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 미친놈.
55. 미친놈.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후는 천 옷에 중요한 부위만 보호한 경갑주를 걸친 병사들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야스미라를 따라 이동했다. 당연히 호라티우스와 나디르 역시 그와 함께였다.
서후는 도착한 장소를 확인하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야스미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연회장이 아닙니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응당 그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공식행사는 나중에 하더라도 간단하게 준비해 봤습니다.”
간단하게? 한 사람을 대접하기엔 너무 과하지 않은가? 각양각색의 다양한 음식은 물론 값비싸고 화려한 장식들로 곳곳이 치장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마련된 장소가 너무 넓었다.
주변을 확인하던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는 슬그머니 자신의 검자루에 손을 가져갈 준비를 했다. 이렇게 넓은 곳이라면 많은 수의 병사가 매복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기색을 느낀 서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호라티우스와 나디르의 행동을 저지한 다음 야스미라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안내한 곳이 연회장이라는 것이 잠시 의아하긴 했지만 연회장의 풍경에 대해 논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닌 이상 간단하든 화려하든 말을 길게 늘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서후는 짧게 대답한 다음 야스미라에게 질문했다.
“야스미라, 당신은 언제 가장 확고한 동맹이 구축된다고 봅니까?”
“글쎄요. 저는 여인이라 잘 모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물론 그 전에 동맹의 대상이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파악해야겠지요.”
그녀는 서후를 연회장으로 데려온 이유에 대해 넌지시 언급하고 있었다.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일단 상대방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 아니냐?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테세우스님은 저를 믿지 않으시는 모양이네요.”
야스미라는 그 말과 함께 서후 뒤편에 석상처럼 버티고 있는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를 슬쩍 바라봤다.
호라티우스가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함부로 나설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애써 침묵을 지켰다.
그때 서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라티우스, 나디르. 밖의 병사들과 합류하도록.”
호라티우스가 염려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서후는 강한 눈빛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후의 강경한 태도에 하는 수 없다는 듯 호라티우스와 나디르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병사들이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에게도 연회장의 음식과 술을 제공하도록 미리 명해두었어요.”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야스미라는 서후의 이모저모를 나른한 눈빛으로 훑어보다가 말했다.
“테세우스님은 저와 중대사를 거론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시나요? 그것도 아니면 로마인이라서? 하지만 제가 알기로 로마 여인들은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여인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니 그것도 아니라면 혹 제게 관심이 있으신 가요?”
야스미라는 그 말과 함께 걸치고 있는 하늘하늘한 천을 슬며시 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풀썩
걸치고 있던 천이 사라지자 야스미라의 늘씬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얇은 옷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그렇다 쳐도 서후가 정말 애도 아닌 이상에야 지금의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딱히 나이와 연관 지을 문제는 아니겠지만 20살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팜므파탈의 마력을 가진 여인이라.. 하긴 이 시대엔 15살만 넘어도 성인으로 취급했던가?’
연회장의 화려한 풍경과 모든 것은 서후,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한 그녀의 노림수였다. 지난 회의장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닌가?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어지간한 자들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 분명했다.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당신을 거부할 사내가 몇이나 될지 의문이군요. 하지만 이 자리가 야스미라, 당신에게 사적인 관심을 표할 자리는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소년에 불과합니다. 여러모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정말 그런가요?”
그녀의 시선은 서후의 하반신을 슬쩍 훑고 지나갔다. 서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음.”
서후가 침음을 뱉으며 다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야스미라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서후에게 말했다.
“그럼 테세우스, 당신이 말해보세요. 언제 확고한 동맹이 구축되는지? 더욱이 그 동맹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 말이죠.”
그 말에서 서후는 웃음 속에 숨어있는 그녀의 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총동원해 살아남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말이다.
‘치열하게 고심한다는 점에선 나와 다를 바가 없군.’
서후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보장할 때. 그것만큼 확실하고 견고한 동맹관계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지만.”
