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53화 (53/298)

# 53

53. 거부할 수 없는 제안.

53.

성벽 위에서 삼엄한 기세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해안 도시 아비라의 병사들을 바라보던 사비누스가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어인들은 크게 마우리(Mauri), 마사에실리(Masaesyli), 마실리(Massylii), 게툴리(Gaetuli) 이렇게 네 부류로 분류됩니다. 이들은 모두 반유목민이지만 다른 부족들과 달리 게툴리 만큼은 아프리카 내륙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어인들이고 완전한 유목민이라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마찬가지로 마사에실리족 역시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의 편을 들어 저들과 함께 몰락했기 때문에 염두에 두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부족에 대해선 간략하게나마 알아두시는 게 좋습니다.”

사비누스를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서후는 말 위에서 잠잠하게 경청했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이나 누미디아 왕국 모두 무어인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마우레타니아는 마우리족이, 누미디아는 마실리족이 다스리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서후는 사비누스가 왜 무어인들에 대해 설명하는지 알아차렸다.

“이곳 아비라에는 마우리족보다 마사에실리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역시 바로 눈치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본디 마우레타니아의 서부는 마우리족이, 동부는 마사에실리족이 강성했습니다. 반대로 누미디아는 서부에 마사에실리족이, 동부에 마실리족이 거주하고 있었지요. 어쨌든 마우레타니아의 왕가는 마우리족이고 그건 마스타네소스나 아스칼리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사에실리족의 지지를 얻으라는 말이라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서후는 다소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마사에실리라.. 아군이 로마의 반군으로 분류되긴 했으나 저들의 눈에는 우리 역시 로마군에 불과할 테니 우리와 협력하려고 할지 모르겠군요.”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마사에실리는 마우리나 마실리보다 먼저 로마에 협력하던 우방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포에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카르타고 쪽으로 돌아섰죠. 오히려 전쟁 초기에는 누미디아의 마실리족이 카르타고의 편을 들었습니다. 뭐 어쨌든 로마에 의해 몰락한 셈이니 적개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저들을 압제한 건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마사에실리족이 아비라에 많이 거주한다고 해도 아비라의 통치자는 마우리족의 일원일 것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무기가 되기에 충분한 정보로군. 멀리 있는 적이 눈앞의 적보다는 적개심이 덜 할 테.. 가만. 이거 혹시?’

서후는 갑자기 든 생각에 사비누스를 바라보자 사비누스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까지 알아차리신 겁니까?”

서후는 무거운 어조로 사비누스에게 대답했다.

“확실히 그편이 저희로서는 더 안전한 선택이 될 수도 있겠군요.”

“뭐.. 말씀드렸지만 일단 저도 테세우스님의 온건책에 동의합니다.”

그때 굳건하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서후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히이이잉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온 자는 말을 멈춘 다음 서후 등에게 말했다. 그가 탄 말은 투레질과 함께 좌우로 가볍게 서성거렸다.

다각 다각

“무장을 해제한다면 성내로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전언이시다.”

그러자 사비누스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일갈했다.

“우리는 고작 50명에 불과하다. 50명에 불과한 병사들도 두려워하는 것이 아비라의 뜻이라면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지. 대신 다시 올 때는 지금처럼 50명이 아닐 것이다.”

사비누스의 대답에 전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에 선 자를 힐끗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인다. 따라와라!”

그 말과 함께 전령은 그대로 서성이던 말의 머리를 돌려 열려있는 성문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이미 말을 돌려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비누스는 서후와 눈을 살짝 마주친 다음 그대로 말을 배를 가볍게 걷어차 말을 출발시켰다. 그것으로 시작으로 서후 등도 모두 아비라의 성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

“아비라를 정탐하러 로마군이 병사를 보냈는데 저들을 안으로 들이다니요?”

“맞소! 이는 아스칼리스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나 다름없소!”

“나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소. 아비라는 아스칼리스의 지배 아래 놓인 곳이오. 이 같은 반역 행위가 아스칼리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란 말이오.”

회의장에서 아비라의 귀족들로 보이는 자들이 성토하자 사람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이지적으로 생긴 여인이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탐? 이곳 아비라에 정탐할 것이 있기나 한가요? 저들은 아스칼리스의 명장인 익티다르 장군과 그 휘하의 강군들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둔 이들입니다. 팅기스의 수비가 이곳 아비라보다 월등하다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일 텐데 그럼에도 저들은 순식간에 팅기스를 함락시켰습니다. 저들을 상대로 아비라가 버틸 수 있기나 한가요? 그것도 아니면 저들과 전투를 치르면 아스칼리스가 우리를 구원할 여력이 있기라도 한가요?”

그녀의 질문에 목청을 드높이던 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마냥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비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대한 선택의 순간, 여인이 입을 열고 나머지 사람들, 그것도 귀족들이 그녀의 말을 경청하다니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건 눈앞의 여인, 야스미라가 보쿠스 왕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현재 마우레타니아가 처한 상황과 그녀가 가진 중요성이 다른 귀족들로 하여금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우하게 만들었다.

