐지?”
“원한 맺은 놈이 있어서 말이야. 그 외에는 기밀이다. 그 후에도 우리와 협력하고자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말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게 왜 궁금하지? 단기적으로는 재물과 배를 얻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우리와 손잡고 너희 부족의 미래를 열 수도 있는 제안이다. 이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아니면 이것 외에 현재 너희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있던가? 말했지만 선택은 너희 몫이다.”
“네놈.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좋다. 받아들이도록 하지.”
“지금쯤이면 항구에 배가 준비되고 있을 거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새벽에 같이 출정하도록 한다.”
“테세우스님!”
그 말에 사비누스가 급히 서후를 불렀고 소우판 역시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후가 다시 말했다.
“왜. 불가능한가? 걱정마라. 너희보고 해전을 치르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으드득. 아니. 가능하다. 그리고 해전 역시 문제없다.”
소우판은 불같이 화를 낸 뒤 서후를 떠나갔다. 서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피티우사 제도는 에부수스의 후사인과 메노르카의 샤파트 간의 불화로 전쟁이 일어났을 공산이 크다. 후사인을 죽이는 건 나디르가 알아서 할 테고, 문제는 로마군의 움직임인데..’
에부수스를 점령하여 후사인에 대한 나디르의 복수를 이루고 해상무역에 대한 위협을 다소 해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사실 그건 부가적인 일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을 대비하는 일이다.
그게 당장 무슨 도움이 될까? 자원과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먼 훗날 필요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투자한 당사자가 그 열매를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자유무역지대를 확보하고 그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당장 로마군이 쳐들어오는 판국에 이 같은 안배가 다 무슨 소용일까?
술라는 지체하지 않고 군을 보내올 테니 그 모든 일에 앞서 서후는 그들의 뒤를 찌를 수 있는 비수를 마련하기를 원했다. 그게 마사에실리족이든 피티우사 제도에 기거하는 해적들이든 또 누가 되든 말이다.
‘냉정하다고 해도 별수 없다. 마우리족과 마사에실리족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 역시 마우리족을 택할 수밖에 없다. 마사에실리족이 패권을 잡아봐야 이 지역에 대혼란만 일으킬 뿐이고 애초에 패권을 잡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들이 마우레타니아 내부에서 마우리족과 날을 세우는 건 내 계획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당한 미끼를 줘서 외부로 돌리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야. 마사에실리족에게도 이득일 런지는 결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것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다.’
문득 서후는 자신이 있지도 않은 희망을 팔고 실물을 가져오는 사기꾼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마음에 걸린다면.. 정말 그렇게 만들면 될 일이다.’
당장 거래에 내세울 수 있는 실물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진짜 같은 허상이라도 팔아야지.
‘제길.. 정말 사기꾼 같군.’
그렇게 생각에 잠긴 서후에게 사비누스가 굳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대체 어쩔 생각이십니까? 이건 사전에 토의되지 않았던 내용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당초 계획은 아비라를 비롯한 이 근방 도시들의 술라군 지원을 조약을 통해 일차적으로 동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후사인 그자를 죽인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분명 우리와 원한을 맺었으니 술라의 부하 장수에게 적극 협조할 우려가 높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마사에실리족으로 에부수스를 치다니요? 본래는 그들은 마우리족의 배신을 대비하기 위해서!”
“마우리족을 직접 만나 보니 알겠더군요. 이들은 현왕조에 대해 충성심이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가 이득이 되는 한 마우리족이 먼저 우리를 배신할 확률은 낮습니다. 또한 마우레타니아 왕의 대항마로는 적절한 인물이 있으니 마사에실리족은 일단 배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비라의 회의장에서 괜히 강경한 태도로 저들을 도발하고 압박한 것이 아니다. 그건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지 아니면 도시국가의 느낌이 강한지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서후는 후자일 것이라 판단하고 계획을 수립한 것이고 다행히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이 근방 주요 도시 두 곳의 상황이 그러하니 나머지 도시야 더 볼 것도 없었다.
“설마 서로를 상잔시킬 생각입니까?”
“아니요. 그들을 등에 업고 협상할 생각입니다. 일단 후사인은 죽어야겠지만. 일이 생각대로 풀린다면 마사에실리족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피는 좀 흘려야겠지만 마우레타니아에 남아 있는다면 어차피 더 많은 유혈사태가 발생하겠죠.”
“허. 뭘 계획하고 있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렵군요. 대체 한꺼번에 몇 가지 계략을 수립하고 계신 겁니까? 후우. 좋습니다. 이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지금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이동하셔서 남은 두 도시 타무다와 릭서스와도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십시오. 두 도시는 일단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또한 아버지께는 정보망을 구축하고 가능하다면 적의 보급로를 끊을 별동대를 만들어보겠다고 말씀해주십시오. 후자까지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정보망을 구축할 수는 있을 겁니다.”
“예? 지금? 혼자 몸으로 마사에실리족과? 그들을 어떻게 믿고?”
서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했던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호라티우스와 나디르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저들이 머리가 없지 않은 한 섣불리 저를 해하려 하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아군은 현재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사비누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보다가 눈빛을 빛내며 서후에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한 전권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군요. 그러니 제가 후회하지 않도록 반드시 살아 돌아오십시오.”
“물론입니다.”
당연한 소리다. 죽으려고 이 고생을 하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제 스스로 죽을 자리를 자꾸 찾아가는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