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 거부할 수 없는 제안.
54.
서후는 단호하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아비라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싶군요.”
안 그래도 야스미라의 발언에 웅성거리던 회의장이 서후의 말이 떨어지자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야스미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인지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귀족회의 수장인 이느얏트에게 시선을 줬다.
야스미라의 시선을 마주한 이느얏트도 할 말이 많았지만 조금 전에 전권을 맡긴다고 해놓고 그것을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손뼉을 두어 번 강하게 쳐서 소란을 잠재우고 야스미라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실례지만 말씀하신 제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입니다. 제가 듣기엔 당장 아비라를 공격하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불가침조약이 무슨 뜻인지 모를 분은 아니라 사료됩니다만?”
서후의 도발적인 언사에 야스미라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추측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팅기스는 아스칼리스의 지배 아래 놓여있던 곳입니다. 그런 곳을 침략하신 분이 이제 와 아스칼리스와 불가침조약을 맺고자 한다면 이는 저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누가 아스칼리스와 불가침조약을 맺겠다고 했습니까? 불가침조약의 대상은 팅기스와 아비라 양자 간 조약을 말하는 겁니다.”
서후의 제안에 야스미라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팅기스를 점령한 세력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면 아스칼리스가 아비라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저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지 궁금하군요. 조약이 체결되지 않는다면 아군은 군을 이끌고 아비라에 당도할 겁니다.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감히!”
서후의 광오한 발언에 이느얏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질렀으나 야스미라가 그에게 시선을 주자 분노가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양자택일하라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다른 자들과 달리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야스미라의 차분한 어조에 서후 역시 눈매를 좁히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쪽 사정입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제안을 거부할 시에는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또한 본인은 현 아비라가 제안을 거부할지 찬성할지는 알 수 없으나 두 번째 거래대상이 될 자들은 흔쾌히 이번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장담 드릴 수 있겠군요.”
“감히! 그런 협박 따위를!!”
“더 볼 것도 없다. 들을 것도 없다. 아비라에 들어온 로마군을 모조리 죽이고 전쟁에 임하겠다.”
“죽여라!”
강경파들이 목소리를 드높이자 그것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자칫하면 회의장 밖을 몸 성히 나가지도 못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서후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그때 야스미라가 언성을 높인 자들을 일일이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외쳤다.
“현 아비라는 본 야스미라의 뜻 안에 놓여있음을 잊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저 야스미라를 멸시하고 무시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습니까?”
목청을 드높이던 자들이 서릿발 같은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회의장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 야스미라가 서후에게 시선을 두고 다시 말했다.
“그쪽이 아비라와 전쟁을 원했다면 이렇듯 협상하려고 올 필요도 없었겠죠. 일단 더 들어보겠습니다.”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야스미라의 모습에 이번 협상에서 많은 이득을 취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본래 서후가 목적했던 것은 협상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협상 그 자체에 있었다.
“마스타네소스와 아스칼리스의 전쟁에서 당신들이 죽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와 술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무슨 말씀이시죠?”
“당신들과 상관없는 전쟁에 휘말려 불이익만 감수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오. 정녕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그러자 야스미라가 눈을 빛내며 서후에게 반문했다.
“이 난장판 속에서 저희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대체 뭐가 있죠? 팅기스보다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을 가진 곳이 이곳 아비라입니다. 이런 저희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 말고는 뭐가 있을까요? 그러니 당신의 말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내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모름에도 판을 키우고 있어. 영리한 여인이군.’
시의적절한 반론이었다. 실제로 야스미라의 발언에 많은 수의 귀족들이 격하게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건 다시 말해 서후가 이 반론을 넘어선다면 힘들이지 않고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야스미라로서는 서후가 반론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의 동의를 이끌어 낸 셈이니 말이다.
“이 땅이 황무지라면,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불과하다면 목숨 걸고 싸우며 점령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스칼리스, 마스타네소스 모두 온전한 왕국을 원하지 이리저리 부서져 볼품없는 왕국을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해하기 힘들군요. 당신들과 맺는 불가침조약만으로 아비라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글쎄요. 여전히 비현실적인 제안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서후는 야스미라의 대답에 자신에게 경계심과 적개심까지 드러내는 자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환을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우리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 아스칼리스나 마스타네소스 둘 중 누가 승리하더라도 그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들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
이느얏트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으나 그건 바로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말과 같았다. 저들과 불가침조약을 멋대로 맺으면 마스타네소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스칼리스의 분노를 사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어째서 양측 모두에게서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스칼리스의 분노를 살 것이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야스미라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팅기스의 세르토리우스군과 불가침조약을 맺겠습니다.”
“야스미라님!”
“적어도 이번 일에 한해 아비라의 결정권은 제게 있습니다. 잊었습니까?”
“하지만!”
“아스칼리스의 분노는 불분명하지만 여기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차피 더 이상 그의 분노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 말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겠죠?”