“이익을 보장한다? 그건 회의장에서 당신이 언급한 자유무역지대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맞습니다.”
“제가 잠시 알아보니 그건 델로스섬의 무역 형태를 말하는 것 같더군요.”
이 시대에는 자유무역협약 자체가 없다. 하지만 기록된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는 에게해의 델로스섬 유역이었다. 또한 제국 시대에 들어서 간단한 법을 제정하고 자유무역을 행하는 도시가 여럿 있기도 했다. 당연히 연례행사로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무튼 그런 고로 야스미라가 자유무역지대라는 말에 대해 생소하게 여기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네요. 델로스섬은 말 그대로 그곳을 통치하는 자가 없으니 그런 식의 무역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차치하고 대체 저희에게, 아니 내게 무슨 이득이 된다는 거죠? 세금을 줄이거나 거두지 않는다는 정책 같은데 결국 그건 상인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에 불과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건 달리 말하면 이 지역의 무역이 활성화된다는 이야기죠. 그렇게 자유무역이 활성화되고 시장이 커지면 자연히 이 지역의 경제가 크게 부흥하게 될 겁니다. 세금을 적게 거두어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야스미라가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서후는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그 효과가 미미할 테고 의미 없는 짓에 불과해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 이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물론 현시점에서 자유무역지대는 팅기스로 한정되고 아비라는 회원의 자격으로 가맹하는 정도지만 이게 성공적으로 확장된다면 말했다시피 야스미라, 당신에게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빛내며 서후에게 다시 말했다. 서후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을 설명하고 확고한 지지를 얻기 위해 그녀와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일단 현 상황부터 짚고 가야겠군요. 현재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팅기스를 제외하고는 물류의 흐름이 막혀있는 상황입니다. 계획대로 이 근방의 도시들과 불가침조약이 모두 체결되면 물류의 흐름이 더 막히는 사태는 방지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완화 시킬 수 있는 효과를 낳을 겁니다. 말했지만 아스칼리스나 마스타네소스도 이러한 흐름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아스칼리스로서는 더더욱 그렇겠죠. 마스타네소스로서도 아군이 주체가 된 이상 적어도 이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누가 왕위가 되느냐는 일단 차치하도록 하죠. 그것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복잡해지니까.”
야스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후가 말을 다시 이었다.
“자유무역의 이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각 시장의 경쟁력이 강화됩니다. 그로 인해 각 물품의 시장경쟁력 역시 강화시킬 수 있죠. 결국 이건 수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농부가 팅기스와 아비라에 각기 한 명씩 있다고 합시다. 아비라의 농부는 밀을 더 잘 수확합니다. 그렇다고 보리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보리를 수확하지 않는다면 아비라에는 보리 공급이 아예 끊겨버릴 테니까. 반대로 팅기스의 농부는 보리를 더 잘 수확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같은 이유로 밀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 두 농부가 아비라든 팅기스든 같은 도시에 있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아마도.. 밀을 잘 수확하는 사람은 밀을, 보리를 잘 수확하는 사람은 보리를 수확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나눠진 두 시장을 하나로 합치면 그런 효과가 발생합니다. 경쟁력은 강화되고 시민들은 전보다 더 양질의 물품을 그것도 다양하게 맛볼 수 있겠죠. 혹 밀을 잘 수확하는 아비라의 농부가 수확한 보리의 질이 팅기스의 농부가 수확한 보리의 질보다 나을 지라도 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부의 불균형이 극심해진다는 단점 등이 있지만 불균형의 이점을 누리는 것이 서후인데 알게 뭔가? 그런 것까지 고려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무역지대가 팅기스로 한정된다면 저희 아비라는 그 이점을 누릴 수 없는 게 아닌가요?”
“아비라처럼 저희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동맹도시의 상단에는 낮은 관세를 부과할 겁니다. 후에는 관세를 철폐할 수도 있겠죠. 그리되면 이윤에 민감한 상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 같습니까? 더욱이 점차 자유무역지대가 확장된다면?”