야스미라는 눈앞의 귀족들을 차분하게 시선으로 쓸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프타의 아들 아스칼리스는 아비라는 물론 이쪽 지역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루사디르로 향한 것을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곳 아비라 귀족회의 수장인 이느얏트가 입을 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루사디르의 전투가 어떤 결말을 맺을 지는 야스미라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스칼리스는 마스타네소스를 처단한 후 야스미라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명분과 실리를 한꺼번에 쥐어 명실공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마우레타니아의 왕이 될 테니까.

따라서 현재 그녀는 아스칼리스의 전리품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그녀를 멸시하거나 천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비가 아니라면 왕의 여동생, 즉 공주 중 하나의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까.

게다가 신분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평소 그녀는 하층민들에 대해 많은 도움을 베풀었고 그 결과 많은 마사에실리족이 그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저들이 실권을 잃기는 했지만 마사에실리족은 여전히 뛰어난 전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저들이 왕위쟁탈전에 가담하게 되면 전쟁이 어찌 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 아스칼리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은 큰 약점이지만 그 여인이라는 약점이 그녀에게 여러 가지 무형의 힘을 선사했다. 아스칼리스, 마스타네소스 그리고 마사에실리족. 이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비라에 아무도 없었다.

야스미라는 이느얏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건 지켜봐야 알겠죠. 팅기스가 저토록 허무하게 함락될 것이라고 우리 중 누구라도 예상한 자가 있었나요? 이런 상황에서 루사디르의 결과가 어찌 나올지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하지만..”

지금의 선택은 마스타네소스를 택하느냐 아스칼리스를 택하느냐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었다. 또한 멀리 있는 칼보다는 눈앞의 칼이 무서운 법, 마스타네소스보다는 아스칼리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건 생존본능과도 같았다.

“저들의 제안은 제 이름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세요.”

이느얏트가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라고 야스미라가 거론한 사실을 몰랐을까? 혹 저들은 몰랐을지라도 이느얏트는 잘 알고 있었다.

팅기스를 함락시킨 로마군의 협상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면 아스칼리스든 마스타네소스든 그들의 화가 미치기 전에 로마군의 칼에 난자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저한 것은 그 결과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며 그 모든 위험을 전가할 수 있는 야스미라의 신분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느얏트가 자신이 목적하던 바를 이루고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야스미라가 좌중을 훑어보며 전보다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신 제 이름으로 거래되는 모든 일에 대해선 저 야스미라가 아비라의 모든 결정권을 가집니다. 이 일에 동의합니까?”

그녀의 발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렸지만 이느얏트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야스미라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니 야스미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이치에 맡겠지요. 동의합니다.”

제한적 동의라는 걸 왜 모를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전가하기 위한 결정임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또한 이것이 자신이 목적하던 바였다. 그렇게 야스미라가 고개를 끄덕일 때 이방인들의 출입을 알리는 큰소리가 있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가 입장하십니다.”

그 이름과 회의장에 걸어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에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뻔했다. 세르토리우스라면 로마의 반군이 아니냐? 그에게 아들이 있었느냐? 얼마나 우리를 무시하기에 소년에 불과한 아들을 아비라에 협상하러 보낸 것이냐? 등등 말이다. 귀족회의 수장인 이느얏트도 상기된 얼굴로 황당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야스미라만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거침없이 회의장을 가로지르는 서후를 주시했다.

*

황당한 시선, 분노한 시선 등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낸 서후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이 아비라의 대표임을 알아차렸다. 여인이 아비라의 수장일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남자든 여자든 혹 아이라고 할지라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때문에 서후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세르토리우스께서 내 아버지 되십니다.”

“보쿠스 왕의 여식 야스미라라고 합니다. 현재 아비라의 모든 결정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모든 통치권을 위임?’

야스미라의 대답에 서후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리고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서후가 생각에 잠겨 있자 야스미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 지역 특유의 복색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자 화사한 꽃이 만개한 것마냥 화려한 아름다움이 그 미소에 묻어났다.

“아비라의 대표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의아하셨던 모양이군요.”

“협상대표가 소년이라는 사실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군요.”

야스미라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서후에게 말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은 의아했을지 몰라도 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말하자 풋풋하면서도 고유한 매력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육체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은 서후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살짝이나마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미약한 울림에 불과했기에 서후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게는 저 나름의 소식통이 있답니다. 그 소식에 의하면 익티다르를 살해한 자는 믿기지 않게도 소년에 불과한 자였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그 소년이 익티다르의 맹장 파드와도 함께 베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저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팅기스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죠. 소문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익티다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만은 확실하고 그 일 가운데 소년의 역할이 지대했다라고 추측하고 있는 가운데 테세우스 당신이 이 자리에 협상대표로 나섰군요. 그러니 제가 느낄 감정은 의아함이 아니라 호기심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미인의 관심을 마다하는 사내도 있던가? 더욱이 그 미인이 자신이 행한 일을 치켜세운다면 우쭐해질 수밖에 없고 더 우쭐하고 싶은 것이 사내들이다.

하지만 서후는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소식통? 보아하니 다른 대부분의 귀족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모양인데 이 여인은 거의 정확하게 소식을 꿰고 있군. 보쿠스 왕의 딸이리면.. 흠 역시 그랬던가? 아무튼 여러모로 거래에 적합한 대상이 될 수 있겠어.’

“거두절미하고 협상내용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따라서 서후는 곧바로 협상에 진입했다. 야스미라 역시 서후의 단도직입적인 화법에 미소를 지우며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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