이느얏트는 야스미라의 말에 서후가 앞서 거론한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신들, 마우리족이 아닌 마사에실리족에 다다랐다. 그 순간, 이느얏트는 표정이 심각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피바람의 의미가 그 뜻이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야스미라는 몰라도 자신들은 모조리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앞의 소년은 허울에 불과하고 이미 물밑 작업에 착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이느얏트를 내버려 두고 야스미라가 서후에게 말했다.
“당신들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고 아비라가 마스타네소스의 지배권에 들어서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뒤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적을 앞뒤로 두고 싸우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팅기스를 빼앗겨 분노하겠지만 마스타네소스와의 일전이 더 중요한 아스칼리스는 팅기스 지역의 전쟁을 잠시 멈추고 싶은 마음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침략을 당한 자신이 이들과 휴전을 맺거나 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 휘하 도시가 독단적으로 조약을 맺는다면 그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 물론 독단적으로 조약을 맺은 당사자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지만 어쨌든 아스칼리스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야스미라, 자신이 치르게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이들 세르토리우스군은 무슨 이득을 얻는단 말인가? 마스타네소스 편에 섰다면 불가침조약이 아니라 휘하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게 당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죠?”
서후는 긴장한 표정으로 질문해오는 야스미라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좀 대화가 될 것 같군요. 불가침조약에 이어 요청할 부분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뭐죠?”
“팅기스와 이 일대 지역을 자유무역지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불가침조약은 바로 그 일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을 뿐입니다.”
“예?”
자유 뭐?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영민한 야스미라도 황당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 아비라의 모든 결정권이 있는 모양인데 아비라와 협상문제에 관해선 아버지께서도 제게 모든 전권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시지요. 우리의 제안은 야스미라, 당신에게도 결코 나쁜 제안이 아닐 겁니다.”
야스미라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느얏트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비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을!”
서후는 아까부터 자신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 이느얏트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와 거래를 체결할 텐가?”
“그.. 그건?”
“자격이 되지 않는 자는 조용히 해라. 한 가지만 기억해두도록. 자꾸 이런 식이라면 협조적인 자들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그러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나 역시 그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렇게 번거롭게 당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고.”
말을 잃은 이느얏트를 바라보던 서후는 다시 주변을 날카롭게 훑어본 다음 야스미라에게 말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시간을 좀 더 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오래 기다리진 않을 겁니다.”
서후는 그 말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서후가 회의장을 벗어나기 무섭게 그의 기세에 눌려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 이 이런 오만방자한!”
“저런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로마의 반군 주제에!”
저들은 비아냥거리며 한 말이지만 야스미라는 로마의 반군이라는 말이 청천벽력처럼 뇌리에 박혔다.
“이건..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로군요.”
“정녕 저들의 뜻대로 따를 생각이십니까? 마사에실리족이 야스미라님을 지지한다고는 하나 야스미라님 역시 마우리족의 일원임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그건 둘째 문제입니다. 저들은 로마의 반군입니다. 잔혹하기로 유명한 술라가 반드시 토벌군을 보내올 겁니다. 그리고 이곳 아비라에게도 원조를 요청하겠죠. 그때 상호불가침조약은 로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저들은 스스로를 반군으로 여기지도 않는 상황이니.. 아.. 이 제안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왜 저들이 상호불가침조약을 요구하는지 알겠어요. 저들은 술라의 토벌군에 힘을 합칠 보조군들의 수를 일차적으로 조약으로 방지하려는 게 분명해요. 따라서 불가침조약은 근방의 도시인 릭서스나 타무다에도 제안할 수 있겠군요.”
“흠?”
침음을 내뱉은 이느얏트는 야스미라의 통찰력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여자라고 내심 천대하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야스미라가 남자였다면 왕위쟁탈전이 벌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자연스럽게 스쳐갔다.
*
서후는 회의장 밖에서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합류했다. 그러자 그들을 지휘하며 기다리고 있던 호라티우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가 흐를지도 모르지만 팅기스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것 같진 않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대단하십니다.”
칼을 들고 진형을 짜고 전술과 전략을 통해 적을 쳐부수고 무너뜨리는 것만이 최선인 자가 호라티우스다. 따라서 말로 적과 협상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일이 잘 풀린 것 같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후는 호라티우스 옆에 선 나디르를 바라봤다.
“나디르.”
“예.”
나디르 역시 군대 내에서 완전히 달라진 서후의 위상 때문에 그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서 먹는 것이 제맛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나는 뜨거울 때 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지.”
“제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라카의 목숨값은 네게 맡기겠다.”
“맡겨주십시오.”
“프레펙투스 사비누스는?”
“따로 병사들을 이끌고 시내에 들어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사에실리족과 접선 중이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마사에실리족의 활용방안에 잠시 고민하던 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군. 우선은 선술집에 가서 간단히 목이라도 축이는 것이 좋겠군.”
“하하하. 언제든 환영하는 바입니다!”
호라티우스의 호탕한 웃음에 병사들 모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