서후는 질문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했다.
“무역이 무역을 창출하는 선순환을 가져오게 되겠죠. 그러니 일단 나의 제안으로 아비라는 잃을 게 없습니다. 얻을 것들만 넘쳐나죠. 일이 잘못될 경우, 야스미라 당신은 아스칼리스의 분노를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위기와 기회는 항상 붙어 다니는 법입니다. 따라서 아비라와 연관된 거래는 야스미라 당신의 이름 아래에서만 거래될 겁니다. 이만하면 위험에 대한 보상이 될 것 같군요.”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그거야 내가 그래도 현대인이랍시고 곁다리로나마 들은 게 있어서 그렇지. 예전보다 명쾌해진 점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식도 부족하고 변수도 너무 많아서 이게 당초 계획대로 이뤄질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각 도시에 이런 개별적인 제안이 가능한 것도 내전이 일어난 상황이라 가능한 것에 불과해. 그러니 내전이 종결되기 전에 선점하고 그 후에 유리한 고지에서 일치된 마우레타니아와 세부사항을 조율한다.’
서후는 속으로 그렇게 대답한 다음 야스미라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는 곧 술라의 군대를 맞닥뜨리게 될 겁니다. 자유무역지대의 가치를 저들이 파악한다면 주인을 바꾸려고 들지 체제 자체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히 저들의 공세는 팅기스에 주둔한 아군으로 한정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을 쳐부술 것이고 나아가 히스파니아 지역도 차지할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팅기스와 협정을 맺은 게 아닙니다. 아군, 바로 세르토리우스군과 협정을 맺은 겁니다. 만약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된다면 당신이 그로 인해 벌어들일 이득이 상상됩니까? 그렇게 진행된다면 누가 왕이 되든 우리와 손을 잡은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요? 이게 내가 당신에게 보장해드릴 수 있는 이득입니다.”
전쟁은 결국 물량 싸움이다. 싸우는 건 병사지만 병사를 병사답게 만들고 병사로 유지하게 만드는 건 결국 돈이다. 간단히 말해 물자가 없으면 전쟁을 지속할 수도 없고 이길 수 있는 전쟁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 서후의 이 같은 노력은 안정적인 물류를 공급받기 위한 발버둥에 가까웠다.
‘제아무리 컨트롤이 좋아도 자원 떨어지면 개털인 거다. 게임에선 자원이 떨어져도 병력이 지시에 따르기나 하지 현실에선 자원이 완전히 떨어지기도 전에 병력이 아마 허공으로 사라질 거다. 리처드가 보급을 중요시한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야.’
세르토리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다를 수 있지만 사람이 뛰어나 봐야 사람이다. 계속 굶으면 뭐 얼마나 다를 것 같은가?
“서로의 이득이 가장 확실한 동맹이라.. 정말 그렇군요. 생각 같아선 보다 확실하게 하고 싶지만..”
야스미라는 매혹적인 눈빛을 서후에게 보냈지만 그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이 여인과 이런 일로 얽히면 상당히 골 아픈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럴 나이도 아니었고 단순히 하룻밤 장난으로 끝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한 배에 탄 셈이니 당신들이 암초에 걸리지 않기를 염원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좋아요. 이해했어요. 그럼 이제 제가 뭘 하면 되죠?”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일단 첫 단추는 끼웠고 다음은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을 치울 차례다.’
“당연히 이 무역은 해상무역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아비라에서 지원 가능한 모든 배와 며칠간 배를 운용할 만한 간단한 물자를 요청합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육로로 교역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 효율성부터 다르다. 수레 수백 대도 넘는 분량을 배로는 한 번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러니 해상무역이 주가 되고 육로는 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배라면 군선까지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아비라는 당신들과 군사행동을 같이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미간을 살짝 좁히던 야스미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러자 서후는 연회장에 마련된 것들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걸 준비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서둘러 해결할 일이 많은지라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서후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호라티우스등에게 향했다. 야스미라는 그런 서후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